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에서
삼천포 노산공원을 출발하여 산청군 덕산, 6.25 이후 빨치산이나 토벌 등과 관련, 어릴 때 어른들에게서 수도 없이 들었던 지리산 깊은 산골의 대명사, 그 당시 표현인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라는 말에 대응하는 지역인 덕산 유지골(유덕골)로 향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진짜 선비’ 상징이라는 남명 조식(501~1572)의 공간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덕천강가의 산천재에 도착했다.
남명 선생이 만년에 평생 갈고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노년을 보낸 곳, 지리산 천왕봉이 멀리 보이는 산천재(山天齋) 뜰의 남명매 앞에서 피아트(Fiat) 일곱 우리는 긴 시간 동안 문화 해설사의 풀이를 들었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진지하고도 경건하게, 마치 학생 때 범생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귀를 그분의 이야기에 기울였다.
“스톱”하지 않으면 해설사의 말이 끊어질 것 같지 않아 조심스럽게 사인을 보내 겨우 멈추게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해설사가 풀어내는 얘기는 기념관 실내에서 오히려 더 길게 이어졌다.
남명(南冥) 조식 선생, “그의 이름 앞에 서면 경건해지고, 그의 올곧은 처신을 살펴보면 숙연해지며 그의 분방한 삶을 알아보면 유쾌해진다”는 조식(曺植) 남명 선생, “세속의 명리와 출세의 욕망을 헌신짝으로 여겼으며, 도학자로서 부패한 정치를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선비의 책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출사 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유능한 제자들을 키운” 영원한 처사(處士) 조식 선생에 대해서, 산천재와 남명기념관과 그의 무덤, 무덤의 비문을 살피면서 우리는 이 공간의 의미에 대해 살필 수 있는 데까지 살폈다.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銘)이 새겨진 주머니칼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서 “경 즉 안으로는 마음을 밝히고, 의 즉 밖으로는 의를 결단”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그의 선비정신과 실천적 자세는 지리산을 열두 번이나 유람한 그의 풍류적인 분방함과 처신으로 인해 남명을 더욱 남명답게 했다고 한다.
"공명 보기를 하늘 가운데 한 점의 조각구름처럼" 여겼다는 그, 오래전에 내가 악양 산기슭 지금의 처소와 인연을 맺었을 때 찾아온 지인 정신의학자 독두 선생이. “이왕 지리산 기슭에 머무는 거 방울과 단도(短刀)를 곁에 두고 남명 선생 흉내 내며 한 번 살아 보소”라고 했는데, 그래서 칼은 부엌칼이 이왕 집에 있는 거고 해서 안 사고 방울은 성철 스님의 절인 겁외사에서 작은 요롱 하나를 대신 사서 서재 책상 손 닿는 곳에 놓았는데, 부엌칼 한번 잡은 일 없고 요롱 서너 번 흔들어 보고는 손 놓고 말았으니 흉내는커녕 흉내 그림자 근방에도 이르러 보지 못한 장삼이사 필부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흉내 그거 아무나 내는 게 아니라는, 뱁새는 뱁새라고 하는 평범한 진리 하나는 비범하게 체득하는 소득이 있었다.
산천재를 떠나서 우리는 산청읍 지리산 웅석봉 기슭에서 곰처럼 웅크리고 있는 인생 선배 전직 교장 내외 분을 만나러 갔다. 얼굴이 검어서 흑곰이지만 성씨가 백 씨라서 백곰으로 불리는 그분, 웅석봉 폭포 바위 아래에서 마늘과 쑥은 얼마나 자셨는지, 진짜 곰이 다 되어가는지를 만나면 반가운 인사 나눈 후 유심히 살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