그래도 조금은
젊은 복남은 아이를 낳은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나 김치 100포기를 담갔다. 그 많은 걸 다 담그고는, 골병이 들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몇 달을 누워서 지냈다. 또 이장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할아버지 탓에 온 동네 사람들 밥을 해 먹이느라 허리 펼 새가 없었고, 그 와중에 애는 넷이나 낳아 길렀고,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농사도 지었다. 그리고는 예순이 다 되어서까지 아흔 시모의 똥기저귀를 갈고, 병시중 까지 들었다.
그 세월을 다 견뎌 허리를 펴볼까 하던 차에, 호섭이와 복남이 두 부부가 알콩달콩 살 일만 남은 줄 알았던 어느 날에, 그의 아들이 장가를 가더니,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복남과 호섭이 살던 집을 팔아 돈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같이 살면서 손주들을 키워달라고 했다.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기는커녕 며느리한테 시집살이를 당했다. 집안일은 복남의 몫이었다. 며느리는 밖에서 돈을 벌어온다고 이리저리 다니더니, 어느날은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는 그 가게의 행주까지도 복남에게 빨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날 그 며느리는 죽으면서 손주들만 덜렁, 복남의 손에 남기고 갔다.
복남은 꾹꾹 참았다. 꾹꾹 참으며 자식의 자식들까지도 다 기르고, 자식들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돌아보니 복남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돈도, 젊음도. 그간의 삶을 돌아본 어느날, 복남은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동안 하도 꾹꾹 참다보니 복남의 가슴 속에는 화가 많았다. 복남은 깔깔깔 웃다가도 살아온 세월이 한스러워 가슴을 탕탕 치곤 했다.
때때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에 가기 싫을 때마다, 집이 없어서 서러울 때마다, 또 생활비가 빠듯할 때마다,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날들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한다. 아무 걱정 없던 때로. 아무것도 모르고 머리에 꽃 달고 손가락에 꽃반지 만들어 끼고 뛰어놀던 그때로.
어쩌면 복남도 살다가 한 번쯤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정말로 그의 바람대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중인 건 아닐까.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잊은 그의 얼굴이 저렇게나 맑아지는 것은 아닐까.
할머니가 치매로 말을 잃어가고,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이 슬퍼 울다가도 복남의 맑은 얼굴을 보면,
어쩌면 치매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힘들었던 기억은 잊고 행복만 하기를, 복남이 키워낸 한 꼬맹이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