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답은 불편을 다루는 힘
제 딸은 지금 여섯 달 된 아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기는 정말 귀엽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제가 육아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요.”
그 말에 저는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금은 세탁기, 건조기, 로봇청소기, 배달 서비스까지, 편리함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요즘 부모 세대는 오히려 육아를 더 힘들어합니다. 저 역시 손주를 잠시 돌보고 나서야 “나는 어떻게 두 아이를 키웠을까?”라는 질문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편리함이 넘쳐나는데 왜 더 힘들게 느낄까요? 그 이유는 우리는 ‘몸과 마음의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불편에도 크게 지치고, 몸이 힘들면 마음까지 불편해져 결국 불편을 피하려는 충동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이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편리함을 끝없이 추구해 온 사회적 흐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맞벌이가 보편화되고, 대가족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은 이전과 다릅니다. 그러나 반복적인 노동을 회피하는 습관 속에서, 육아처럼 몸을 써야 하고 변수가 많은 일은 훨씬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결국
“몸의 피곤함 → 마음의 불편함 → 회피하고 싶은 충동”
이라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지요.
제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 원장은 둘째 아이를 키우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전에는 빨래가 힘든 정도가 10이라면, 세탁기 덕분에 이제는 2가 되었죠. 설거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육아는 예전이 10이라면 지금은 고작 7~8일 뿐이에요. 그러니 상대적으로 더 힘들게 느껴지는 거예요.”
숫자로 풀어낸 이 설명은 참 명쾌했습니다. 다른 일들은 지나치게 편해졌지만, 육아는 여전히 몸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육아의 수고가 더 크게,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모의 태도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힘들까 봐”라는 이유로 방 청소, 집안일, 간단한 음식 준비 같은 일을 부모가 대신해 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에게 ‘불편한 일, 귀찮은 일을 스스로 하는 힘’을 빼앗는 일입니다.
AI와 로봇이 집안일을 대신하는 시대가 와도, 사람이 직접 몸으로 해내야 하는 영역은 남습니다. 아이는 그 과정에서 근육, 유연성, 끈기 같은 기본기를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모든 불편을 가로막아 준다면, 아이는 작은 불편함, 귀찮음에도 쉽게 포기하는 성향을 배우게 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머리만 크고 몸은 약하다.”
이는 편리함만 좇으며 몸을 쓰는 경험을 잃어버린 세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불편한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살고 있음을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것이 습관이 되면서 잃어버린 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쉬운 길만 찾는 습관은 결국 아이에게도 스며듭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자녀를 키우면서 더 편한 길만 택하고 있지 않은가? (예: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도 학원에만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등)
나는 아이의 불편을 대신 감당하며 아이의 성장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가 당연히 해야 할 자기방청소, 간단한 식사 준비 등)
AI 시대가 되어 검색조차 챗GPT에 맡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검색하는 힘’마저 잃게 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 속에서 잃어가는 능력이 무엇인지를 냉철히 살피고 균형을 잡는 일입니다.
삶에는 수많은 불편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그 불편을 회피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감내하며 훈련의 기회로 삼을 때 부모와 아이 모두 단단해집니다.
몸의 불편은 마음의 불편으로 이어지고, 그 불편은 회피하고 싶은 충동으로 자랍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몸과 마음은 동시에 강해집니다.
편리함은 누리되, 불편은 성장의 도구로 삼으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부모는 유쾌하게 불편을 웃으며 맞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는 힘’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시작해 보세요.
“지금까지 불편해서 피했던 일들아, 이리 와. 내가 너를 훈련 삼아 맞아 줄게. 불편이 편안해질 때까지 함께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