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8월)
역과 철구 다리
부산의 구포역을 출발한 열차가 하동역에 도착했다. 내려서니 플랫폼엔 여름 햇살이 빠르게 진을 치기 시작한다. 나란히 누운 선로도 그 곁에 늘어선 나무들도 잠든 듯 고즈넉한 역을 빨간 기차가 출발하면서 흔들어 깨운다.
8월 아침 하동역, 내려서 왼편을 보니 섬진강 철교가 '정지' 팻말 위에 걸려 있다. 철교 그것을 그 옛날 어릴 때 우리는 ‘철구 다리’라고 했다. 하동과 광양을 잇는 섬진강 철교는 강의 푸른 물길과 흰 백사장 그리고 무성한 송림과 어우러져 우리나라 어느 강 철교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이다. 기차가 철교를 느릿느릿 걸어가듯 통과하는 장면은 엽서 한 면의 그림으로 보인다.
엽서, 잠시 서서 정지 팻말 위에 걸려 있는 섬진강 철교, 저 철구 다리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엽서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기다린 인사가 엽서 한 장인지”를 묻는 그 엽서 말이다. 엽서는 단순한 종이 한 조각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잇는 다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엽서는 마음의 철교이다. 엽서는 저 철교처럼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엽서와 기차역은 둘 다 여행과 이별 그리고 만남의 상징으로 문학에서 종종 묘사된다. 둘 다 모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이다. 엽서와 철교는 감성적인 여행의 풍경을 그려내기에 아름다운 조합이다.
기차역은 누군가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이고 엽서는 그리움이나 기대를 담아 멀리 있는 이에게 전해지는 작은 소통의 매개체이다. 기차역에서 엽서를 쓰고는 출발 직전 우체통에 넣거나, 기다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또 엽서를 통해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거나 여행 중인 자신에게 추억을 남기는 일은, 이전에는 기차역에서의 일상적인 풍경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련한 아날로그적 감성이다. 하지만 난 지금 엽서를 쓸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기차에서 내렸다.
대합실로 들어왔다. 적은 분량의 책들이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꾸며놓은 구석의 작은 도서관이 정겹다. 남매인 듯 아이 둘이 엄마의 양옆에 앉아 책을 보고 연신 깔깔거린다. 다음 기차는 늦게 올 터인데 그때까지 저렇게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건지…. 탁 트인 매표소 사무실 유리창은 크고도 환하다.
대합실을 나섰다. 나설 때의 기대는 누군가 들뜬 얼굴로 날 마중을 나와 있을 것 같은 거, 그러나 마중은커녕 분수대 작은 광장은 얼씬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 없다. 그래서 대합실 밖은 또 늘 낯설다. 그래도 그런 기대는 기차 타는 즐거움 중의 하나 아니던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하나 둘 어딘가로 다 사라지고 늦게 나온 나만 악양행 버스가 기다리는 재성당 한약방 앞 터미널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나는 지금 여행을 위해 하동역에 내린 것이 아니라 악양 지리산 기슭의 우리 밭에 일하러 가기 위해 내린 것이기에 그렇다.
