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루

노루발장도리 091215

by 로댄힐

봄날 같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온화한 날이었다. 며칠 동안 이어진 비 덕에 흙이 촉촉해 삽질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오늘은 모든 과수(果樹) 밑에 거름을 묻는 날이다. 삽, 괭이, 곡괭이, 낫, 면이 길고 넓은 큰 삽, 새로 산 빠루, 큰 가위, 전지가위를 지게에 올려 싣고 저 아래 바위밭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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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루란?


‘빠루’의 표준어를 찾아보니 ‘노루발장도리’ 혹은 ‘노루발못뽑이’라 한다. 하지만 주위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 역시 그냥 ‘빠루’라 부르려 한다. 나무 밑거름을 묻기 위해 구멍을 파다 보면 커다란 돌이 자주 나오는데, 그 돌을 캐낼 때 지렛대처럼 쓰려고 산 것이 바로 이 빠루다.


‘사후약방문’이라 해야 할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해야 할까. 사실 너무 늦게 산 빠루다. 삽질할 때마다 큰 돌이 나와 처음엔 삽과 괭이로만 캐내려다 삽자루, 괭이자루를 여러 개 부러뜨렸다. 그래서 곡괭이를 또 샀다.


삽, 괭이로만 되지 않아 곡괭이를 또 샀다. 한 3년 동안 그렁저렁 이 도구들로만 돌을 대충 다 캐내었다. “그래도 빠루가 필요하지!”하는 생각이 들어 철물점에 갈 때마다 살까 했지만, 그때마다 또 “돌 다 캐냈는데, 이제 와서 사서는 뭘 해?”하는 생각이 가로막아 사지 않았다.


그런데 3주 전, 매실나무 세 그루와 살구나무 한 그루를 옮기다가 큰 돌이 계속 나와 애를 먹었다. 삽, 괭이, 곡괭이, 작은 손도끼까지 총동원했지만 난공사였다. 그 무리 끝에 왼팔에 통증이 왔다.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심해졌다. 의원에서는 “너무 무리했다”라고 했다. 그 말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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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통증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겨울에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결국 빠루를 사게 되었다.


아래 밭의 나무들


매화나무 15그루, 사과나무 3그루, 복숭아나무 1그루, 석류나무 2그루, 가죽나무 3그루, 라일락 2그루. 이것이 바위 밭의 나무 숫자다.


부지런히 구덩이를 팠다. 다행히 빠루 쓸 일은 없었다. 큰 돌이 나와도 그냥 두었다. 1년 넘게 통에 담아둔 깻묵 거름과 포대 거름을 반 포대씩 나무 밑에 묻었다. 거름 포대를 옮기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해가 지기 직전, 바위밭 일을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윗 밭의 나무들


감나무 11그루, 매실나무 11그루, 자두나무 2그루, 배나무 1그루, 사과나무 1그루, 앵두나무 1그루, 무화과나무 1그루, 모과나무 1그루, 복숭아나무 1그루, 살구나무 1그루, 석류나무 3그루.


윗 밭도 구덩이를 팠다. 이번에도 빠루를 쓸 일은 없었다. 깻묵 거름과 포대 거름을 나무마다 한 포대씩 묻었다. 물기 머금은 거름 포대를 옮기는 일은 여전히 중노동이었다. 자작나무, 탱자나무, 엄나무, 채진목, 고욤나무 등에는 거름을 주지 않았다. 다음에 하기로 했다.


경험과 시행착오


오후에는 전지가위를 들고 매실나무 잔가지를 마지막으로 다 쳤다. 여름부터 이어진 작업이다. 그동안 경험이 부족해 과감히 자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무식하리만큼 과감하게 잘라냈다.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경험과 시행착오는 농사의 스승 아닌가.


직접 잘라봐야 다음엔 제대로 자를 수 있을 것이다. 전지가위를 오래 쓰다 보니 손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아픈 왼팔을 쉬게 해야 하는데, 쉴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아프다”라고 말하기는 눈치 보여 그저 “찜질 좀 해야겠다” 하고 전기찜질기를 켰다. 막내와 나에게서 ‘천재’라는 말을 듣는 아내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모른 척해준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우리 밭의 나무 숫자를 종종 적어두고, 소리 내어 외우기도 한다. ‘빠루’, 이를 ‘노루발장도리’ 혹은 ‘노루발못뽑이’라 부르는 일, 그것 또한 익혀야 할 숙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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