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30
평사리 들판 초입 둑이다. 핸들을 돌려 박경리 토지 문학관 가는 들판 길로 들어섰다.
봄의 끝자락은 언제나 조금 아쉽다. 개나리의 노란 불빛이 점점 흐려지고, 그 자리를 연둣빛 들판이 대신한다. 꽃잎은 지지만 땅은 더 짙어지고, 바람은 더 부드러워진다. 이 계절의 변화는 떠남과 도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느린 행진 같다.
멀리 산등성이엔 아직 겨울의 그림자가 남아 있지만, 들판은 이미 초록의 심장을 고동치고 있다. 바람이 스치면 밀려오는 푸른 물결이 햇살을 따라 반짝이고, 그 속에 묻혀 서 있으면 내 마음에도 새잎이 돋는 것만 같다.
사람의 나이에도 이런 계절이 있을까. 한때의 환한 빛이 저물고, 대신 더 단단하고 고요한 색이 스며드는 시절, 그 시절을 나는 지금 거치고 있다. 눈부심보다 평화가, 시작보다 지속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에 들판에 서니 초록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선 서두름도, 화려함도, 슬픔도 모두 흙으로 스며든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그 땅 위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서고, 또 살아간다. 오늘의 바람처럼,
언제나 새순은 피고, 계절은 돌아온다. 봄의 끝에서 나는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잠시 들판의 숨결 속에 귀를 기울인다.
물은 멀리 있지 않았다. 다만 그 길이 문제였다.
연못에서 창고까지 이어지는 거리 사이의 흙과 돌, 굽이진 바닥이 일을 더디게 만들었다. 장비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삽과 곡괭이 그리고 pvc 호스로 내일 또 부산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오늘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해결해야 했다.
호스를 묻을 자리를 따라 흙을 팠다. 햇살이 제법 따갑게 내려앉는 오후, 삽날이 돌에 부딪히면 곡괭이를 들고, 그런대로 파인다 싶으면 괭이와 삽을 들고서 도랑을 팠다.
판 도랑에 호스를 묻고서 수도꼭지를 연결하니 연못에서 간이 창고에 이르는 간이 상수도 공사가 대충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순간은 조심스러웠다. 물이 새지 않기를 바라며, 단단히 조였다. 잠시 뒤, 손잡이를 돌리자, 간이 창고 안의 모터가 돌아가고 맑은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졌다.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부족한 도구와 서툰 손끝으로 만든 길이지만, 그 물은 내 손으로 끌어온 것이다.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마음 한편에서 작은 성취감이 피어올랐다. 땅속을 지나온 그 물은 비록 연못 물이기는 하지만 내겐 시간과 노력이 흘러 이룬 결과였기에 소중한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