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엔 전기 패널, 위에는 지붕 101010
집 이름을 ‘길뫼재’라고 거창하게 붙였지만, 실제로는 컨테이너 한 동이 전부다. 여름이면 한밤에도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숨이 턱 막히고, 겨울이면 바람이 바닥 틈으로 스며들어 온몸이 시리다. 더위와 추위가 이처럼 극단적으로 오가는 공간에서 이렇게 지낼 수만은 없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분명했고, 그 시급함도 절실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제였던 ‘겨울 대비’를 제대로 하기로 했다.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늘 “가서 즐기고 돌아와야지”라고 마음먹지만, 길뫼재 언덕에 도착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태도가 바뀐다.
쉬러 오는 곳인데도 와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일부터 시작한다. 큰 일, 작은 일 가릴 것 없이 손볼 곳이 끝없이 나타나고, 그래서인지 매번 “과제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이 과제만큼은 ‘이런저런 일’을 핑계로 더 미룰 수 없었다. 겨울이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바닥을 견딜 방법이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은 라디에이터와 전기 매트, 보온 담요로 간신히 버텼지만, 그것은 ‘지낸’ 것이 아니라 ‘버틴’ 데 불과했다. 여름 역시 바람과 선풍기로는 한계가 너무 명확했다. 내년을 인간답게 보내려면 지금 바꿔야 했다.
전기 패널을 깔고 새 장판을 펼쳐 놓는 일은 생각보다 큰 공사였지만, 완성되는 순간 방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바닥에서 따뜻한 기운이 은근히 올라오고, 마음마저 부드럽게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 외벽과 지붕만 정리하면 정말 새집처럼 달라지겠구나.”라는 이 생각이 자연스레 다음 과제로 나를 이끌었다.
오른편 테라스는 원래 옥외용 탁자 하나만 놓고 바람을 즐기려던 곳이었다. 대형 파라솔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지만, 한 계절을 보내고 나니 그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파라솔은 햇빛도 비도 완전히 막아주지 못했고, 바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렇게 지붕 공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기둥을 세우고 단단한 지붕을 얹고, 측면에는 격자무늬 칸막이까지 더했다. 파라솔은 반대편 데크로 옮겨 가서 오히려 더 제 자리를 찾은 듯 어울리게 되었다.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 노래처럼, 마무리되지 않은 지붕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하늘이 보이고, 격자 너머로는 한 계절을 견딘 잎들이 서서히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산기슭 여기서는 계절이 바뀌는 속도가 더 또렷하다.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라는 감각도,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부네”라는 체감도 이곳에서는 더욱 깊다.
이 지붕 아래에서 앞으로 더 오래 머물게 되리라는 예감은 이미 확실했다. 이제는 굳이 서둘지 않고, 산과 들판, 그리고 멀리 섬진강까지 시야에 담아 가며 쉬어가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붕 아래 탁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다 보면 시선이 자연스레 멀리 향한다. 그러다 보면 겹겹이 이어진 논둑 사이, 작고 아담한 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평촌마을에서 중기마을로 올라가는 길가, 햇살이 유독 고르게 스미는 자리다. 처음엔 스쳐 지나쳤지만,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풍경이었다.
그 집은 농막일 수도, 비료나 농기구를 보관하는 작은 창고일 수도 있다. 멀리 있어 정확한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주변 풍경과 함께 놓고 보면 이 작은 구조물이 오히려 더 든든하고 풍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옆을 지키듯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이곳의 오래된 벗처럼 보인다.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이 참 묘하게 어울린다.
계단식 논, 햇살, 벼 이삭, 그리고 고요히 서 있는 작은 건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림처럼 맞아떨어져 마음 한쪽이 잔잔해진다.
그곳은 누군가의 하루를 담아두는 작은 쉼터 같기도 하고, 계절마다 다른 색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범이와 호비가 지내는 철망 집의 지붕을 정식으로 올리는 일도 이번에 마저 해내야 했다. 오랫동안 햇빛과 비를 막아주던 갑바 지붕은 이미 들뜨고 변색돼 더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갑바를 모두 걷어낸 뒤, 튼튼한 각목을 가로로 서까래처럼 설치하고 합판을 올렸다. H와 둘이서 넓고 무거운 합판을 어깨에 걸치고 사다리를 타며 한 장 한 장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그러나 합판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지붕의 형태가 또렷해졌고, 마무리 단계에서 방수포를 씌우자,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든든한 구조가 완성되었다.
범이와 호비의 집은 훨씬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작은 생명들의 집을 손수 고쳐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컨테이너 하우스에 전기 패널을 깔고, 데크에 지붕을 얹고, 범이와 호비의 집까지 새로 정비한 일들은 모두 주말마다 여러 주간에 걸쳐 해낸 작업이다. 하나하나는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 모든 과정이 결국 길뫼재를 ‘사람답게, 그리고 오래 머물 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작업이 끝날 때마다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더 따뜻해지고,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이 지붕 아래에서, 또 이 하늘 아래에서 계절의 변화를 천천히 바라보며 머무르는 시간이 앞으로 내게는 더욱 소중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