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 무리 1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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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하던 풀의 기세는 어디로 갔을까. 한풀 꺾인 더위가 찾아오자, 하늘을 찌를 듯 치솟던 풀의 생기도 함께 가라앉았다. 그래도 풀은 여전히 길다. 그저 ‘한’풀이 꺾였을 뿐이다. 바위 밭에 남겨 둔 풀을 마저 베기 위해, 그리고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풀들을 잠재우기 위해 예취기를 챙겼다.
예취기 작업을 위한 복장은 또 하나의 군사작전을 준비하는 무장과도 같다. 옛날 시위 진압에 나서던 전경의 백골단 복장을 떠올리게 할 만큼 중무장이다. 다만 젊은 전경의 역동적인 무장은 아니다. 마치 시위대 뒤를 뒤늦게 따라가는 늙은 순경의 힘겨운 무장, 혹은 돈키호테 뒤를 졸졸 따르는 산초 판사의 우스꽝스러운 무장에 가깝다. 무릎 보호대를 단단히 조이고, 투구 같은 안전모를 쓰고, 8킬로그램 배터리 배낭을 꾸역꾸역 메고, 예취기 막대를 최루탄 발사기라도 되는 듯 가슴에 안고는 "전진 앞으로!"를 외치며 바위 밭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문득 오른편 농막의 외등이 켜진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가 싶어 일단 바위 밭까지 내려갔지만,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보니 확실히 불이 켜져 있었다. 낮에 일부러 켜놓을 리가 없는데…. 낮 불이다.
무장을 풀고 되돌아가 확인한 뒤, 다행히 밖에서 스위치를 내려 불을 끌 수 있었다. 다시 바위 밭으로 돌아와 예취기를 돌렸다. 스스로는 숙련된 병사의 절도 있는 동작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산초 판사 같은 동작이었으리라. 늙은 군인의 힘겨운 M1 총 자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다 베고 올라왔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밤은 훨씬 더 밝아졌다. 마을의 불이 늘었고, 서북쪽 오리농장은 밤새 불을 켜두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달 없는 밤은 여전히 어둡다. 별빛이 찬란해도, 비가 갓 그치고 두꺼운 구름이 남아 있는 밤은 더 깊게 어둡다.
폭우가 멎은 늦은 오후, 어스름한 밝음 속에 노래를 흥얼대다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다 밖으로 나와 보니 범이와 호비가 선잠에서 깨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때 바로 옆 작업모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처음엔 예취기 배터리 충전기 불빛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의문이 들었다.
“충전기를 모자에 넣어둔 적이 없는데?” 이어지는 생각은 “그리고 저건 충전기의 붉은 불빛이 아닌데….”
그 불은 모자 속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플래시의 그림 붓이 어둠을 스치는 듯한 유연한 흔들림. 그것은 개똥벌레, 반딧불이가 내는 밤의 불이었다.
손을 내밀자, 반딧불이는 모자 위에서 가볍게 떠올랐다. 안이 아니라 겉에 붙어 있었는데도 모자 안쪽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형광등 같은 빛줄기가 선을 그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앞쪽 차나무 틈으로 사라졌다.
느릿하다고 해야 할까, 부드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답다고 해야 할까. 반딧불이는 마치 우리—나와 범이, 호비—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혹은 모르는 듯 유유히 떠다니다 어느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유성이 가르며 사라지는 순간과는 전혀 다른, 조용하고 오래 남는 사라짐이었다.
낮의 불, 그리고 밤의 불. 이 두 불빛은 이날 내게 우연히 찾아온 마주침이었다. 반딧불이는 낮의 불이 이어지는 또 하나의 불처럼 느껴졌다.
그 밤, 불은 개똥벌레의 작은 불빛으로, 또 마음속 화두로 오래도록 나를 붙잡았다.
“물소리 까만 밤 반딧불 무리, 그날이 생각나 눈 감아버렸다….”
상념 속에서 유년, 소년, 청년의 시절이 반딧불이처럼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