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11
국제원예 종묘에서 주문한 꽃댕강 묘목이 왔다. 지난번에 주문한 채진목(juneberry) 중 한 그루가 부실했기로 연락했더니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튼튼한 묘목을 대신 보내주겠다고 했다. 석류 `스위트하니` 1본, 채진목(juneberry) 3본, 석류 `슈퍼신류` 1본, 복숭아 `거반도` 2본, 사과 `홍로` 3본을 심었다.
채진목
나랑 이름이 같은 나무가 있다는 것을 지난해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내 이름 나무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옛날 전화번호부에서 나랑 같은 성 이름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의 검색엔진에서는 나 말고 단 두 명만 보았다. 한 사람은 이름 발견 당시 초등학교 여학생이었고 다른 사람은 노인이었다. 아무튼, 채진목이라는 나무가 제주도에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내 이름의 나무가 있다는 것이 기뻤다. 사서 심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판로를 소개한 글을 도대체 만날 수 없었다. 묘목상에 가서 물어보아도 그런 이름의 나무, 처음 듣는다는 것이었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 피시를 켜고 채진목을 여러 번 검색했다. 그러다가 ‘준 베리’를 채진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월에 열매를 맺는 베리여서 준 베리라고 했다. 준 베리를 입력하여 검색하니 판매하는 종묘사가 뜬다. 이렇게 해서 세 그루를 주문하여 심었다. 내 머무는 언덕을 그것으로 표상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이제 내 언덕은 ‘채진목 언덕’이다. 복숭아 ‘거반도'는 곶감 누른 것처럼 납작한 것이 신기하기 하기로 위의 밭에 하나, 아래 밭에 하나 등 두 그루를 심었다.
오늘 또 꽃 댕강 묘목을 60그루 추가 주문했다. 채진목을 받는 김에 꽃댕강도 함께 받기로 했다. 지난해 겨울 초입에 꺾꽂이했는데,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어 꺾꽂이는 꺾꽂이대로 계속하기로 하고 일단 묘목을 구해 심기로 한 것이다.
부산 집에서 받은 꽃댕강 묘목을 가지고 토요일에 편과 함께 악양으로 향했다. 봄놀이를 겸한 나들이였다. 섬진강 이쪽저쪽 다 온통 매화의 눈 색이다. 우리 매화 40그루도 거의 꽃을 다 피웠다. 지난해엔 몇 송이만 피었고 본격적으로 피는 것은 처음이다. 만발한 꽃은 아니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분 바람에 날려, 녹차 거름 포대 하나가 마치 깃발인 듯, 앞쪽의 염소 영감님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떠 있었다. 춘삼월 봄바람맞고 그도 바람난 듯했다.
3년째 내리 나무를 많이 심었다. 심은 나무들의 5년 후를 생각해 본다. 그 아래서 내가 과실을 줍거나 따고 있을 것이다. 10년 후에도 어쩌면 그렇게 하고 있게 될 것이다. 자리 깔고 그늘에 앉아 여름을 보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 30년 후에는? 나무들이 하나같이 솟아올라 우뚝우뚝 하나같이 자리매김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무들 30년'은 짐작이 되지만 나무들과 이루게 될 '나의 30년' 짐작은 망설여진다. 30년의 의미에 대해 자료를 찾아본다.
나무는 해마다 키를 더하고 가지를 넓히며 제 자리를 굳혀가지만, 사람은 해마다 주름을 하나 더 얻고 힘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그 차이가 서글프면서도, 결국은 같은 시간의 흐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묘한 위로가 된다. 나무와 내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30년의 무게
먼저 가수 노사연의 ‘외길 30년’이다. 가사는 이렇다.
“무수한 아픔으로 낙엽이 되기 전에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었었네. 앙상한 가지 속에 숨어있는 슬픔은 그 누가 알아주랴. 지나간 그 세월 때로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외로움도 참아야 했던 외길 30년 그 세월 속에 빛나는 인생 언제나 봄이 올까 기다리던 마음 그 누가 알아주랴. 지나간 그 세월 젊음을 불태워 살아온 날들 지울 수 없는 추억들이 너무도 많은 외길 30년 그 세월 속에 자라온 꿈.”
다음은 조각가 구본주의 ‘눈칫밥 30년’이다.
