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한과 정여창 - 남명의 '유두류록'을 읽고서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岳陽亭)에 왔다. 악양정은 옛날 정여창 선생이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 때문이다. 남명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의 거두로, 의(義)를 철저히 중시하고 현실정치를 강하게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대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비견되는 명성을 떨쳤으며, 현대에도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퇴계나 율곡에게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
'유두류록'(遊頭流錄)은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1558년 음력 4월 10일부터 25일까지 사천-하동-섬진강-쌍계사-불일사-신응사 등 화개동천의 여러 곳을 유람하며 남긴 기록이다. 이 가운데 남명 일행이 경남 사천군 축동면 구호리의 쾌재정 아래 포구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려 올라와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삽압 마을에서 내려 악양정에 도달하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을 발췌해 본다.
이 기록에서 남명이 기리는 두 인물은 고려시대의 한유한과 조선 전기의 정여창이다. 남명은 둘러 보고서 충신인 이들이 겪은 시대적 불운을 한탄한다.
<한유한>
[4월 16일, 새벽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 거의 섬진에 다다르는데 잠을 깨고 보니 벌써 하동 땅을 지났다고 한다. 이때 막 아침 해가 떠오르는데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하고 양쪽 언덕의 푸른 산그림자가 출렁이는 물결에 거꾸로 비친다. 퉁소와 북을 다시 연주하여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나고 서북쪽 십 리쯤 지점 멀리 구름 낀 봉우리가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이를 가리키며 서로 뛸 듯이 기뻐하여 “방장산(方丈山)이 삼한(三韓) 밖이라 하더니 벌써 가까운 곳에 있구나.”하고 반가워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악양(岳陽) 고을을 지나고 삽암(揷巖)이라는 강변 마을(지금의 평사리 동정호 옆 외둔마을)을 만난다. 녹사(錄事) 벼슬을 하던 한유한(韓惟漢)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미리 알고 밤을 타서 처자식을 데리고 이곳으로 도망한 것이다.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綠事)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것이다.]
[아! 망하려는 국가가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착한 사람을 표창만 하는 것으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 나라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는 일(허명을 좋아하면서 실상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비유. 섭자고는 용을 좋아해 집안 곳곳에 용의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하늘의 진짜 용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내려와 집안에 얼굴을 들이밀자 섭자공이 놀라서 도망쳤다고 하는 이야기)이니, 어지러워 망하려는 나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문득 술을 가져오라 하여 가득 부어놓고 거듭 한유한(韓惟漢)을 생각하여 길이 탄식한다.]
‘삽암(揷巖)’은 ‘꽂힌 바위’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악양과 화개의 경계 부근으로, 옛날에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녔으며 고려 말엽 옛날 전설적 인물 한유한(韓惟漢)이 낚시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옛날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바위 위에 섶나무를 잔뜩 쌓아 놓았다가 불을 질러 연기를 내어 이를 신호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유한(韓惟漢)은 고려 인종 때 벼슬을 하다가 이자겸(李資謙) 혹은 최충헌의 횡포 때문에 처자를 데리고 이곳 악양으로 숨어 들어와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선비인데 지금도 악양 섬진강에는 그를 기리는 모한대(慕韓臺)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고 또 1931년에는 한유한의 뜻을 계승하고자 악양면 소재지의 악양천변에 모한정(慕韓亭)을 지었는데 나중에 정자 이름을 취간정으로 바꿈으로써 숲 이름이 취간림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 취간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볼 예정이다.
<정여창>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화개 덕은리(德隱里)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남아있다. 함양 출신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의 줄기를 이은 분이다. 오직 학문만 하려고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을 지내고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삽암(揷岩)에서 바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복과 불행이 이러하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악양정에 와서 대문 앞에 서니 아래의 설명 글이 쓰인 안내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전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하동 악양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일두 정여창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정여창은 본래 경남 함양 출신인데, 젊은 시절에 지리산에서 공부한 인연으로 하동의 산수를 사랑하게 되어 섬진강 부근에 대나무와 매화를 심고 살았다. 정여창은 영남 사림파의 우두머리인 함양군수 김종직의 제자로 학식이 높고 행실이 단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호를 일두(一蠹)라고 하여 자신을 한 마리의 좀 벌레에 비유할 정도로 스스로를 낮추었다. 여러 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지만 사양하다가 조선 성종 21년(1490)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섰다.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의 공부를 도와주는 일을 맡았으나 연산군은 바른말을 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여창은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숨진 뒤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까지 당했으나 중종 때 신원이 회복되어 우의정의 벼슬이 내려졌다고 한다. 지금의 악양정은 정여창이 유배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1901년에 다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