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계단 본 김에 내 삶의 계단 사색
삼천포 초입 광포만의 높은 곳에 자리한 커피 홀도 전망이 좋았다. 요새 새로 지은 전망 좋은 커피집들이 부근에 많다.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이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장식용으로 보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 포토 존으로 설치한 것이려니 짐작했다. 그 계단 이름을 ‘천국의 계단’이라고 부른 글도 보였고 ‘천사의 계단’ 또는 ‘하늘 계단’이라고 부른 글도 보였다. 나중에 보니 이런 시설 설치한 커피 집이 전국에 많이 있었다.
하늘 계단 저 모습,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면서 그곳에 갔다. 가서 보니 그리 높지는 않은데 난간이 없으니 내가, 함께 간 우리가 오르내리면 공포심이 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간 우린 모두 노년들이다. 난간 아래에 펼쳐 저 있는 그물망은 안전시설인 듯. 커피를 마시면서 보고 있다가 “그래도 그렇지, 여기 온 김에 우리도 한번 올라가자”라고 내가 외쳤다. 일행 중 몇 명만 응했다. 난간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가? 올라갈 땐 올라갔는데 돌아서서 내려올 땐 바짝 긴장이 된다. 물론 담력이 큰 것처럼 과시할 생각은 올라가기 전에 버리고 올라갔었고.
돌아와서 무릎을 쳤다. 하늘 계단 저거,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탈출 계단과 비슷한 이미지 아닌가. 참 오래 전의 영화, 트루먼 쇼를 네이버 영화관에서 사서는 다시 돌려 봤다. 트루먼 쇼, 어떤 각도에서든지 이야깃거리를 많이 끄집어낼 수 있던 영화 아니던가. 삼천포 광포만 커피 홀의 하늘 계단에 후들후들 떨면서 오르내린 김에 또 영화 트루먼 쇼를 다시 본 김에 계단 또는 층계의 인생론적 의미를 이리저리 짚어봤다. 계단과 층계, 알고 보니 그건 그게 그거였다. 계단이 층계고 층계가 계단….
영화 트루먼 쇼의 계단 : 올라가서 탈출하는,
자신의 모든 삶이 24시간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오직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주인공 트루먼은 진실을 알게 되자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탈출을 시도한다. 트루먼이 사는 작은 섬 소도시는 거대한 돔으로 둘러싸인 인공 세트이고, 그 안에 설치된 5천대의 카메라가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찍고 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바다 저편까지 나간 트루먼은 세트의 끝에 도달한다. 트루먼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그려진 세트 벽을 두드리며 절망하고 분노한다. 마침내 트루먼은 세트 벽에 설치된 계단을 발견하고 그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 맨 위 ‘EXIT’가 새겨진 문 앞에 다다른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Good afternoon, Good evening, Good night!"이라고 하면서 허리 숙여 인사한다. 이 인사말은 영화 도입부에서 출근길에 마주친 이웃에게 하루치를 미리 하던 인사말이다. 친절하고 위트 있는 트루먼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 대사가 영화 말미에 반전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진짜 세상은 문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트루먼이 문 앞에서 망설이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 말을 하고는 문을 나서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나는데 자신은 이제 자기 사는 곳 즉 세트 장 밖으로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다.
어떤 시의 계단 : 헉헉 숨이 차서 오르기 힘든 노인의,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 계단 중턱 뽀얗게 구름 아득한데 / 노인들은 지팡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 남은 근력으로 계단을 힘껏 밀어 내린다 / 이승에서는 좀체 추진력이 생기지 않는다 / 가도 가도 끝없는 노령산맥이고 오를수록 / 호흡이 가쁘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바닥이 /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헉헉 /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이 두어 평 /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이하 생략) (이동호, 노인과 계단)
건강체크 계단 : 계단 10개 자기 발로 오를 수 있다면 그런대로 건강한,
간단한 설문조사로도 자신의 노쇠 정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5개 질문에 해당할 때마다 1점씩 더한다. 총합이 3~5점이면 노쇠 단계, 1~2점이면 전 노쇠, 0점이면 정상 군으로 평가한다.