오래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서른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구본주는 리얼리즘 조각의 차세대 주자로 촉망받던 조각가였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가진 세 차례의 개인전에서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소시민의 고달픈 삶, 추락한 가장의 권위와 비애 등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직장 생활의 눈칫밥 인생을 사시안인 두상으로 형상화한 ‘눈칫밥 30년’(사비나 미술관), 힘없이 고개를 숙인 아버지를 묘사한 ‘아빠의 청춘’ 연작(인사아트센터) 등이 눈길을 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성곡 미술관 뜰에서 처음 봤다. 내가 본 것은 ‘생존의 그늘’이었다. 봤을 때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이어 본 그의 작품은 나태한 내 의식에게 충격을 줬다.
그리고 조세희 소설 난쏘공의 ‘철거민 30년’이다.
신문에 의하면 지난 2009년 1월 20일의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은 마치 우리 사회의 시계추를 3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1970~80년대 ‘민중문학’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현실에 재현해 놓은 듯했다.
30년 전 철거민 문제를 다룬 조세희 씨(67)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인터넷 서점 판매가 늘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70~80년대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농업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근대적 도시사회로 탈바꿈해 나갔고, 급격한 도시화는 도시빈민 문제 등 갖가지 문제를 양산했다.
이 시기 문학의 키워드는 도시빈민, 철거민과 같은 ‘민중’이었고, 그 속에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모순이 생생히 담겼다. 조세희 씨의 <난쏘공>은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철거민 문학이라고 한다.
어느 독자는, “고등학교 다닐 때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이 정확히 뭘 이야기하는지 가슴으로 도저히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용산참사를 보면서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이 이야기하는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난쟁이가 쏘는 공이 다시 주목받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비극”이라고 했다. 조세희의 <난쏘공>은 '철거민 30년'인 셈이다.
30년은 순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영겁처럼 길게 다가오기도 한다. 젊을 땐 막막히 먼 미래 같던 30년이, 돌아보면 한숨처럼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속에 삶의 굴곡, 웃음과 눈물이 다 담긴다. 그래서 30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살아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서사다.
우리의 30년
막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아빠, 3월 11일 잊지 않았제? 기억하고 있제?” 했다. 그땐 3월 11일보다 한 닷새 전이었다. 기억 못 하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 그래도 대답은, “기억하고 있고말고.”였다. 하루 전에 편보고 “내일이 무슨 날인데 알고 있었나?” 했다. “무슨 날? 기억력 한번 좋다”는 말을 들었다.
당일 오전, 연구실에선가 아니면 출근길에서 막내의 전화를 또 받았다. “아빠, 아침에 기념 잘했나?”라는 말을 했다. 아차, 잊었다. 둘 다 잊고 있었다. 그래도 대답은 “하고말고. 마주 앉아 커피 한잔 놓고 기념식 했다”였다. 마주 앉아 커피는 했다.
이어 둘째와 맏이도 축하와 확인을 겸하는 문자와 전화를 연이어했다. 그리고 셋이 만든 기념품을 각각 쓴 축하 카드와 더불어 빠른우편으로 보내주었다.
11일 그날, 편은 밤늦게까지 밖에서 봐야 할 일이 있었기로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들어갔다. 그래도 해 넘어간 후. 연로하신 노모께서는 편이 차려놓고 간 저녁을 이미 다 자신 후였다.
편이 빨리 온다고 왔지만, 시각은 10시, 옷 갈아입고 손발 얼굴 씻고, 닦은 후 자리에 앉으니 10시 반쯤 된다. “자 지금부터 기념식이다.” 아이들이 말한 ‘오붓한 차 한 잔’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밤도 늦은데 차는 무슨 차, 단술(식혜) 한잔으로 때우기!” 하며 동의를 구한다. “좋다”라고 했더니 식혜가 온다. 마주 보고 한잔 마시고는 불 끄려 일어섰다.
돌아보니 30년이었다. '우리들의 30년'은 이렇게 갔다. 앞으로도 “이리 삽시다. 사는 대로 삽시다. 살아온 대로 삽시다”라고 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심으려는 나무들 30년 후를 짐작하다가 곁들여 짐작해 본 우리의 30년, 정작 그 30년은 짐작할 수 없어 포기하고 대신 살아온 우리의 30년을 반추했다.
아이들이 먼저 챙겨주고, 잊은 줄도 몰랐던 기념일을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함께 웃고 다투며 어깨를 기대고 살아온 날들이 있었기에, 우리 가족에게도 30년이라는 말은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 나무가 뿌리를 내려 서로를 붙잡듯, 우리 삶도 그렇게 서로를 기대며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