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생 김복남은 멋쟁이다. 호박반지에 호박 목걸이, 금시계에 금반지를 챠-챠-챠- 끼우고, 멋쟁이 자켓을 입고, 머리는 굵게 웨이브를 주고, 빨간 루즈도 바른 멋쟁이. 곧 죽을 거라서 옷 같은 건 필요 없다는 88세 김복남을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소싯적 갖고있던 반지와 목걸이, 요것들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복남은 소싯적 멋쟁이였다. 첫째딸 상노가 금시계를 새로 사줬는데, 시계가 없다는 중학생 손녀에게 금시계를 빌려줬다가 이놈의 기집애가 그 귀한 금시계를 잃어버려서 10년간 금시계 타령을 했으며, 순금으로 만든 반지를 매일 손에 끼고 살았다. 복남은 남는 반지를 녹여 손녀의 금귀걸이도 만들어주고, 복남의 방식으로 곱게 치장할 줄 알았다.
복남은 옷이 없다고 종종 푸념을 하는데, (아마도 계절마다) 그러면 복남과 손녀는 함께 시장에 간다. 손녀가 어릴 때는 옷 사러 가는 김복남의 손을 붙잡고 따라다니곤 했었지만 손녀가 취직해서 돈을 벌면서 부터는 요 기특한 녀석이 자주 "내가 옷 사줄게!" 하면서 복남을 이끌고 시장에 가곤 했다. 이 녀석은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왠 장학금을 받았을 때도 그랬고 과외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도,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월급을 받아 복남에게 옷을 사주고는 했다.
복남이와 손녀가 자주 간 곳은 남문시장에 있는 "시민백화점" 이라는 곳이다. 남문시장에는 워낙 이런저런 가게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시민백화점 안에는 할머니들 옷가게가 특히 몰려있고, 특히 복남의 단골 집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자주 간다.
손녀가 보기에 사장님은 분명히 할머니를 모르는데 기억하는 척을 한다. "어머 또 오셨어요~" 를 태평스레 외치는 사장님에게 손녀의 의심의 눈초리가 스친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심 알아봐주는 게 좋은 눈치였고, 거기서부터는 손녀도 더이상 사장님이 복남이를 진짜로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복남의 단골집에 들어서면 옷이 아니라 일단 커피부터 주는데, 종이컵에 김 모락모락 나는 믹스커피를 한 잔 받아들고 옷을 입어보랴, 수다 떨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고른 옷이 여러벌일 때가 많다. 이건 사장님의 영업 전략이자 술수인게 틀림없다. 이건 옷을 사러 온 건지 수다를 떨러 온건지. 그러다가 옷은 뭐 이리 잔뜩 고르는지. 아주 웃기는 할머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 집 사장님은 영업의 왕이다.
손녀의 쇼핑 물품은 모두 김복남의 검사를 받는다. 검사라기 보다는 집에 무언가를 사들고 오면 뭘 사왔는지 택배가 오면 뭐가 왔는지 까보고 보는 복남이의 호기심 탓이다. 아주 호기심으로는 일등이다. 아니 사실은 복남이가 호기심이 많기도 하지만 손녀의 쇼핑 아이템을 구경하는 일은 일상의 작은 재미 포인트라, 복남으로서는 다 뜯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어느날은 손녀가 빈티지샵에서 할머니 같지만 할머니 옷이 아닌 빈티지 자켓과 가디건들을 잔뜩 사들고 갔다. 여느날 처럼 손녀가 쇼핑한 옷을 보여주려고 사온 옷들을 잔뜩 꺼내놓았다. 근데 이놈의 노인네가 그걸 하나하나 자기가 입어본다. 자기 것인 줄 안거다. 자기 거 아닌 데. 모자도 쓰고, 자켓도 걸쳐보고, 스카프도 해본다. 그러면서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홍홍~"하며 당연히 자기 옷인 줄 알고 웃음꽃을 활짝 피운다. "아이구 참 좋구나. 참 좋다." "한세상 손녀 덕에 호강하는 구나. 아유, 아유." "당장 노인정 가서 자랑해야겠어" "이거 입고 가면 춤을 추겠구나"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는 복남에게 손녀는 "이거 내건데?" 라고 하고 싶지가 않았다. 너무나도 행복해하는 복남의 모습에 짐짓 사온 게 전부 복남 옷인 척을 한다. "옷이 이뻐서 할머니 주려고 샀지~"하고.정말이지 못말리는 할머니다. 아, 이정도면 비싼 금시계를 잃어버린 망할놈의 손녀도 "우리 이쁜 손녀"가 되어있을 것이다. 이걸로 그 망할놈의 손녀가 잃어버린 금시계에 대한 약간의 빚은 갚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