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 유람을 위해 배를 탄 곳이 이곳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장암 나루터이다.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면 남명은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의 구암 선생 집에서 하루를 묵은 후 여기로 왔다. 남명과 구암 일행은 도착하여 여기 구호 언덕배기의 정자 쾌재정에서 음풍농월하며 풍광을 즐긴 후 섬진강 하구로 가는 배를 타고는 이틀 동안 곤양 바다를 지나고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악양을 거쳐 화개에 이르러 배에서 내린 뒤 지리산 자락 하동 쌍계사로 들어갔다.
“15일 또 강이와 함께 장암(場巖)으로 향하였다.(참고로 장암은 사천만의 가장 안쪽으로 사천강과 길호강이 합쳐지는 곳) 강이의 서제(庶弟)인 백(栢)도 따라왔다. 먼저 옛날 고려조 장군이었던 이순(李珣)의 쾌재정에 올랐다.”
쾌재정은 이순(李珣) 장군이 사수현(지금의 사천)에 출몰한 왜적을 물리치고 나서 쾌재를 부른 후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가진 정자다. 그런데 이곳에 퇴계 선생도 다녀갔다고 한다. 쾌재정이라는 이름을 구암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퇴계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원래 쾌재정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고 한다.
남명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유두류록’에 이끌려 기억을 더듬으며 어렵사리 이곳을 찾아왔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없어진 쾌재정 자리 유허(遺墟)에 1909년 한 독지가를 중심으로 유지들이 뜻을 모아 이순 장군을 기리는 집(쾌재정)을 다시 지었는데, 그게 일제 강점기 때 구호간이학교를 거쳐 구호국민학교로 사용되던 중 1960년대 사라호 태풍으로 허물어졌기에 학교를 새로 지어 옮긴 후 지금의 이 집은 ‘쾌재정’ 현판을 달고서 노인정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기억을 더듬으며 어렵사리 이곳을 찾아왔다”라고 위에서 말한 이유는 쾌재정 터의 상징인 500년 된 포구 나무 위치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내가 다닌 축동초등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구호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때 그 학교에 몇 번 간 일이 있는데 정문에 있던 아름드리 포구 나무가 내 기억에 남은 그 학교 이미지의 거의 전부였다. 나중에 내가 성년이 된 이후에도 폐교된 그 학교 앞을 여러 번 지나쳤는데 운동장과 포구 나무는 그대로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을 가지고, 쾌재정 터인 동시에 구해창(장암창)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3개가 서 있는 500년 수령의 포구 나무 곁에 다가서니, 그곳이 나의 기억 즉 ‘학교 정문 터’하고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게 아닌가. 그건 확 바뀐 동네 지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쾌재정 터에 바짝 붙어 만들어진 바로 아래의 남해고속도로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500년 동안 지키며 서 있는 포구 나무가 자리 이동했을 리 없는데도 난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가 아닌데”를 반복하며 갸우뚱하다가, 기억(과거)과 바뀐 지형(현재)의 편차를 인정하고서야 가시덤불 또 ‘도둑놈’이라 부르는 도깨비 풀숲을 헤치고 겨우 포구 나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들어서니 폐허라도 이런 폐허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쾌재정 터는 폐허의 극치였다.
그런데 돌아와서 글을 정리하는 중에 알게 된 것은 쾌재정을 세우고 이름 붙인 이순(李珣)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견해는, 쾌재정 터에 세워져 있는 2개의 비석에서 말하는바 고려 말 공민왕 때 이성계, 최영 등과 같은 반열의 무장인 이순이 이곳 사수현에 출몰한 왜적을 물리치고 쾌재를 부른 후 세우고 이름 붙였다는 견해다. 이건 지금까지 받아들여진 견해다. 그런데 최근에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새롭게 제기된 두 번째 견해는 조선 중종 때 훈련도정(訓鍊都正)을 지낸 절충장군(折衝將軍)인 이순이 노년에 지금의 축동면 구호마을에 와서 세우고 머물렀던 정자라는 설이다.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특히 남명의 유두류록 이 부분 언급의 원문인 ‘先登古將軍李珣之快哉亭’(선등고장군이순지쾌재정)를 잘못 해석한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한다. 이를 말 그대로 즉 “먼저 옛 이순 장군의 쾌재정에 올랐다”로 번역해야 함에도 “먼저 그 옛날 고려 이순 장군의 쾌재정에 올랐다”라고 하여, 원문에 없는 ‘고려’라는 말을 넣어 번역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이순 장군을 고려 시대의 이순 장군으로 바꿔치기하는 오류가 생겼다는 것이다. 또 고려사 공민왕 편에는 "이순을 양광도 도순문사로 삼아 장암으로 나가 지키게 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이순'이라는 이름은 동일하지만 '장암'은 여기 구호리의 장암이 아니라 고려 시대의 양광도 즉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지금도 충남 서천군에는 장암진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역사적 지식은 깊지 않다. 사실 쾌재정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순 장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얼마 전에 경남 산청의 남명 조식 신천재 답사 이후 구해 읽은 유두류록 이후의 학습에서 겨우 익힌 장군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쾌재정을 지은 주인공이 고려 시대 이순 장군인지 동명이인인 조선시대 장군인지 어느 한쪽을 강력히 지지할 역사적 지식이 내겐 있지 않다.
다만 이 기회에 이순신 장군 외에도 이름이 비슷한 이순 장군이 이 지역을 지켰다는 거, 유학의 세 거두인 남명, 퇴계, 구암의 발걸음이 이곳에 닿았다는 거, 바로 저기 앞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옛날 바다이던 때에는 있었던 강지섬 자리를 상상하면서 아버지와 그 섬에서 함께 한 추억을 아름답게 회상했다는 거 등은 쾌재정 폐허 답사에서 얻은 소득이라 하겠다.
남명이 구암과 더불어 풍광을 즐기고 또 퇴계도 다녀갔다는 쾌재정 터를 지키고 있는 500년 포구 나무와, 남명과 구암 일행이 하동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탄 장암 포구였지만 비행장 활주로 확장 공사 때문에 뭍으로 변한 후 그 자리에 들어선 두원중공업이라는 대형 공장 건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래, 쾌재정, 그래 포구 터, 그 앞 강주섬!”을 두어 번 되뇌고는 차 세워둔 곳으로 한참 걸어갔다. 지금은 없는 저기 강주 섬에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유소년 시절의 추억은 다음에 회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