(1) 지난 일주일간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셨나요? - 일주일에 3일 이상, 종종 또는 대부분 힘들었다면 1점,
(2) 보조기구나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서, 쉬지 않고 계단 10개를 오르는데 힘이 드나요? - 그렇다면 1점,
(3) 운동장 한 바퀴 즉, 400m 정도를 걸을 수 있나요? - 약간이라도 어렵다면 1점,
(4) 지난 일주일간 빠르게 걷기, 물건 나르기, 청소, 육아, 노동 등과 같은 신체활동을 한 번이라도 하셨나요? - 한 적 없다면 1점,
(5) 최근 1년간 체중이 전년 대비 4.5㎏ 이상 줄었나요? - 감소했다면 1점.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원장원 교수팀 개발)
어떤 수필의 층계 : 언젠가는 내려와야 할,
나는 경복궁에 갈 때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돌층계부터 바라보게 된다. (중략) 나이가 들어 계단과 같이 삶에도 끝이 있음을 알기에, 남보다 빨리 오르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내 삶의 계단을 얼마쯤 올라서서야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지나온 과정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어렸을 적 고향의 돌층계에서 동물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계단에 누가 먼저 오르는지 시합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날이 저물면 누가 많이 올라갔든 간에 미련 없이 내려와 그곳을 떠났다. 인생의 해가 지게 되면 나도 언젠가는 내 삶의 계단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힘이 들어도 각 층계 한 단씩을 성실히 내디디며 그 순간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보람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유경환, 돌층계)
어떤 시의 층계 : 어려선 내일을, 젊어선 오늘을, 이젠 어제를 업고 딛는,
물비늘 반짝이는 유년의 강둑에선 / 발꿈치 들어가며 몇 번이고 키를 쟀지 / 어려선 / 내일을 업고 / 무럭무럭 자랐단다 / 새벽을 문신하는 산마루에 올라앉아 / 큰 소리 질러가며 눈썹을 휘날렸지 / 젊어선 / 오늘을 업고 / 거드름을 피웠단다 / 기우뚱 흔들리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 그 많은 추억들의 빗장을 열어놨지 / 늙어선 / 어제를 업고 / 그럭저럭 사는 거다 (이우종, 삶의 층계)
‘트루먼의 계단’은 탈출의 계단이었다. 노년기의 지금 나에게 벗어던질 ‘낡은 나’가 따로 있으랴만, 지금의 존재 자체가 낡은 존재 아니랴만, 거듭나야 함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해야 함을 트루먼 계단 보고 생각해 본다.
‘어떤 시의 계단’인 지하철 계단, 직선 그 계단을 내가 걸어올 때에도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은 저 높은 곳에서 한 뼘 구멍이었다. 그래도 부산 우리 집 지하철 3호선 남산역 출구 계단을 나는 걸어서 올라온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아니, 헤아려보니 드물게 타는 지하철 열 번 중에 열 번을 그렇게 한다.
‘건강체크 계단’, 400미터 운동장 거뜬히 돌고 말고. 한 바퀴 그것도 바퀴인가, 방탄소년단(BTX) 정국이의 모교인 우리 아파트 단지 초등학교 운동장을 내려가면 열 바퀴는 걸어서 돈다. 저 다섯 항목 합산 점수가 0점이다.
‘어떤 수필의 층계’, 맞다. 내 인생의 해가 지게 되면 나도 언젠가는 내 삶의 계단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어떤 시의 층계’, 그랬었지. 어려선 내일을 업고는 주는 밥 먹고 무럭무럭 자랐었지. 젊어선 오늘을 등에 업고 거드름도 피웠고 방황도 했었고. 이제 나이가 든 지금 어제를 업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아니 나이가 한 나이 든 지금은 그럭저럭 사는 게 잘 사는 거지.
층계 또 계단, 영화의 트루먼처럼 올라가서 문을 열어야 할, 수필의 유경환처럼 내려와서 문을 닫아야 할, 시의 이우종처럼 그럭저럭 그 위에서 삶의 길을 걸어야 할 나의 계단 또 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