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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너머

알밤과 밤송이 100929

by 로댄힐

묘판에 뿌려둔 배추씨가 다행히 잘 자라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내려온 것도 바로 이 모종들을 옮겨심기 위해서다. 주중에 어렵게 낸 소중한 시간이다.


길뫼재로 가는 길에 면 소재지의 C 댁에 잠시 들렀다. 새로 짓는 집은 거의 완공 단계였다. 이사 집에 전하는 선물을 건네며 혹시 밤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집 짓느라 바빠 밤나무 산을 오르지 못했다며, 오히려 자기네 밤숲에 가서 마음껏 주워가라고 권했다.


길뫼재에 도착한 뒤, 우리는 먼저 모종을 옮겨 심을 준비를 해둔 다음 바위밭 위에 자리한 밤나무 숲으로 향했다. 해가 진 뒤 심을 생각이었다.


밤숲에는 익은 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산돼지가 다녀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몇 해 전에는 산돼지가 먹고 버린 껍데기만 깨끗하게 널려 있었던 기억이 있어 더 안도되었다.


알밤보다 밤송이가 더 많았다. “알밤을 기대했는데 온통 밤송이뿐이네!” 편이 웃으며 투덜댔다. 아직 늦밤이 아니라 올밤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밤톨은 주우면 되지만 밤송이는 발로 밟아 비벼야 한다. 바닥이 푹신해 밤송이가 자꾸 흙에 묻히곤 했지만, 깔끔히 비벼낸 밤톨들은 그만큼 더 고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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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멀리 들판은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움직여도 땀이 나지 않는 선선한 날씨 속에서, 인적 없는 숲에서 우리 둘이 가을소풍을 즐기는 듯했다. 아니,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가을소풍이었다.


밤송이를 밟고서 비벼대는 일, 어쩌면 삶의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다.


사람도 처음부터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다. 조금은 불편하고 때로는 손이 베일 듯 까슬한 껍데기 속에서, 각자가 품고 있는 고운 알맹이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밤송이를 밟아 까는 일은 의외로 손이 많이 갔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움 끝에 얻는 밤톨은 더 귀하게 느껴졌다. 삶에서도 쉽게 얻어지는 것보다 수고 끝에 건져 올린 작은 결실이 더 단단히 마음에 남는다.


굳이 큰 성공이 아니어도 좋다. 한 해의 햇살과 비를 견디고 제때 떨어진 밤처럼, 제 자리에 충실하게 익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알밤은 서둘러 얻는 것이 아니라, 익은 때를 맞아 저절로 손에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밤송이는 어찌 보면 자기 보호의 방편이기도 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늘을 세웠다가도 때가 되면 스스로 벌어져 속살을 내어준다. 사람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음을 감추고 지키지만, 믿고 싶은 순간이 오면 조심스레 마음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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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밤송이도, 사람도, 완전히 닫혀 있거나 영영 열리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어느 때, 어느 인연에 의해 서서히 벌어지면서 속의 것을 세상에 내놓는다.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단단한 껍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숨은 무늬와 온기인지도 모른다. 밤송이가 때를 만나 스스로 벌어지듯, 삶도 어느 순간 조용히 속살을 드러낸다. 그 작은 빛을 발견하는 일이, 오늘 우리가 건져 올린 가을의 의미였다.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이 껍질 너머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가 기울 무렵 모종 심기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진영 휴게소를 지나 김해를 지날 때쯤, 보름을 일주일 지난달이 들판 끝 작은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달도 제 나름의 고요한 운치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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