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노인 김복남이 거울을 본다. 심장이 별로 좋지 않아서 온 몸이 퉁퉁 붓는다. 손자 손녀가 서너 살 일 즈음에 복남이는 심장 수술을 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전신마취, 대수술, 몸에 피가 다 빠져 수혈을 받아야 했던 어느날을 지나 건강하게 지내왔다 자부했는데, 80세쯤 되니 또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그래서 온몸이 퉁퉁 붓고는 한다. 복남이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서 이런저런 집안일을 마친 복남은 한숨을 돌리는데, TV를 보다가, 혼자 퉁퉁 부은 다리를 들여다보다가, 또 다리를 꾹꾹 눌러본다. 꾸욱 누른 자리에는 손자국이 나고, 부어서 탄력이 없어진 몸에 난 자국이 없어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거 봐라. 죄 부어서 이렇게 자국이 안 없어져" 복남은 손녀가 학교에 다녀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기 몸을 손녀에게도 보여준다. 꾹꾹 눌러서 눈밭에 남은 발자국 마냥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흔적들을 보여준다. 또 어느 날은 오늘 노인정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기도 한다. "어떤 할망구가 있는데, 자꾸만 속여. 그래서 내가 막 뭐라고 그랬어. 그 할망구랑은 다시는 고스톱 안칠 거야."와 같은 자질구레하다 못해 그깟 점 10원짜리 화투놀이를 가지고 빈정 상하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한다. 손녀는 그게 웃기기도 하고 '아니 왜 그런걸로 저렇게 감정 싸움을 하시나 이놈의 할마시들이' 생각하지만. "어유 왜그랬대~ 이상한 할머니네~" 맞장구를 쳐 주어 복남을 흡족하게 하고 만다.
김복남이 다니는 장수노인정에는 할아버지들은 몇 안되고 할머니들이 더 많다. 보통은 할머니들끼리 놀지만 어느 날은 할아버지들이랑 같이 놀다 와서는 또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 어떤 할아버지가 있는데 실컷 놀려먹고 왔다고 근데 자기가 제일 잘 놀린다 하면서 깔깔대는데, 손녀는 아마도 김복남을 닮아 짓궃은 장난을 좋아하게 될 것이었다.
김복남은 그런 자질구레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손녀에게 잔뜩 보여주고 들려주었다. 시끄러운 노인네 김복남은 그렇게 노인정 가서 하루종일 떠들었으면서, 손녀가 학교 끝나고, 회사 끝나고 집에만 가면 잠들 때까지 떠들곤 했다. 손녀는 그런 말 많은 복남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태어날 때부터 복남이가 있었으므로 거부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시끄러운 복남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 보느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때에도 드라마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김복남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끔은 일찍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손녀의 엄마이자 자신의 며느리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 할 때면 손녀는 자기 엄마 욕을 하는 복남이가 밉기도 했었지만, 손녀는 어느샌가 자신의 엄마이자 김복남의 며느리 영희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손녀는 일찍 죽어버린 엄마 김영희 보다 할머니인 김복남의 편이었다. 그렇게 손녀는 어느순간부터 죽은 제 엄마보다도 옆에서 시끄럽게 노래하고 웃고 떠드는 복남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번 한 이야기 또 하고, 돌아서면 또 하고, 오늘 한 이야기 내일모레 또 했던 복남 덕에 손녀는 복남의 어린 시절과 아팠던 시절, 젊었던 날을 꽤나 많이 알고 있다. "할머니! 아까(혹은 어제, 혹은 수십 번) 얘기했잖아!" 툴툴대면서도 드러누워 복남의 이야기를 듣고, 웃고 떠들었다.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면서도 듣고 또 들었다. 손녀는 한번 본 영화나 책, 한번 본 건 절대로 두번 보지 않는 인간이었다. 내용 아는데 왜 또 보냐는 거다. 그러나 복남의 이야기만큼은 내용을 알아도 듣고 또 들었다. 알고도 듣고 모르고도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가끔은 듣는 척만 하고 TV를 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덕분에, 말하고 또 말하는 복남 덕분에, 많은 날 먹고 자란 김복남의 이야기를 손녀는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살아갈 힘이 될 이야기들이었다. 손녀는 복남이 보고싶을 때마다 복남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써도 써도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서 손녀는 좋았다. 문득 자신의 삶을 잔뜩 들려준 복남이 고마웠다. 시끄러운 복남이 덕분에 손녀는 바다 마을 어린이 김복남에서부터 90세 노인 김복남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날의 복남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만 툴툴대고, 당신 옆에 서서, 앉아서, 누워서 재잘대는 인간이 있다면 귀 기울이시기를. 비록 어제 했던 말일지라도, 아니면 10번째 듣는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이 그리워질 날이 올 테니. 평범하다 못해 하찮게 느껴지기도 하는 어느 날이 뼈저리게 그리워지는 날이 올 테니.
손녀는 말하고 싶다. 매 순간 당신보다도 자신을 더 아껴준 복남에게, 토요일이면 목욕탕에 가고, 마트에서 장보고, 팔짱 끼고 옷 구경 다니던 그 모든 일상의 순간에, 당신이 있어 늘 행복했다고. 손녀는 그것이 행복인 줄도 모르고 자주 울곤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늘 행복이었다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엄마이자, 할머니였던 김복남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