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220
차나무 윤곽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새벽 네댓 시 눈을 떴을 때, 잠시 앉거나 서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테라스를 설치한 뒤 달라진 내 모습이다. 우선 가벼운 맨손체조를 한다. 제자리에서 2,000번 뛰고, 숨쉬기 운동으로 워밍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바라본다.
밤, 마을과 산과 들은 어둠에 잠겨 있다. 도시의 밤은 낮처럼 소란스럽지만, 이곳은 낮에도 고요하고 밤이면 아예 고요 그 자체가 된다. 처음엔 가로등만이 형체로 눈에 들어오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마을 윤곽이 서서히 잡힌다. 여전히 어렴풋하지만,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새벽, 아직은 어둠이다. 달이 있을 땐 별빛이 옅어지고, 대신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게 드러난다. 달이 없을 땐 별빛이 찬란하고, 어둠은 더욱 깊고 두텁다. 그래서 ‘선명한 어둠’, ‘찬란한 어둠’이라 할 만하다.
앉아 있거나 서서 여명의 기운과 함께하다 보면, 내가 새벽을 깨우지는 못하더라도 새벽과 함께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윤곽이 그려지다가 뚜렷한 형체로 자리 잡는다. 저 산, 저 들판, 저 마을, 저 나무, 저 냇가.
곧 이곳에 발을 들인 지 3년이 된다. 길고도 짧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처음엔 막연했지만, 이제는 일머리도, 밭의 모양도, 심은 나무들도 제법 윤곽을 갖췄다. 무엇보다 차나무가 자라면서 주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 손으로 심은 나무들이니 더욱 그렇다.
처음엔 밭 전체에 차나무 씨앗이 심겨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언덕을 ‘차나무 언덕’이라 불렀다. 하지만 다음 해 가을이 되어도 새순이 돋지 않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중국산 공업용 씨앗을 농협에서 공급했던 것이었다. 결국 ‘차나무가 서 있지 않은 차나무 언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심은 지 2년, 차나무 두 줄이 제법 자리를 잡았다. 언덕 또한 윤곽을 드러냈다. 이제는 진정한 ‘차나무 언덕’의 모습으로.
300번 포옹
열흘 전, 녹차 퇴비가 도착했다. 원래는 50포대를 부탁했지만, 그 정도로는 대형 운반 트럭이 올라오지 않겠다 하여 100포대로 늘렸다. 농협 차량은 대형 트럭이었고, 결국 150포대를 내려놓고 갔다. 예상보다 많아졌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매실나무 같은 과수에도, 채소 밑거름으로도 넉넉히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밭 아래 공터에 쌓아둔 퇴비를 위쪽 밭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했을 뿐이다.
이번에는 막내까지 더해 셋이 내려왔다. 도착한 시각은 열한 시 무렵, 바람이 매섭게 불고 눈발이 흩날렸다. 형제봉과 청학이골은 눈구름에 덮여 있었고, 아래 들판에는 눈송이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눈발을 맞으며 퇴비 포대가 부러져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은 겨울답게 서늘했다. 막내가 거들겠다고 했으니 내 일손이 조금 수월해지겠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점심 전에 100포대를 옮겨놓을 작정이었다. 내려오는 길 내내 “거들겠다”라던 막내는 막상 퇴비 더미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욕심만큼 힘이 따라주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신 옆에서 웃음을 보탠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보니 처음에는 7포대가 들어갔다. 나는 그것이 한계라 여겼지만, 편은 “10개는 들어갈 것”이라 했다. 두 번째 실어보니 정말 10개가 들어갔다. 역시 내 눈대중은 자주 빗나간다. 세 번째부터는 11개까지 실을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깨달음, 작은 일에도 서로의 시선이 다르고, 또 그 다름이 함께 일할 때 힘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포대를 실을 때 한 번, 내릴 때 한 번, 가슴에 안아 옮기니 도합 300번의 포옹이었다. 포옹이란 말이 붙으니 묘하게 따뜻했다. 비록 땀과 흙먼지에 절은 무거운 퇴비자루지만, 나무와 밭을 살찌울 자양분이라 생각하니 품에 안길 때마다 새로운 기운이 차오르는 듯했다.
노동은 고단했다. 허리가 뻐근하고 팔이 저렸지만, 그 피로 속에서 묘한 성취감이 피어났다. 겨울바람에 시달리며 옮긴 퇴비는 내년 봄과 여름, 나무와 채소의 푸른 잎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땀과 수고가 잎새와 열매로 되살아나는 것이 농사의 참된 기쁨이 아닐까.
저녁 무렵, 포대를 모두 옮겨놓고 난 뒤, 바람이 잠시 잦아들었다. 눈송이가 흩날리던 들판은 고요해지고, 차가운 공기 속에 작은 달빛이 드리워졌다. 하루 동안 300번의 포옹을 견뎌낸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포근했다. 땀과 바람과 흙이 빚어낸 고단함 속에서, 겨울 산기슭의 밤은 오히려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