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문

091209 -돌풍과 이브 몽탕의 ‘고엽’

by 로댄힐

오후 내내 잠잠했다. 밖의 난로에 나무토막을 넣고 불을 붙였다. 불붙은 난로 곁에 서 있는 재미, 뚜껑을 열고 다시 토막나무를 넣는 재미 - 이곳에서 혼자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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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거세게 불면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아랫마을과 산봉우리들이 어둠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난로 속의 나무가 거의 다 탄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하늘의 점들이 하나둘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별이 곧 빛날 것이다.



밖은 범이와 호비의 공간, 안은 나의 공간이다. 밖은 그들의 시간, 안은 나의 시간이다. 범이와 호비는 초저녁이면 대개 잔다. 이후 시간의 사주경계를 위해 그러는 듯하다. 나는 안에서 노래를 호출했다. 큰 앰프 스피커와 무선 마이크, 그리고 핀 마이크까지 준비해 혼자 부르고 또 부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요란해진다. 집이 흔들리고 창고가 덜덜거린다. 알고 보니 세찬 바람이었다. 거센 돌풍이 순식간에 들이닥친 것이다. 멎지 않고 점점 더 심해져 창고가 요동치기에 부산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람이 너무 거세다. 창고 문을 닫아야겠소.”


나는 이곳에 오면 창고 문을 열어둔다. 나는 또 그것을 ‘밤의 문’이라 부른다.


밖으로 나가니 테라스 의자가 밭 한가운데로 날아가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범이와 호비가 총알같이 일어섰다. 마치 함께 날아갈 것처럼. ‘밤의 문’이 돌풍과 맞서 용을 쓰는 소리가 어둠을 흔들었다.


문을 닫았다. 그런데 ‘밤의 문’을 닫으면, 밤은 어디로 가는가.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가. 그나저나, 바람은 누가 일으키는 걸까. 북풍도 남풍도 아닌 바람이 밤을 흔들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밖이 잠잠해졌다.



날이 샜다. 멀리 섬진강 너머 백운산의 톱날 같은 봉우리에 눈이 보인다. 밤새 돌풍이 몰아쳤지만, 눈발은 형체를 잃지 않고 흩날렸다. 난로는 날려 저만치 나뒹굴고 있었다.


낮의 바람은 밤보다 더 사나웠다. 지난밤에 ‘밤의 문’을 닫게 했던 돌풍은 장난에 불과했다. 형제봉과 청학이골에는 하루 종일 석회 가루를 뿌리는 듯 희뿌연 바람이 돌았다. 눈발과 빗방울, 그리고 돌풍이 함께 어지럽게 뒤섞여, 고엽들도 바닥에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에서 뒤틀리고 있었다. 북풍은 죽은 잎들을 차가운 망각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돌풍에 맞서는 것 같아서 또 눈발 사이사이에 내리는 빗방울이 커 망설이다가, 파카에 달린 두건을 단단히 매어 쓰고는 전지가위를 들고 바위 밭으로 내려갔다. 바위 밭의 서른여 그루 매실나무 잔가지를 다 잘랐다. 돌진해 내려오는 멧돼지와 충돌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경계심 때문에 손놀림이 빨라졌다. 설마 그러랴만 워낙 눈발과 돌풍 소리뿐이었으므로 그 속의 정적이 전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뜨진 않았지만, 북풍에 휩쓸리는 밤나무 잎들을 보며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밭일을 마치고 올라와 보니 또 다른 난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 옆면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비상사태였다.


뚫린 부분을 막아야 했다. 이대로 두고 부산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그때 문득 깔판이 생각났다. 막내가 예전에 아르바이트할 때 받았다면서 서울에서 공수해 온 야외용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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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린 곳을 막는 일도 바람과 맞서는 일이었다. 곧 해가 진다. 빨리 막아야 한다. 마음이 급하면 될 일도 안 되는 수가 많은데 이번에는 급한 마음이 오히려 응급처치를 그런대로 잘하게 해 주었다. 막고 나서 내려서 보니 그럴듯하다. 어찌 보면 거지 움막 같고 또 어찌 보면 무슨 작품 같다.


영화 ‘밤의 문’


다시 밤이 왔다. 바람이 멎지 않는다. 낮의 돌풍이 밤까지 이어진다. 북풍이 아니라 북쪽으로 부는 바람인 것 같았다. 밤의 문인 창고 문이 여전히 너덜거린다. 이번엔 옆면이 찢어지기까지 했다.


‘밤의 문’은 바로 이브 몽탕의 노래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 이 처음 나온 영화의 제목이다.


"고엽은 삽으로 퍼서 모인다오. 알다시피 나는 잊을 수가 없다오. 추억과 회한도 또한 그 고엽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북풍은 그것을 차가운 망각의 밤 속으로 실어 간다오."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조제프 코스마가 곡을 붙인 노래라고 한다. 지금이 꼭 그 고엽의 밤이다. 지금 부는 바람이 고엽의 북풍이고 '밤의 문'이다.


'밤의 문'을 알고 싶었다. 찾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자료가 찾기지 않는다. 겨우 찾아낸 몇 줄 글은 이랬다.

"해방 직후 겨울의 파리, 장(이브 몽탕)은 죽은 줄 알았던 레지스탕스 동료 레이먼드와 재회한다. 장은 아름다운 여인 말로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의 동생이 레이먼드를 게슈타포에 넘긴 배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개봉하여 전쟁의 와중에도 흥행에 성공했다.”


다행히, 하모니카로 연주되는 〈고엽〉 의 한 장면, 이브 몽탕이 흥얼거리는 그 목소리의 단편 영상은 남아 있었다.


다시 이어진 낮과 밤


다시 해가 떴다. 겨울의 해는 어디서나 반갑지만, 산골의 해는 더욱 따뜻하다. 형제봉 꼭대기를 덮은 햇살이 우리 밭까지 내려오는 데엔 30분이 걸린다. 그 사이에 범이와 호비의 아침밥이 나온다. 달은 넘어가지 않고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퍼지자 달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난밤, 호비가 멈추지 않고 짖어댔다. 범이와 함께 짖으면 인기척이 있는 법이지만, 이번엔 호비만 짖었다. 뒤쪽을 향해. 짐승이 왔나 싶었지만, 범이는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가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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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일어나자마자 이 사태부터 챙겼다. 뒤를 보니, 북쪽을 보니 채소 심을 때 사용했던 검정 비닐이 밤나무에 걸려 큰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이불 홑청 서답을 널어둔 것 같았다. 비로소 이해되었다. 내가 호비라도, 내가 호비라고 해도 밤에 펄럭이는 저것을 보고 짖지 않고 못 배겼을 것 같다.


자작나무가 제법 빛난다. 푸르던 여름과 달리 몸이 희게 빛난다. 북풍은 고엽을 몰고 밤의 문으로 들어섰다. 추억과 회한도 함께, 차가운 망각의 밤으로 실려갔다.


밤의 문, 이제 밤에도 창고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 ‘밤의 문’을 닫으면, 밤은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내 낮이려나. 추억과 회한이 사라지지 않으려나.


밤의 문 저편에는 또 어떤 문이 서 있을까. 그나저나, 바람은 누가 일으키는 걸까. 과학적인 설명을 들으려고 묻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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