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19
들판이 한결 비어갔다. 채워져 있던 들판이 이제는 비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풀로 무성하던 시절엔 온통 진초록이더니, 지금은 흙빛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엄밀히 말해 흙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을 - 만추의 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타작을 마친 논이 더 많아졌다. 비워진 논들은 맨살을 드러낸 채 조용히 누워 있다. 나는 계절의 깊은 자리, 그 한가운데에 서 있다. 들판은 이제 잠시 침묵의 계절로 들어간다.
막무가내로 지어 온 농사, 5년쯤 했다.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농사의 ‘질’을 바꾸고 싶다. 소출을 내는 일보다 정원처럼 가꾸는 밭을 꿈꾸고 있다. 물론 뜻대로 잘 되진 않을 것이다. 시간의 제약, 자연의 조건이 늘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심은 차나무 씨앗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꽃을 피웠다. 밭 가장자리를 두른 차나무들은 그대로 관목으로 두고, 들머리의 빈자리는 큰 차나무(교목)를 세워 작은 정원으로 꾸며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가지가 얽히며 덤불처럼 자라는 차나무를 어떻게 하면 한 그루 큰 나무로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차나무의 분류에 대해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①식물학적으로 차나무는 동백나무과에 속하며, 형태에 따라 교목·반교목·관목으로 나눈다. 잎의 크기로는 소엽·중엽·대엽으로 분류한다.
②우리나라의 차나무는 중국 소엽종의 관목이다. 관목형 차나무는 키가 작고 굵은 줄기가 뚜렷하지 않다. 반면 교목형은 키가 크고 중심 줄기가 확연하다.
③유전 연구에 따르면 차나무의 원형은 교목형이다. 교목이 원시형, 반교목이 과도기형, 관목은 진화형에 해당한다.
④중국 서남부 운귀고원의 대엽 교목종이 오랜 세월 하천을 따라 퍼져 나오며 각 지역의 기후에 적응했고, 온대 지역에서 정착한 차나무들은 건조와 적은 햇볕에 견디도록 자연스럽게 관목화·소엽화되었다.
⑤우리나라가 온대 기후이므로 소엽종 관목형 차나무가 중심이 된 것이다.
나는 지금 관목형 차나무를 가지와 줄기의 구분이 뚜렷한, 하나의 굵은 수간을 가진 교목형 차나무로 키워보려는 궁리를 하고 있다.
어제 독두 원장과 점심을 먹으며 밭의 구획을 새로 짜보려는 내 구상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그건 만다라!”라고 말했다.
만다라처럼 정밀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한 뙈기의 밭을 원·세모·네모 같은 도형으로 나누어 만다라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그 바깥은 잔디를 깔거나, 아니면 자연 그대로 풀밭으로 두면 된다. 말하자면 동그라미엔 도라지, 네모엔 더덕, 세모엔 배추, 다섯 모엔 고추를 심어볼 참이다. 마음먹은 대로만 되면 좋으련만….
전체적으로는 ‘차나무 정원’, 혹은 ‘농사 정원’을 만들 계획이다. 다소 어색한 표현이지만 의미를 붙인다면 ‘농원’이겠다. 만다라 농원, 혹은 만다라 전원.
오늘 들깨를 베어 우리 밭도 조금은 비워졌다. 많지 않은 양이라 둘이서 베니 금세 끝났다. 고구마밭은 아직 남겨두었다. 다음 주에 내려와 비울 예정이다. 고추밭도 그대로다. 호박은 이제야 기세를 올린다.
밭이 모두 비고 나면, 밭의 모양을 새롭게 짜보려 한다. 비어 가는 밭을 바라보면서, 또 지붕을 손보는 일을 거들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새로운 구획을 그려본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 본격적으로 밭을 가꾸기 전까지는 풀이 주인 행세를 하겠지만, 그래도 구상대로만 된다면 작은 손바닥만 한 구역마다 작물들이 올망졸망 자리 잡을 것이다.
가을, 그 절정의 순간은 언제일까? 객관적인 기준을 묻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느끼는 순간을 말하고 싶다. 지난 주말 내려왔을 때 쑥부쟁이가 활짝 피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내려와 보니 그 꽃의 만개는 더없이 풍성하고 깊었다. 같은 꽃이지만 주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그 순간 문득, 내가 지금 계절의 가장 깊은 곳에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풍성한 들국화 사이에서 지금 이때가 바로 가을의 절정임을 실감했다. 이 계절은 이제 서서히 기울며 겨울로 향할 것이다.
사실 여름 내내, 또 초가을 동안 쑥부쟁이를 베어내지 않았다면 지금은 온통 꽃의 나라였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 꽃들이 계절의 정점을 만들어줄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베어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보니 얼마나 좋은데. 하지만 무성한 풀숲 속에서 다른 풀들과 뒤섞여 있어 따로 살려둘 방법이 없었다.
내 삶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기까지 와서 지금 이 자리, 이 지점에 서 있다. 이 순간이 내 삶의 절정이라면 절정이고, 겨울 초입이라면 초입이다.
그리고 그때는 선택하지 못해 버려졌지만, 지금 돌아보니 소중했다 싶은 것들, 그것들은 베어져 나간 여름과 초가을의 들국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