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 벌레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 꿈이라기보다는 가벼운 불면이다. 손가락에 집혀 내팽개쳐서는 발아래서 으깨어진 깨 벌레 수의 무게에 내 잠이 눌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 밟아 으깰 때마다 전해져 오던 그 동적인 묵직함, 그것은 악몽을 불러옴 직한, 피하고 싶은 체험이었다. 비교적 잘된 농사의 결실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새자 다시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작전은 오전, 오후, 저녁 무렵 등 세 차례에 걸쳐 수행되었다. 해 질 무렵에 면소재지 마을의 K가 왔다. 그는 안 가실 거냐고, 안 가고 일만 하실 거냐고 채근했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중이었다. 지난해 11월의 산수유 산동마을에서의 바로 이 문화제 때도, 또 토지문학제 때도 간다고 간다고 하면서도 가지 못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지리산 문화제'는 알고 왔었다.
형제봉 위로 사라지는 노을을 보면서 몸을 씻었다. 이보다 더 시원한 물이 밭둑 내 작은 못의 콸콸 물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보는 이 없으니 빈약한 알통을 드러내고서는 마음껏 끼얹었다. 그리곤 출발했다. 섬진강 변, 평사리 공원에 도착하니 문화제 한 마당이 이어지고 있었다.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부산 집의 편에게 전화부터 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섬진강, 정작 한가로이 서지 못한 강변이고, 무심히 보지 못한 강물이다. 더러 올 때에는 지나치지만은 않고 서곤 하던 강변인데, 인연 맺어 출입하기 시작한 뒤로는 지나치기만 했다. 핑계는 늘 '일'이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알량한 그 일. ‘섬진강 이야기’ 찻집 공터에 차를 대고는 걸어서 갔다. 왼편 섬진강, 오른편 평사리 들판….
팡파르가 쾅 하니 울리기 시작한다. “지리산을 인연으로 모인 여러분, 근심 걱정 털어 버리고 한마당 축제에 함께 어우러집시다.”라는 멘트가 나온다. 나도 지리산 기슭에 등 대고 자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질감이 느껴졌다. 밥을 파는 데로 가서 밥부터 사서 먹었다. 비빔밥이다. 사 먹을 작정하고 굶고 내려왔던 터이다.
어디를 가도 한발 비켜서 서있는 사람이 늘 있다. 스님 한 분, 무대도 조명도 뒤로, 옆으로 하고는 흐르는 강물을 유심히 보면서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섬진강인 듯했다. 물론 아닐 것이다. 처음 보듯 봤을 것이다. 초발심이 생각났다. 무심한 유심일 것이다.
어둠이 강을 덮었다. 강물은 산 그림자를 삼키고 어둠은 강물을 삼켰다. 강 냄새, 강물 냄새가 코로 번진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어둠 속의 강 냄새다. 물안개도 번지는 듯했다. 물안개 냄새, 어둠 속의 강물 냄새는 생명의 비릿함과 연이어 있는 것일까. 갑자기 이틀 동안 밟아 죽인 깨 벌레들의 꿈틀거림이 발아래서 살아 오른다. 죄업!
도장 발자국
이 지상, 처음 들어보는 싱어 이름이다. 그가 속했던 노래패 ‘나팔꽃’은 들어본 적 있다. 들어 본 적은 있다. 노래가 아니라 이름만. 지리산 문화제의 평사리 공원 무대, 섬진강 강바람이 시원했다. 낮의 무더위 속 허덕임을 기억 저편으로 날려 보내는 여러 줄기 바람이었다. 문화제, 서둘러 하산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변에서의 산(山) 문화제, ‘지리산 문화제’는 지리산에 이리저리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을 강가로 불러낸 한마당 축제였다.
이루어지는 무대 내내 난 서너 걸음 비켜서서 나를 위한 문화제인 듯 시각으로 청각으로 또 체감으로 나는 잠겨 들었다. 길지 않은 지리산 생활이지만 ‘산사람(山人)’ 의식이 나의 무의식엔 제법 형성되어 있는 터였는지라 지리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것은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지리산 생명연대 모금함에도 자발적으로 손도 밀어 넣었었다.
무대가 다 끝나고 난 다음의 여운은 안치환 것보다는 이지상 것이 더 길었다. 물론 인디언수니의 무대도 좋았고. 어느 대중음악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이지상은 “그는 민중가요 부르면서 먹고살기 너무 어려운 탓에 음반 한 장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안쓰러움과 대견함이 뒤섞일 때가 잦다. 우울하게 읊조리는 그의 보컬은 고단한 삶의 피로와 쓸쓸한 마음의 생채기를 위무하는 듯 슬픔에 젖어 있었다. 승리와 확신을 말하기보다는 세월과 외로움을 고백하는 그의 노래는 자신의 지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화상과도 같다. 이지상의 음악은 언제나 기쁨보다는 슬픔 쪽으로 머리를 기대는 편이다.”
그는 ‘토막말’을 노래하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처음엔 어리둥절했었는데 알고 보니 토막말은 그가 최근에 부른 노래의 제목이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노래하기 전의 그의 말도 노래만큼 좋았다. 욕을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의 말을 서너 번 하는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서야 '토막말'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욕을 해도 되겠느냐”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노래했다. 가사가 이랬다.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 만씩 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주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시인 정양의 ‘토막말’ 일부)
시인 정양에 대해서는 나중에 그에 대한 프로필을 찾아보고 나서 어떤 시인가를 알게 되었다. 1942년생이니까 나이가 한참 많은 분이다. 섬진강 모래밭에도 도장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지 이 지상의 '토막말'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지만, 공연이 끝날을 때에 강은 이미 어둠에 묻혀 강물도 모래밭도 보이지 않았다. 흐르는 수면의 반짝이는 불빛만 보였다. 지리산문화제의 악양 평사리 공원, 8월 25일의 밤 섬진강은 대책 없이 아름답게 물로 흐르고 있었다.
무대의 노래는 생명의 노래, 평화의 노래들이었다. 내일 또 잡아야 할 벌레 일이 생각났다. 유심한 무심, 번잡이다.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섬진강 변의 지리산 문화제도 끝 지점으로 가고 있었다. 지리산 생명연대가 준 팸플릿을 끝까지 다 읽어볼 심산으로 버리지 않고 손에 쥐고 자리를 떴다.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