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남 일대기 04. 일제강점기 어린이 김복남

by 동자

김복남은 10명 가까이 되는 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에 태어났으나 출생신고를 늦게하는 바람에 주민번호는 36으로 시작하며, 그래서 손녀는 김복남을 1936년생으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실은 1934년생 이다. 더불어 생일도 잘못되어 있는데, 실제 생일은 음력 2월 14일이지만 3월 7일로 신고되어 있다. 복남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옥계면 금진리로, 마을 바로 앞에는 해변이 위치해있다. 어린 복남이의 동네 앞에는 바닷가, 뒤에는 산이 있었다. 산으로 놀러 가서 나무 열매를 따먹고, 바닷가에서 떠밀려온 미역을 주워다가 볶아도 먹고 끓여도 먹었다.

강원도 촌구석에서 나고 자랐지만, 10형제 중 첫째 오빠가 돈 벌러 배 타고 저 멀리 일본으로 팔려가다시피 나갔다가 무슨 영문인지 선장이 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얼떨결에 부유해진 집안 환경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복남이는 아주 영악해서 언니 복덕이랑 윷놀이를 할 때면 은근슬쩍 윷이나 모가 나오게끔 비껴 던지는 방법을 알았고 복덕이는 맨날 졌다. 복남이는 은근슬쩍 자꾸 복덕이를 이겨먹었고, 계속해서 게임에 진 복덕이는 이내 때려치워를 외치며 TV나 보자고 한다. 이건 그 복남이의 손녀가 2011년쯤 목격한 사건이다. 2022년 현재 그 많은 형제 중에 여덟은 다 죽고, 복남의 바로 위 언니인 복덕이와 복남만 생존해있다. 애석한 것은 복남이도 복덕이도 오늘내일한다는 사실이다.

복남이 태어난 1935년은 일제강점기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으나 식민 지배 말기, 전쟁과는 거리가 먼 시간적 배경과 당시 어린이였던 덕에 전쟁의 고통이나 나라를 빼앗긴 아픔 따위는 잘 모르는 듯하며, 2022년의 손녀는 개인적으로 1940년대의 9세 어린이 김복남이 전쟁이나 식민지배의 아픔 따위를 알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복남이는 어려운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국민학교까지 진학했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조선말을 쓰면 매를 맞았다. 조선말을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는 아이가 있으면 그런 작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서로서로 고자질을 했다나. 그래서 일본어만 써야 했단다. 복남이는 왜인지 국민학교 2학년까지인가 밖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역사적 배경 탓에 제법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당시 9살짜리 어린 복남이 일본어를 제법 유창하게 구사하자 일본인 선생은 복남을 꽤나 예뻐했다고 한다. 1945년 광복으로 일본인 교사들이 전부 돌아가야 했을 때는 슬퍼하기도 했다는데, 그걸 듣고 손녀는 전쟁이나 식민지배와는 별개로 그 안에서도 인간대 인간의 사랑, 우정,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늘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작던 어린이가 잠깐 배운 일본어로는 젊을 때 막내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단다. 딸내미에게 일본어를 가르칠 정도면 복남의 일본어 실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남은 실제로 70대까지 약간의 일본어를 구사했으며, 당시 10대였던 손녀는 '우리 할머니가 일본어를 하다니?' 하며 글로벌 인재 김복남을 우러러보았다.

당시 창씨개명이 단행된 관계로 복남에게도 일본식 이름이 있었는데, "가네가와 후쿠낭"이라고 했다. "김복남"과 왠지 비슷한 것이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억하심정만 빼고 본다면 꽤나 귀여운 이름이다.

올해로 88세를 맞는 김복남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서 많은 사랑을 받고, 아이답게 웃고, 가끔은 넘어져 울기도 하고, 친구들과 놀이도 하고, 그 놀이에서 이기려고 속임수도 쓰고, 물고기도 잔뜩 먹고, 생떼도 부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늙어버린 복남이 슬프지 않다.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88세가 된 노인 김복남의 삶이 납작하지 않고 참 다채로웠다는 것이. 그것이 사실은 손녀의 지레짐작일 뿐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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