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어야 재미 본다

091025

by 로댄힐

10월도 벌써 하순 길로 접어들었다. 수확할 게 많아 편과 함께 출발했다. 새로 구입한 색소폰 반주기 프로그램 키와 중형 앰프도 싣고서 길뫼재행이다.


땅콩이 웃겼다


도착하는 대로 밭으로 들어섰다. 먼저 할 일은 땅콩을 캐는 일. 잠시 사용하던 호미를 놓고 대신 손으로 흙을 헤치며 “얼마나 달렸을는지?” 하는 설렘으로 줄기를 당기는 손이 약간 긴장했다. 흙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햇살은 따뜻하게 등을 밀어준다. 조심스레 줄기를 잡아당기니, 세상에나! 땅속에서 뽀얀 땅콩들이 주렁주렁 달려 나온다. 마치 “메롱!” 하며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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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도 떨어지지 않고 ‘쑥’ 빠져나오자, 괜히 내가 더 뿌듯했다. “이 녀석들, 단체로 효자네!” 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편이 “땅콩보다 이녁이 더 신났네!”라며 놀렸다. 놀림당해도 좋다. 이건 심어본 사람만 아는 기쁨, 캐본 사람만 아는 재미다.


흔들어 흙을 털었다. 흔들리는 땅콩들이 햇빛을 받아 하나하나 다 몸매가 더욱 희다. 흔들리는 땅콩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뭐라고? “우리 잘 컸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크느라 수고했어. 내년엔 친구들도 더 달고 와.” 올려다보니 하늘의 검은 구름은 사라지고,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간다. 마치 땅콩들이 구름을 밀어 올린 듯했다.


그날 우리는 땅콩을 한 알 한 알 따며 또 웃었다. 땅콩이 나를 웃겼다. 나는 땅콩 때문에 웃었다.


주경야음


밤에는 색소폰용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여 노트북에 깔고서 점검하다가 밤샐 뻔했다. 새로 산 색소폰 반주기 프로그램은 ‘Win Max’ 제품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은성 Walk Media’는 성능이 뛰어나지만, 노트북용이 아닌지라 크고 무거워 부산에서 지참하고 다니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엔 노트북 용으로 가벼운 걸 다시 마련한 거다. 노래는 우선 200곡만 구매했다. 좀 더 숙달되면 더 살 생각이다.


곁들여 앰프도 새로 장만했다. 앰프와 스피커가 일체형으로 되어 있고, 출력이 100W나 되는 제법 큰 물건이다. 덩치가 크면 능력도 크다는 말, 딱 들어맞는다. 기존 Walk Media용 앰프도 성능은 훌륭했지만, 스피커가 세 개라 연결선이 많고 번거로웠다. 이번엔 그 불편함을 줄이려 한 것이다. 사는 김에 색소폰용 핀 마이크와 노래용 무선 마이크도 함께 장만했다. 아직 잘 불지는 못하지만, 장비는 거의 다 갖춘 셈이다. 다만, 빨간 나비넥타이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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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일하고 밤엔 색소폰을 불며 노래하는 ‘주경야음(晝耕夜音)’ 생활을, 여기 혼자 내려올 때는 거의 이어가게 된다. 혼자 올 때에 혼자 일하고 노래하는 건 당연하다.


혼자 왔을 때는 늦은 밤까지 서서 불고 또 분다. 혼자 잠기는 밤,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는 사람이 모두 노래하고 색소폰을 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얼간이 짓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하던 방식을 그대로 한다. 자기가 불고, 자기가 듣는 나팔 소리. 자기밖에 듣는 이 없는 노래를 부르는 그 재미를, 이런 사람 말고 누가 알겠는가.


까불어 재미 봤다


이튿날은 깻단에서 털어 낸 들깨를 까불었다. 다 까불면 두 되쯤 되겠다.


어릴 적부터 나는 “까불면 재미없다”라는 들으면서 자랐다. 많이 까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꼭 맞는 말만은 아니었다. 까불어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 그때부터 난 까불기의 길로 이미 들어선 셈이다.

결국 나는 지금도 까불며 산다. 단, 요즘은 대상이 조금 달라졌다. 사람 대신 ‘들깨’를 까분다. 들깨 까부는 일,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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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까불면 털리고, 다음엔 털리다 못해 나까지 털린다. 들깨 자루를 들고 흔들다 보면 허리가 ‘삐끗’하고, 얼굴엔 들깨 먼지가 ‘뽀얗게’ 덮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힘든데도 자꾸 까불고 싶어진다. 까불다 보면 들깨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그 향, 참 고약하게(?) 좋다. 한여름에 잎을 딸 때도 향긋하고, 줄기를 벨 때도 향긋하고, 마지막으로 까불 때는… 향긋함에다 ‘성취감’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들깨의 매력은 삼철(三季) 내내 이어진다. 봄엔 심고, 여름엔 따고, 가을엔 까불고! 들깨도 까불고, 나도 까부니 집 안팎은 ‘까불 까불’ 축제판이다.


이쯤 되면 인생철학 하나쯤 생긴다. “까불면 재미없다”가 아니라, “까불어야 재미있다.” 사람도 들깨도, 너무 가만히 있으면 향이 안 난다. 살짝 까불어야 향이 퍼지고, 재미가 생긴다.


결론은 이렇다. 까불면 두 되쯤 된다. 까불지 않으면, 반 되도 안 된다. 까불어 재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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