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 동매리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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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여기 봐봐.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란 곳이지. 지리산 아버지의, 형의 품속 같은 곳. 무명의 땅. 내 고향 남원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곳. 쌍계사로부터 산등성 넘어 걸어서 두 시간 남짓 위치한 곳. 사령(死靈)과 생령(生靈)이 너와 함께 살 터전이지. 동구 앞길로 버스 한 대 지나가고, 여차하면 저 버스로 그리운 고향에도 갈 수 있으니, 급한 일이라도 저 버스면 충분하리. 인가라곤 띄엄띄엄 이십 호. 빨간 스레트 낮은 지붕 저 집은 낡았으되 편안한 곳으로 보인다. 푸르 청청 대숲은 우수수 짙푸른 감나무는 빠알간 홍시를 줄 것이고, 텃밭에 무엇을 심을까.”


“지리산 아버지의, 형의 품속 같은 곳, 무명의 땅”


내가 악양 동매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작용이었다. 2005년 12월 초순, 지인이 평사리가 있는 악양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한 번 거절했다. 일주일 뒤 또 연락이 왔지만, 그때도 아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전화에서는 “꼭 함께 갔으면 좋겠다”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악양에 오게 되었다.


이왕 온 김에 더 둘러보자는 제안에 굳이 거절하기도 어려워, 입석리와 중대리 마을 뒤편의 차밭을 지나 동매리 언덕까지 오르게 되었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며 “빨간 스레트 낮은 지붕 저 집, 낡았으되 편안한 집”을 보았고, 그 뒤편 대숲은 “푸르 청청 우수수” 흔들리고 있었다. 여름 내내 짙푸르던 감나무는 이제 잎을 떨군 채 겨울의 나목으로 서서, 마치 올라오는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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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로 올라오니 내가 인연 맺은 땅을 바라보며 “빨간 지붕의 집” 동네를 지키고 앉아 있는 바위는 10년 전 지리산 대참사 폭우 때 굴러 내려와 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설명을 듣고는 순간, 먼저 내려와 저 자리에 앉아서는 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율도 일었다. 망설이다가, 심사숙고하다가 결정했다. 이렇게 땅과 나는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악양면 동매리 ○○번지’라는 주소도 얻게 되었고. 섭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었다.


“사령과 생령이 함께 사는 터전”


그래, 이곳은 산 이들의 터이자, 죽은 이들의 터이기도 하다. 동매리 언덕에 머물 때마다 이 생각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이 우연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 같다.


이 마을과 산세, 이 터를 보고 이런 생각을 품은 시인이 이미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용환 시인의 「악양 동매리 찬가」를 만났을 때, 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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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산 형제봉으로 넘어간 후 어둠이 내리면, 지리산 소 시루봉 먼 아래 이 기슭의 밤이 깊어지면 이 땅과 인연 맺은 이들을 위해 하늘에 기도한다. 선연(善緣)이건 악연(惡緣)이건 간에, 내가 밟는 이 땅과 맺은 인연의 사람들을 위해, ‘산 이’이건 ‘죽은 이’이건 이 땅을 거쳐 간 사람들을 위해, 쏟아지는 별의 하늘에다 대고 신실하게 기도한다. 출입 4년 동안, 이 기도를 빠진 적이 거의 없다. 사령과 생령이 나와 함께 살 터전, 더구나 지리산 기슭 아닌가.


“동구 앞길로 지나가는 버스 한 대”


맞다. 그렇다. 나 또한 그렇게 한다. 그 버스를 타고 여차하면 내 사는 부산으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급한 일이라도 저 버스면 충분하겠다고, 그때 이 땅에 처음 왔을 때 생각했다.


“이래 봬도 버스가 들어오는 지리산 끝자락 악양 평야 산기슭 마을”이라고 부산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하고 또 읍에서 그 버스를 타기도 마을을 오가기도 한다. 그 버스 속에서 안도현 시인의 “열심히 산다는 것”의 현상을 목격하기도 했고. 400원짜리 군내 버스를 370원 슬쩍 내고 내리려는 할망구와, 30원 더 내라는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 사이의 치열한 훈계-응수, 팽팽한 삶의 긴장을 노래한 그 시 말이다.


이용환 시인, 시인은 그래서 예지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 「악양 동매리 찬가」를 읽으며 그 확신은 더욱 깊어졌다. (이 시는 시인의 허락을 받아 전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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