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청선

081220 '율리시즈의 시선'을 보고서

by 로댄힐

출발할 때는 구름이었고, 함안을 지날 때는 빗방울이더니, 진주를 지날 때는 아예 비가 되었다. 도착해 걸어 올라가는 길목, 성벽처럼 버티고 선 논두렁 아래의 매화나무는 벌써 꽃망울을 맺고 있었다. 빗물을 머금은 꽃망울은 더욱 촉촉하고 단단했다. 길뫼재 언덕은 온통 안개였고, 비였다.


베어 눕혀 놓았던 마른풀들이 비에 젖으니 갈퀴로 긁어모으기가 한결 수월하다. 비가 잠시 멎은 틈을 타, 밤나무의 마른 잎들과 함께 긁어 퇴비 더미 위에 얹었다. 꿰매고 깁스한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을 이어갔다. 바위밭으로 내려가서는 마른풀을 갈퀴로 긁어내고, 흙 표면은 괭이로 긁었다. 그런데 돌이 많다. 염소 아저씨가 내려오시더니 “이 밭은 원래부터 돌이 많았어요. 예전 주인도 돌을 굳이 골라내지 않고 그냥 곡식을 가꾸더라”라고 하신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래전부터 그리해 온 사정을 알 길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연세로는 할아버지뻘이지만, 풍기는 인상이 어쩐지 아저씨 같아 늘 그렇게 부른다.


밤이 되었다. 빗줄기는 멎었지만,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다만 지척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안개는 아니었다. 노트북 시디룸에 앙겔로폴로스의 ‘율리시스의 시선’을 삽입했다. ‘안갯속의 풍경’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는 그의 영화다. 제목처럼 이 또한 안개를 머금은 영화였다. 화면 가득한 흐릿한 풍경이 창밖의 길뫼재 안개와 묘하게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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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은근한 생명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느낀다. 낮에는 분주히 움직이며 땀을 흘렸지만, 저녁엔 이렇게 가만히 앉아 흐릿한 윤곽 속에서 하루를 정리하게 된다. 봄을 기다리는 매화나무의 꽃망울처럼, 나 또한 조금씩 내 마음의 윤곽을 다듬어 가는 셈이다.


안개는 언제 걷힐까. 하지만 굳이 걷히지 않아도 좋다. 안갯속의 풍경 또한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밤, 길뫼재는 ‘안개’와 ‘영화’와 ‘내 생각’으로 가득하다. 내일 아침에는 또 어떤 빛이 언덕을 물들일지, 은근히 기다려진다.


율리시스에 대해서 생각했다.


첫째는 호머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 곧 율리시스다. 이 작품은 기원전 약 700년경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가 쓴 장편 서사시로,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귀국길에 오른 그리스 장수들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지혜로 이름난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로마식으로는 율리시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이타카섬으로 돌아온다. 이후 “고향으로의 귀환, 본질로의 회귀”라는 이 서사적 자아로서의 율리시스는 다양한 예술 속에 되살아났다.


둘째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다. 고향 더블린을 등지고 유럽을 떠돌며 일생을 창작에 바친 조이스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며 출간되기까지 무려 16년의 세월이 걸렸다. 조이스는 “나는 이 소설 속 보이는 그림 뒤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그림을 숨겨 두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 그림을 찾아내느라 고심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의 뼈대는 『오디세이』에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영웅 율리시스가 아니라 평범한 광고 외무사원 블룸이다. 인간의 내면, 삶과 죽음, 시간에 대한 탐구를 소설이라는 매개체로 풀어낸 이 작품은 문자 그대로 인간 의식의 총체를 이뤘다. 단 하루, 열여덟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조이스는 16년을 바쳤고, 그 속엔 무의식의 근원에 관한 깊은 사유가 담겼다. 특히 ‘물에 대한 기억’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간은 탄생과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체험자로서, 육체 안에서 물을 기억한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은 온종일 시원의 장소, 바닷가를 서성인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불안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앙겔로폴로스의 영화 ‘율리시스의 시선’ 속 율리시스다. 그리스 출신 감독 A가 3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발칸반도 최초의 영화라 전해지는 마나키아 형제의 현상되지 않은 세 통의 필름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그는 공간적 여정을 넘어,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시간적 여행을 함께 한다. 영화 속 장면, 사이렌의 섬을 지나며 레닌의 동상을 실은 배가 떠가는 모습은 신화적이면서도 시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91년 소비에트 붕괴 이후 민족주의가 들끓고 내전이 이어지던 94년의 발칸반도, 그 혼란의 역사 속에서 주인공이 찾는 영화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의 해에 찍힌 작품일 것이다.


시선에 대해서 생각했다.