우편함
볼펜을 손에 들고 원고지에 편지를 썼다. 한 자 한 자 글자로 칸을 채우는 글쓰기를 한 건 아니다. 칸은 무시하고서 그냥 줄줄 이어서 썼다. 그렇게 쓴 편지가 다섯 통, 다 쓰고 나니 한밤중 그러니까 새벽 한 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꿈이 있었다. 큰 꿈도 있었고 작은 꿈도 있었다. 구체적인 꿈도 있었고 아련한 꿈도 있었다. 이루어진 꿈도 있고 미완으로 망각 속에서 머무는 꿈도 있었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니 그렇다. 석류나무와 현관을 열고 잔디 마당을 걸어 나가서 열어보게 되는 우편함을 가지는 꿈도 내가 꾸던 꿈들 중의 하나였다. 석류나무 한 그루는 작년에 심었다. 너무 어린것을 심어, 풀과 구별 못 한 청맹과니 내 눈이 식별을 못 해 풀 벨 때 베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것 봐라, 뿌리에서 순이 돋아 나무로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또 우편함, 우리 아이들 막내 이모부가 김해 건우 하우징 랜드 본사에서 멋진 우편함을 구입, 가져와서는 길뫼재 입구에 세워 주었다. 우편함을 가지고 싶다는 꿈이 은폐에서 탈은폐로 바뀐 것이다. 이는 망각에서 탈각(脫却)으로의 전환이다. 감추어져 있던 꿈, 잊혔던 꿈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사춘기 시절의 가슴 졸이던 밤 한 시가 생각났다. 그때에는 내 곁에 전화가 없어 다이얼을 돌려보지는 못했다. 엽서도 보내 보지 못했고 금성 라디오도 내 소유로 가지고 있어 본 적 없다. 요즈음이야 비록 15년도 더 된 고물이긴 하지만 텔레비전 수상기도 가지고 있고 피시도 있지만 60년대 말 그때에는 그런 걸 내 소유로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70년대 초에는 손에 쥐어지는 라디오를 가졌었던지 모르겠다. 아무튼, 라디오 다이얼 돌려 주파수 맞춰서는 ‘I want some loving'이라는 시그널 뮤직 또 사연의 편지들을 가슴 졸이며 듣던 그 한시가 생각났다. 시그널 뮤직 제목이 이것이라는 건 한참 나중에 알았다.
그 한시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편지를 썼다. 부칠는지는 모르겠다. 부쳐야 할 텐데. 우편함에 달린 빨간색 깃발 세우는 일은 집배원의 몫이라는데 섬진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전해주는 편지를 늘 받을 심산으로 아예 내가 세워 두었다. 앞으로 편지 대부분은 동매리를 발신지로 하여 보낼 참이다.
가슴속의 꿈들은 아직 그대로
길뫼재에 도착, 차를 세우고는 엔진을 끄지도 않은 채 우편함을 열었다. 그림엽서 하나, 편지 한 통. 그리고 내가 부산 집에서 길뫼재 이 주소로 편을 수신인으로 하여 보낸 우편물 하나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다. 사위가 고요하다. 지리산 줄기 뒷산도, 먼 강 섬진강도, 악양 벌 앞 평야도 침묵의 고요로 서로 경계한다. 행여 정적을 깨트리면 야단이라도 맞을 듯 조심조심 침묵 발걸음이다. 밤이 오면 한낮에 그리 설쳐대던 손발도 뒷전으로 밀려야 한다. 정신, 심혼에 역할을 물려주어야 한다.
엽서를 꺼내 앞에 놓았다. 우편함 세웠다고 종이 편지를 보냈더니 바로 보내준 그림엽서다. 그때, 나도 젊었고 그도 젊었던 그때, 그는 방황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혼미 속에 빠져있던 그때다. 그때로부터 37년이 흘렀음을 엽서 앞에서 새삼 확인한다. H의 엽서는 만남 그 이후 쌓인 세월의 켜를 새삼 확인시킨다.
나, 나이는 먹었지만 철은 덜 들었다. 가슴속에 담긴 꿈들은 아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일 하겠다고 기염 토하던 일, 내가 택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만용 부리던 일, 술잔 기울이며 웃고 울고 떠들며 시간 보냈던 일, H의 엽서는 그런 일들을 회상 속에 살려내었다. 해변가 가로등 안갯속 불빛처럼 희미한 상념이다. 별빛 같은 신념들, 그 사이에 다 잃어버린 건지 하나라도 이루기나 한 건지…. 사위는 계속 고요하다. 어쩌다 밖을 내다보면 앞 기슭 마을의 가로등만 희미할 뿐. 엽서 앞에서 상념의 끈을 놓지 못한다. 아, 가슴속에 담긴 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