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 입맛

090705

by 로댄힐

너는 내 운명


요즈음은 범이와 호비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거나, 함께 엎드려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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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호비가 범이의 등을 베개 삼아 베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낫을 내려놓고 얼른 디카를 켰지만, 디카 작동이 느린 탓에 그사이 호비가 머리를 들어버렸다.


골든 리트리버 호비에게 먼저 시비를 건다. 앙탈을 부리다가, 호비가 맞대응하면 잽싸게 뒤로 물러난다. 그런 연출도 이제는 지난 이야기다. 요즘은 수컷끼리 의좋은 친구처럼 다정하다. 산기슭의 적적함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는 내 운명’이 된 듯하다.


사람 냄새


빨랫줄을 걸었다. 빨래를 한 후 그 빨래를 그 줄에 널었다. 대충 주물럭거려 털고 넌 빨래다. 편은 서답을 정성스레 빨고 널어 말려서는 다리미로 다린다. 집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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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 산기슭 이곳에 오면 돌아갈 때 빨랫감이 한 짐이다. 땀에 전 옷들을 그대로 가져가기엔 양이 너무 많다. 그래서 얼렁뚱땅 씻어 말려 입는다. 빨랫줄에 걸린 수건과 속옷을 보니, 사람 냄새가 난다. 사람 사는 냄새다.


노루 입맛


숙진암으로 내려가 바위를 양손으로 쓰다듬고 나서 느끼는 기쁨 중 하나는, 팥의 여린 순이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처음엔 더디 자라더니, 비료를 조금 주고 나니 금세 짙은 녹색으로 변했다. 염소 영감님이 “자람이 더디다”라고 하던 팥이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잔뜩 기대하고서 내려갔는데, 이것 봐라, 한 두둑이 모두 싹둑싹둑 목이 잘려 버린 게 아닌가. 다음 날 다시 내려가 보니 또 팥밭 절반 이상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마침, 올라온 염소 영감님이 말한다.


“노루란 놈, 입맛이 까다로워요. 고급이에요. 저렇게 부드러운 순이나 풀만 먹고살아요.”


과연 그런 모양이다. 노루는 아침저녁으로 작은 무리를 지어 잡초나 나무의 어린싹이나 잎, 열매를 먹는다고 한다. 고사리 새순이나 여린 딸기도 좋아하고. 높은 산과 숲 가장자리에 서식하며, 심지어 겨울에도 양지보다 음지를 택해 머무른다고 하니, 참으로 묘한 습성이다.


아래 밭 순찰을 마치고 위로 올라왔다. 고구마 뙈기 앞, 이곳은 범이 호비 집 전면이고 쌓아둔 거름 포대 후면인데, 유심히 살펴보니 풀이 자라 아늑한 이곳에 누울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가만 보니 노루가 자는 곳인 것 같았다. 풀이 무성하기 전에도 산짐승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던 곳 부근이다.


아마도 범이와 호비를 바라보며 앉았거나, 그들을 놀리듯 머물렀던 자리였을 것이다. 이번엔 아예 눕는 자리를 만들어 둔 모양이다.


백두산길 자작나무


입구에 심은 자작나무 세 그루가 제법 자랐다. 같은 크기의 묘목이었는데, 배경 돌담의 높이에 비례하듯 키 차이가 생겼다. 맨 안쪽 나무는 하얀 껍질이 드러나며 제법 자작나무다운 몸매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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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세 그루를 포함해 모두 스무 그루를 심었는데, 몇 그루는 죽고 지금은 열다섯 그루 남았다. 그래도 잘 자라고 있다.


아주 오래전 백두산 가는 길에서 본 자작나무 군락은, 그저 ‘하얗다’는 인상만 남은 스침이었다. 그 후 함양 마천 지리산 휴양림에서 만난 자작나무는, 직접 손으로 만져 본 나무였다. 그것은 마주침이었다. 그리고 악양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 심을 묘목 리스트 1번이 자작나무였다.




다음 주에 내려가면, 아마도 팥 뙈기의 팥 순 목이 더 많이 잘려 있을 것이다. 그래도 기쁘다. 그 푸른 녹색의 싱싱함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 밭을 가로질러 뛰어오르던 노루, 그 뒷모습이 참 고왔다. 엉덩이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 후로 “노루 사슴 뛰어놀고 걱정 근심 없는 그곳”이라는 노래가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팥 순을 뜯어먹었어도, 노루가 내려와 뛰어다니는 이 산기슭의 풍경이 괜스레 미워지진 않는다. 나는 지금 노루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마 고라니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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