첫째는 앙겔로폴로스의 ‘율리시스의 시선’ 속 시선이다. 여기서 시선이란, 먼저 마나키아 형제가 남겼던 최초의 필름의 시선이며, 동시에 그 필름을 찾아 나선 주인공 A의 시선이기도 하다. 영화감독인 주인공 A에게 잃어버린 필름을 찾는다는 일은 단순한 수색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에 대한 순수를 되찾는 과정, 곧 본질을 묻는 행위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의무일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서 있는 인물들의 시선도 있고, 결국 그것을 담아내는 앙겔로폴로스 자신의 시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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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 속 시선이다.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 현대의 율리시스로 등장한 블룸은 더블린에서 광고 외무사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잠든 아내를 두고 홀로 짐승과 새의 내장을 요리해 아침을 먹으며 분주히 식탁을 오간다. 그 순간, 그의 시선 안으로 불쑥 한 마리 고양이가 뛰어든다. 바로 그때 소설의 작자 조이스도 시선을 들어 주인공 블룸을 바라본다. 블룸의 푸른 눈에 비친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뛰노는 장면, 그 속에서 조이스는 스스로를 관찰자이자 관찰당하는 자로 드러낸다. 그는 블룸의 의식을 추적하며 무질서하게 흩어진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블룸의 내면에 담긴 삶과 죽음, 그에 대한 관념들을 집요하게 탐색하는 것이다.




조이스의 시선이 자아의 내면을 향한 시선이라면 앙겔로폴로스의 시선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세기 초의 시선(마나키아 형제의 시선)과 세기말의 시선(주인공 A의 시선, 앙겔로폴로스의 시선)이 만나는 장소는 비극의 땅 사라예보였다. 세 시간 남짓 지루하게 이어지던 영화는 그곳에서 끝을 맺는다. 사람들의 경험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실재했던 일들,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들. 세기 초에 찍혀 미처 현상되지 못한 세 통의 필름으로 상징되는 역사의 실체를 좇던 영화는 마침내 주인공 A가 찾아낸 필름 앞에서 읊조리는 대사로 끝난다. 그것은 호머의 『오디세이아』에서 율리시스가 아내 페넬로페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 대사는 곧 자신의 기나긴 여정이 이제 막을 내렸음을 뜻한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 다른 이의 옷을 입고 / 다른 이의 이름을 쓰므로 / 내가 오는 걸 누구도 모르리. / 당신은 나를 보고 안 믿겠지만 / 징표를 보여 주겠소. / 그러면 나를 믿을 거요. / 당신 정원에 있는 레몬 나무와 / 달빛 비치는 창문을 말해 주겠소. / 육체의 증거와 / 사랑의 증거도 / 서로 포옹을 한 채 / 몸을 떨며 옛 방으로 갈 때 / 사랑을 속삭이며 /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 밤이 새도록 / 며칠 밤이 걸리더라도 / 서로 포옹을 한 채로 / 사랑의 속삭임 속에서 / 한 인간의 모험과 / 끝없는 얘기를 해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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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의 『오디세이』는 가물가물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여전히 난해하다. 앙겔로폴로스의 &율리시스의 시선&은 어렵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대학 시절, 교양 영어 교수는 제임스 조이스만 읽자고 했다. 그 덕분에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읽었고, 『율리시스』는 수업에서 설명을 들은 뒤에야 손에 들었다. 읽었어도 남아 남은 것은 많지 않다. 앙겔로폴로스는 큰아이 덕분에 그의 영화를 접했고, 책이든 영화든 자료의 도움을 빌려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의 자막이 올라갈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오늘은 범이가 몇 번 짖었고, 큰 북소리를 내는 호비는 이상하게도 잠잠했다. 두 녀석이 함께 짖을 때는 무언가 움직임이 있다는 뜻이고, 한 녀석만 짖을 때는 대개 별일이 아니다. 동시에 짖으면 앞집 차가 들어올 때가 많다. 잠시 밖으로 나가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나갔더라면 안갯속 뒷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귀로 확인했을 것이다. 밤에 서 있으면 시선(視線)은 눈의 일만이 아니라 귀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낀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청선(聽線), 내가 방금 억지로 지어낸 말이다.


생각해 보니 농촌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의 하루는 언제나 시선과 청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낮에는 눈으로 논과 밭의 윤곽을 살피고, 저 멀리 산등성이와 마을을 바라본다. 씨앗이 움트고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은 오직 시선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리면 청선의 시간이 시작된다. 빗방울이 지붕 위를 두드리는 소리, 새벽닭의 첫울음, 밤벌레의 합창, 멀리 개 짖는 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나를 둘러싼 풍경이 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귀가 붙잡아 놓는다.


시선과 청선, 두 개의 선이 교차하며 하루가 완성된다. 눈으로 본 것을 귀가 채워주고, 귀로 들은 것을 눈이 확인해 준다. 그렇게 해서 오늘도 내 삶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언젠가 내 안에도 언어로 현상되지 않은 필름 같은 기억들이 있겠지. 그 기억들은 시선과 청선이 함께 만들어낸, 나만의 오디세이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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