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201
납딱 보리, 납딱 배추…. ‘납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물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 준다. 그렇다면 ‘납딱(납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납딱 코도 있고, 납딱 고추도 있다. 납딱 만두라는 것도 있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이번에 주문한 복숭아나무에서 열릴 복숭아 역시 납딱 복숭아다. 사진으로 보니 일반적인 둥근 타원형이 아니라 압축기로 눌러놓은 듯 납작한 모양새였다. 신품종의 독특함에 호기심이 발동해 주문했다.
납딱 보리의 전성기가 언제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래도 1960~70년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납딱 보리는 눌려 있어도 알차고 통통했으며, 빛깔은 희끄무레했다. 아주 흰색은 아니지만 회색보다는 한결 밝아 보였다. 그래서 납딱 보리로 지은 밥은 쌀이 적게 들어가도 마치 쌀밥처럼 보였다. 물론 진짜 쌀밥일 수는 없지만, 보리밥 특유의 까칠한 거슬림이 덜해 훨씬 부드러웠다. 납딱 보리는 그대로 먹어도, 삶아도, 밥을 지어도 풍성하고 푸근한 인상이 있었다. 끝난 줄만 알았던 납딱 보리가 지금도 생산·판매되고 있음에 놀라웠다. 조만간 지인에게 납딱 보리밥 서너 끼쯤 부탁해 봐야겠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가는 길, 서두르는 발걸음을 붙잡아 주는 건 동작이 느린 디지털카메라다. 셔터를 누르고도 한참 뒤에야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구형 카메라다. 동매리 마을 어귀, 박○○ 시인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깥쪽 언덕길을 택하면 보이는 게 더 많다.
보리밭에 들어가 몇 걸음 밟다 옆을 보니, 탱자나무 그늘에서 배추가 누워 있다. 아니, 앉아 있는 걸까. 수확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남겨둔 것인지 알 수 없다. 납딱하게 누운 듯 앉은 봄동이 하늘 향해 둥근 자태를 펼치고 있었다. 둥글면서도 납딱한 그 모습이 시선을 한층 부드럽게 만든다. 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니, 납딱 배추가 바로 ‘봄동’이라 한다. 둥근 봄동의 품속에서 봄은 진초록 화장을 하고 있었다. 연초록 봄이 진초록의 품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물뿌리개로 앞뒤와 옆의 모든 차나무에 물을 주었다. 겨울을 견디느라 시들었던 잎들이, 비를 맞지 못해 힘이 빠졌던 찻잎들이 물을 머금으며 다시 생기를 찾는다. 틈틈이 돌도 옮기며 그렇게 오후를 보냈다. 하지만 가득 찬 물뿌리개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고,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자는 내내 양팔과 가슴 안쪽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평소 잘 쓰지 않던 근육을 한껏 쓴 탓일 것이다.
잠에서 깨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오늘의 우선순위는 나무에 물을 주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제 물뿌리개로 댄 물은 사실 ‘물’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양이었지만, 그래도 찻잎들은 금세 생기를 드러냈다. 그래서 오늘은 돌 치우기를 뒤로 미루고 괭이를 들어 차나무 옆에 고랑을 팠다. 고무호스로 물을 대자, 흠뻑 적시지는 못했어도 골마다 충분히 스며들었다.
그런데 돌들을 어떻게 할까. 이 생각은 지난해 가을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 이곳저곳에 쌓이고 널브러진 돌들은 버리기도 아깝고, 귀한 자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보기에도 거슬리고 예취기 작업에도 방해가 된다. 장소를 정해 치우자니 양과 크기가 만만치 않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을 내려놓으니 일이 쉽게 풀렸다. 차나무 고랑에 물을 대는 사이사이에 돌을 옮겼다.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갔다. 테라스 앞 돌들을 치우고는 경계석처럼 줄을 맞추어 놓으니 보기 좋았다. 작은 돌들은 선의 끝, 차가 돌 때 앞바퀴가 닿는 자리에 깔았다.
중간 크기의 돌들은 도랑가 돌담에 보탰다. 머위, 탱자나무, 엄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오동나무와 고욤나무도 이 둑에서 자라고 있었다. 맨 끝 지점에는 자작나무와 어린 탱자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허전해 늘 채우고 세울 궁리를 하는 자리다. 돌배나무와 자작나무가 자라면 높은 울타리, 탱자나무가 크면 낮은 울타리가 될 것이다. 돌이 쌓이면 자연스레 돌담이 될 것이다.
돌과 씨름하다 고개를 드니 형제봉 너머로 해가 걸려 있다. 연장을 치우고 범이와 호비의 양식통에 열흘 치 먹이를 채워 넣을 시간이다. 돌을 만지며 보낸 하루가 뻐근하지만, 엄두조차 못 내던 돌들을 앞으로, 옆으로, 뒤로 차근차근 치워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새 돌들이 나오겠지만, 오늘은 마치 다 치운 듯 뿌듯하다.
납딱 보리 즉 압맥과, 밑동이 낮고 잎들이 땅에 납작 붙은 듯한 모습인 납딱 배추 즉 봄동이 주는 시각적 청각적 정감을 느낀다. ‘거반도’라는 이름의 납딱 복숭아는 모양이 특이하고 ‘납딱’이라 시각적으로도 흥미로워서 주문했다. 수확 후 바로 먹기에는 단단하거나 맛이 덜할 수 있어서 후숙이 필요하다고 노지 재배인 경우, 초록빛이 많고 익는 정도가 고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니 까다로운 품종인가 보다. 그래도 ‘납딱한 것의 정감’에 끌려 한그루 심어볼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