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남의 남편은 윤호섭 씨다. 윤호섭 씨는 경기도 양평군 성덕리 이장을 꽤나 오랫동안 도맡았으며, 그 덕분에 복남이는 이장 사모님으로 이 동네 저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먹였다. 2022년의 손녀가 보기에는 복남이를 고생시킨 가부장제의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복남에게는 그런 일들이 퍽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잔뜩 와서 밥을 지어 먹이는 일과, 그것을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들이. 그리고 자신의 음식 솜씨를 통해서 보람과 존재가치를 느끼는 일련의 과정들이.
복남이는 그렇게 시집가서 젊은 시절 양평에 살다가, 아이들이 다 커서 사회에 나갈 때 즈음인 어느 날 호섭이랑 같이 서울로 상경을 했다. 살림만 하던 복남이가 무슨 재간으로 그랬는지 서울에서 잠시 꽃장사를 했다고 한다. 트럭에 예쁜 꽃을 잔뜩 싣고서. 한 번은 어떤 아저씨가 와서 꽃값을 속여 사기 치려고 했는데 자기가 계산을 머릿속으로 해보니까 이놈이 나를 속이는구나 알았단다. 당최 무슨 사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간 꽃값으로 사기를 당할 뻔했는데 복남이가 가까스로 사기를 피했음은 분명하고 그걸 두고두고 자랑삼아 손녀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 꽃장사를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건대, 복남이는 그 일을 꽤나 좋아했다. 꽃장사를 계속했으면 재미 좀 봤을 텐데 너희 아빠가 너희를 키워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린놈의 새끼들 때문에 복남이의 재미 하나가 끊긴 것은 애석한 일이다.
복남이와 호섭이는 꽤나 성실하게 일해서 서울시 방배동 일대에 아파트를 한채 샀다. 당시에는 아파트 사는 게 그리 자랑도 아니었고 돈벌어서 주택 산다는 시절이었으니 그리 비싼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복남이와 호섭이가 서울 온지 얼마 안돼 마련한 작은 결실이었다. 아이들은 서울 곳곳으로 일하러 갔고, 부부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셋이 살 요량이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도 참 힘이 들었다. 똥 기저귀를 갈고,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성미를 가진 치매노인을 부양하는 일은 부부가 같이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복남이와 호섭이는 호섭이의 어머니이자 복남이의 시어머니를 부양하면서 살이 쪽 빠졌다. 호섭이의 막냇동생인 간난이는 복남이의 시누이 이기도 했는데, 훗날 손녀는 간난이로부터 두 사람이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을, 그래서 두 내외가 살이 쪽 빠져 퍽 수척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그렇게 수년, 복남이의 시어머니가 죽고 지옥의 시집살이가 끝났다. 참 지긋지긋했다. 젊었을 적엔 그렇게 괴롭히더니, 다 늙어서는 징글징글 죽지도 않고 아흔세 살까지 살았다. 수십 년 자신을 괴롭힌 시어머니의 똥기저귀를 수년간 갈고 음식을 해먹이기가 쉬웠으랴.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 부부는 이제 편하게 쉴 일만 남은 터였다. 그런 줄 알았다.
그즈음 복남이의 아들이 집을 팔아서 같이 살며 제 자식들도 좀 봐달라고 했다. 그렇게 복남이와 호섭이는 아들 며느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손자, 손녀를 만나게 되었다. 핏덩이들을 복남이와 호섭이에게 맡기고 아들도 며느리도 여기저기 돈을 벌러 나가고, 집안일은 또다시 복남이의 차지가 되었다. 시어머니가 죽어서 끝난 지옥의 시집살이가 며느리와 함께 부활했다. 지옥의 시집살이 2탄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지옥은 아니었어도 어쨌든 시집살이 2탄이었다.
2022년의 손녀는 늘그막에 맡게 된 핏덩이들의 존재가 복남의 인생에서 행복인지 불행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손녀는 종종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남에게 약간의 재산이라도 있었다면, 자기 것을 조금 더 챙겨가면서 살아왔다면, 복남은 지금보다 더 건강했을 수 도 있었을 텐데. 조금 더 즐거운 순간들이 많았을 텐데. 어쩌면 손주들의 존재는 복남에게 약간의 불행을 담보로 한 행복이었을까. 뭐였을까. 어쨌든 그때에 복남이가 집을 팔아서 아들에게 돈을 다 줘버렸으면 안 됐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최소한의 노후대비를 했어야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당한 것은 김복남인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그의 손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