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회상 그 네댓 개
1) 2015년 10월 2일의 부산 송정 해수욕장의 발자국들, 음각이 아니라 양각이다. 사람 발자국 사이에 새 발자국도 보인다. 새의 날갯짓이 공중에 남기는 흔적은 어떤 모양일까? 나르는 새도 걸으니 흔적이 남는다.
돌아본다. 돌아보니 보이는 내 흔적들, 아득히 먼 10대 20대 때의 비틀거린 발자국들, 양각이 아니라 음각이다. 서툴렀기에, 아팠기에 접어 두었던 그때 그 발걸음들, 연민으로 다시 보면 양각이 될까.
2) 2016년 10월 31일 그날 비가 많이 내렸다. 달려 도착한 곳은 고흥반도 소록도.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돌 위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 - ㄹ닐니리 /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 - ㄹ닐니리 //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 - ㄹ닐니리 //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 눈물의 언덕을 지나 / 피 - ㄹ닐니리“
그랬다. 까까머리 고교시절 외웠고 더러 읊었던 시다. 지금도 오월 보리밭을 지날 땐 떠오르는 시다. 한하운의 시가 소록도 거기에 돌이 되어 비 맞고 있었다.
3) 2016년 10월 31일 소록도 길 가우도, “물장구치고 산토끼 쫒던 어린 시절”을,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이 내 마음이던 유년시절 동무들과 70대 노년 되어 함께 찾은 가우도, 나는 그의 이야기에 한참 귀 기울였다. 일행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데. (인용은 이용복의 ‘어린 시절’ 일부)
4) 2017년 10월 27일 악양 지리산 산기슭 여기, 버린 비누곽에 메뚜기가 앉아 있다. 하도 꼼짝하지 않기에 계절이 계절인지라 죽은 죽은 줄 알고 손을 댔더니 격하게 반응한다. 한참 후 다시 와 보니 메뚜기는 그 자세 그대로 변함없이 있었다. 손을 대보니 반응이 없다.
메뚜기에게 미안했다. 고요 속에 마음을 평정하며 임종 준비하고 있는 줄 모르고 손을 댄 것에 대해.
메뚜기에게서 배웠다. 언젠가 내가 지구를 떠나게 될 때 어떤 자세로 떠나야 할 것인지를.
5) 그리고 지난 10월 3일 울산 울주군 언양 대곡리 반구대의 암각화,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 가보지 않았고,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도 보러 가지 않았던 신화(神話)의 절벽 앞에 드디어 가서 섰다. 문화 해설사가 “복이 많은 줄 아세요. 선대에 나라를 구했습니까? 오늘처럼 잘 볼 수 있는 날도 그리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가리키는 곳을 망원경으로 보니 고래, 사슴, 멧돼지, 호랑이, 성기를 노출한 사람 등 원시인의 언어가 그림으로 보였다.
다 보진 못했지만, 겨우 몇 개만 보았지만 선사시대 그때로 내가 돌아가 함께 있기로도 한 듯, 내 의식을 그리로 끌고 가 그런 눈으로 보았다.
내가 머무는 지리산 산기슭도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원시성이 조금 살아난다. 문명 속에 내가 있지만 근원적 본향은 원시성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반구대 여기서 다시 해본다.
6) K와 긴 시간 통화했다. 진주에서 밤새 차를 달려 내일 11시경 인천공항에서 자기 사는 곳 오지리 빈으로 출발한다고 한다. 긴 시간 통화 동안 우린 까까머리, 단발머리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 나는 남자고등학교를 다녔고 K는 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남자고 그는 여자였으니까. 가난했고 비틀거렸고, 가난해서 배가 부르지 않았고 비틀거려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던 10대 후반 20대 초 중반 그때 나눈 우리들의 대화를 아름답게 회상했다. 그는 교수직을 일찍이 버리고 독일을 거쳐 오지리로 갔다. 전화를 끊은 후 10년 전의 삼천포 광포만 ‘쪽빛 언덕’에서의 만남 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우리는 삼십 년을 부챗살 접듯이 접었다. 접으니 우리는 '지금'을 살면서도 ‘그때’로 돌아갔다. ‘그때’로 돌아갔으면서도 우리는 그때를 ‘지금’으로 재현했다. 『데미안』, 『지성과 사랑』, 『유리알 유희』, 『페터 카메친트』, 『차륜 밑에서』의 헤르만 헤세를 이야기하고, 『권력과 영광』의 그레함 그린을 말하던 그 분위기로 스스럼없이 돌아갔다. 우린 그때 그러니까 고교 시절에 뭘 모르면서도 헤르만 헤세를 도 그레함 그린을 열심히 얘기했었다.”
“그 시절의 우리 주요 만남 고리는 비였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만났다. 철길을 걸었고 서장대 길을 걸었다. 망경동에서 순천 쪽으로 가는 철길, 유수리 부근까지 이르는 철길.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얘기했고 이파리가 물들어 떨어지면 이파리가 떨어져서 얘기했다. 아무튼, 그 시절에, 그 푸른 청춘 시절에 공부는 안 하고 맨 날 만나기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러 만났다. 그런 만남이, 그러니까 까까머리 단발머리 그 시절의 그런 만남이 이제 생각하니 시리도록 그립고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했다. ‘세월’이라는 것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그렇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이제 생각하니 보석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포만은 쪽빛 바다였고, 쪽빛 바다 너머론 지리산의 천왕봉이 고독하게 서 있었다. 산봉우리는 앉아 있는 건가? 서 있는 건가? 누워 있는 건가.”
“잘 가라.” “잘 살아라.”는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프랑스 노래 고엽(Autume Leaves)의 일부다 : 아, 회상해 주기 바란다. 그 무렵에 인생은 덧없이 아름답고, 태양도 지금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고엽은 삽으로 퍼서 모아진다. 잊을 수가 없다. 추억과 회한도 또한 그 고엽과 같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