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댄힐 Sep 28. 2016

터는 깻단 옆에서

끌려가는 송아지, 나는 제비

https://youtu.be/F6gGl4iTsjM

    “노동(생계를 위한)은 신분상 깨끗한 손과 말끔한 옷, 현실 세계에 대한 상아탑 적 무관심에 젖어있는 교수(교사)에게서 기생생활의 때를 벗겨준다.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에서)


   ①긴급재난문자가 내 스마트폰에 강제로 침입한 지 벌써 며칠째인가? 오늘도 어김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례하게 전화기를 안에서 한바탕 치고받고 있다. 작년만 해도 오후 2시경엔 밭에 들어갔는데 올해엔 어림도 없다. 5시 이후에야 들어설 엄두를 낸다. 그래서 점심 후 지적 활동이나 악기 활동을 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 사고 나서 간간이 읽던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의 페이지를 많이, 아주 많이 넘기게 되었다. 이제 곧 그 책에서 손을 떼게 될 것 같다.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삶의 지속』,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등 니어링 부부(스콧 니어링, 헬렌 니어링)가 쓴 책 읽기의 마지막 코스가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인데 책의 크기가 작지 않고 내용의 풍부함이 많이 커서 시간이 걸린 것이다.


   ②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스콧 니어링의 노동에 대한 생각에 나의 노동 의미가 그대로 들어맞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가노동치고는 강도(强度)가 센 노동을 이곳 산기슭에서 길게는 10년, 짧게는 3년째 하고 있다. 3년은 연구실을 떠난 이후의 삶을 말한다. 연구실을 떠날 때 한 결심, 말을 하기 위해 남 앞에 서기보다는 그 누가 하는 말을 듣기 위해 청중석에 앉겠다는 생각을 지금으로선 실천하고 있어, 나의 그런 결심이 공염불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쉬곤 한다. 나의 손등은 거칠어졌고 손바닥엔 마디마디 못이 박혔으며 손가락은 휘었다. 옷은 늘 땀에 절고, 현실을 보는 상아탑 적 눈꺼풀은 벗겨진 지 오래며, 연역적 추론보다는 귀납적 경험적 추론이 내 농사일 접근 방식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스콧 니어링의 노동관에 한발 다가서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스콧 니어링, 그분의 도전적 실천적 삶의 자세 앞에 고개 숙일 따름이다. 읽을수록 흉내도 내지 못하겠다는 생각만 깊어진다. 


   ③참깨를 베었다. 폭염 탓인지 키가 웃자라서 서둘러 베어낸 것이다. 참깻잎을 하나하나 다 따내었다. 이건 편의 독특한 농사법이다. 한 잎 한 잎 따내어야 하기에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지만 이렇게 해서 말리면 더 잘 마를 뿐 아니라, 깻단을 털 때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귀납적 경험법칙. 올해 깨 농사는 비록 설농은 아니라고 해도 기대만큼 소출이 나지 않는 농사라고 주위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다섯 되 정도는 기대했는데 그 절반도 되지 않겠다고 편이 말한다. 


 

   ④다 턴 깻단을 옮길 때 내 코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하나 내보냈는데 그건  ‘도나 도나 도나’였다. “장터 가는 마차 위에 슬픈 눈의 송아지….” 조안 바에즈, 60년대 저항 운동의 대표 뮤지션이면서 포크 계열의 전설로 여겨지는 멕시코계 가수. 그녀는 이 곡을 1960년대에 발표했다고 한다. 시장으로 팔려가는 송아지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졌지만, 실은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작사가의 아내와 두 아들이 나치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 저항할 줄 모르고 자유의 소중함을 모른 채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비판하는 노래로, 조국 없이 떠돌아다니며 세계인의 핍박을 받던 유대인의 불행한 삶을 자조적으로 노래했다는 해석이 있다. 반전 곡이며 70년대 이 땅에서 금지곡이었기도 하다. 

   

    ⑤이 노래를 듣게 되거나 흥얼거릴 땐 이어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건 서울 남산의 '드라마 센터'다. 아마 군 복무 후 복학한 후라면 72년 가을쯤일 것이다. 드라마 센터 거기에 가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본 적이 있는데 ‘도나 도나’를 그때 처음 들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서 ‘sunrise sunset’을 들은 기억은 뚜렷한데 ‘donna donna’는 확실하지 않다. (세상에! 지금 자료를 찾아보니 이 노래가 그 뮤지컬에서 불렸다. 원곡에 표기된 도나는 Donay로, 히브리어로 ‘主여’를 뜻하는 ‘아드나이’를 위장 표현한 거라고 한다) 아무튼, 이 노래를 듣기는 드라마센터에서 들었는데 익히기는 뚜아에무아를 통해서였다. 한국 포크사의 가장 아름다운 듀엣이라는 평을 듣는 그들 1집이 1970년에 나왔으니까 내 기억이 대충 맞아떨어진다.  


   

   ⑥깨알, 참 작다. 볼수록 작다. 저 깨알이 모여 한 되가 되고 두 되가 된다고 생각하니 털 때 튀어 나간 깨알을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둘 수 없다. 편이 털 때 옆에서 서성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털 때 튀어나간 깨알을 잔디 속에서 찾을 수 없으니 튀어 나가지 않게 한 면이라도 막아서는 수밖에.


   ⑦“장터 가는 마차 위에 슬픈 눈의 송아지, 머리 위로 제비 한 마리 날쌔게 하늘을 나르네. 바람들 웃는 것 봐 허리 꺾고 웃어대네. 종일 웃고 또 웃네. 여름밤이 다 가도록. 주인 농부가 말했네. 불평이란 그만해. 누가 너더러 송아지가 되랬나. 왜 당당하고 자유로운 제비처럼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지 못했니. 송아지는 묶여 죽임을 당하면서 그 이유를 까맣게 모른다네.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자는 누구나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우지.”


   ⑧요새 제비를 볼 수 없다. 공중을 본다. 푸르다. 흰 구름 몇 점 있다. 형제봉 활공장에서 막 비상을 시작한 패러글라이더가 제비 대신 날고 있다. 세상에! 참깨 알을 보다가 공중으로 눈을 돌리니 내가 너무 작은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까치, 호감에서 비호감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