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보고서 무당 집인 줄
작도정사, 이름만 보고서는 처음에 무당 집인 줄 알았다. 난 ‘작도’를 작두라고 여겼고 ‘정사’는 굿하는 집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순천 방향 남해고속도로 곤양 IC에서 빠져나와 서포면 소재지로 가는 길 도중의 오른편에 있는 작도정사는 이정표만 눈에 띌 뿐 건물은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작도정사 앞 길, 이 길을 나는 1970년대 말부터 드나들기 시작했으면서도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알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다가 불과 몇 해 전에 갑자기 관심이 생겨 그 앞에 차를 세우고는 들어가 봤다. 그런데 비문을 읽어보니 이것 봐라, 무당 굿하는 집이 아니라 퇴계 이황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유적지 아닌가. 작도(鵲島)도 작두가 아니라 섬, ‘까치섬’이라는 뜻이었고 정사(精舍)도 무당집이 아니라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며칠 전, 경남 산청의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인 산천재에 들른 김에, 선생의 지리산 탐방기인 유두류록(遊頭流錄)을 구해 읽고서, 거기에 나오는 사천과 하동의 지명을 답사하는 중에 퇴계 유적지인 작도정사 여기에도 차를 세우고서 다시 들어가 보게 되었다.
경남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 105-1 번지의 작도정사에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퇴계이선생장구소(退溪李先生杖屨所)’란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나란히 두 개 있었다. ‘장구소’란 “지팡이와 짚신을 끌고 와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 있는 사람이 자취를 남기고 거닐던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인 조선시대 중종 때(1533년), 곤양군의 사또인 64세의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당시 소과에 입격(入格)한 뒤 출사도 하지 않은 32살의 퇴계 이황을, 시간이 되면 곤양 인근의 쌍계사를 둘러보며 “술이나 한 잔 하자”라고 초청했다고 한다.
정 3품 대사간까지 지낸 관포가 퇴계의 재목을 일찍이 알아보고서 초청하자 30살이나 아래인 퇴계는 1년 후에 안동에서 곤양까지 한 달가량 걸리는 길임에도 기꺼이 응하여 상주, 성주, 합천 등지를 경유해 처가인 의령에 들렀다가 함안, 창원, 마산, 진주를 거쳐 곤양에 도착했다고 한다.
관포와 퇴계는 사천만을 바라보는 작은 섬 여기 작도에 들어가 술상을 마주하고 아침저녁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고 한다. 당시 퇴계는 사천만 갯벌에 물이 들었다가 완전히 빠지는 장관을 본 후 그 신기한 경험을 시로도 남겼다고 하고. 퇴계는 어머니가 찾으신다는 부름을 듣고 쌍계사는 구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 작도정사는 1928년 당시 유림들이 이황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거라고 한다. 찾는 이 없어 그런지 대문은 잠겨져 있고 잡초만 무성히 시들고 있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오면서 비석 뒤에 새겨져 있는 빽빽한 한글, 퇴계 선생이 그때 까치섬 이곳에서 당시 곤양 군수인 관포 어득강과 더불어 조석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회를 먹고 술잔을 기울였다는 내용을, 문맥이 맞느니 틀리느니 시비(是非) 삼아 끝까지 다 읽고서 차의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