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08
나흘째 되는 날, 더는 미루지 않기로 했다. 기암괴석을 때리며 흘러내리는 칼 같은 물소리를 곁에 두고도 찾지 않았던 계곡을, 편이 내려오는 오늘만큼은 일손을 놓고 가보기로 했다. 외진 곳이라 자리 펼 공간도 넉넉했다. 창원에서 온 여형제와 함께 편이 도착했고, 우리는 청학이골 청학선사 아래쪽으로 들어섰다.
물은 놀랄 만큼 시원했다. 몇 마디 말로는 다 담울 수 없는 시원함이었다. “오길 잘했다”라는 같은 말이 몇 번이고 돌았다. 사람이 적어 어수선하지 않고, 버려진 것들이 거의 없는 자리였다. 혼자서라도 와야겠다고 중얼거렸지만, 아마 다시 오지는 못할 것이다. 좋은 줄 몰라서가 아니라, 늘 그렇듯 틈이라는 게 쉽게 내어지지 않을 테니.
편이 내민 술떡을 머뭇거리다 받아먹었다. ‘술’이라는 이름에 잠깐 망설였지만, 입안에 퍼지는 은근한 단맛과 서늘한 기운이 계곡물과 잘 어울렸다. 여름 속에서 몸과 마음을 식혀주는 이중 장치 같았다.
계곡의 찬물, 손에 쥔 술떡 한 점. 그 한 점의 서늘함이 지나가던 여름을 잠시 붙들어 세우는 듯했다.
그 무렵, 밭 아래 악양천의 학이 노니는 소(沼)에 무지개가 걸렸다. 8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비의 무게나 더위의 무게 어느 쪽도 가볍다고 말하기 어려운 날들 사이에서, 무지개는 잠시 다리처럼 떠 있었다.
‘하늘로 건너가는 길’ 같기도 했다. 젖은 손으로 허둥지둥 카메라를 들고 나서니 이미 하늘은 그 다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때, 사과나무 한 그루가 부러졌다. 솎아내지 않은 열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남은 나무에 달린 사과 둘 중 하나를 그래서 급히 따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와서 보니 그 하나 사과마저도 새들에게 살을 다 파 먹힌 조각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조각을 편과 나눠 먹었다. 덜 익었지만 붉어 가던 맛이 있었다.
계곡의 찬물과 술떡의 한 점, 무지개가 걸렸다 지는 순간, 다치고 부서졌으나 끝내 맛을 남긴 사과. 서로 다른 듯 이어진 장면들은 그해 여름을 천천히 이끌고 갔다.
그리고 9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아, 이제는 지나간 여름”이라고. 또 여름은 참 많은 것들을 남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