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이런 글을 쓰고 싶다’와 ‘이런 글은 쓰지 않겠다’라는 두 가지 명제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늘 생각으로만 머물렀고, 각 명제 아래 어떤 기준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세우지 못한 채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몇 달 전부터 내가 쓰지 않으려는 글의 종류를 먼저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기준들이 또렷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금 나는 아래에 정리한 부류의 글만큼은 앞으로도 쓰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단순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글을 대하는 태도이자 지켜가고 싶은 윤리이기도 하다.
자기 계발서 부류의 글 문제는 개인의 성공을 구조적 맥락에서 분리하고, 복잡한 삶을 단순한 ‘의지·방법·습관’의 공식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는 인간의 서사와 경험을 편평(扁平)하게 만들고, 자기 성찰을 ‘효율’과 ‘성과’로 환원시키기 쉽다고 생각한다.
나는 삶을 공식으로 환원하는 글을 쓰지 않고, 나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성찰의 자리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와 같은 톤과 목적의 글은 의도적으로 확실히 피한다.
당위적 글쓰기의 문제는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좁히고, 저자의 판단을 기준으로 독자의 삶을 재단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라. 과잉 정의감, 과잉 신념, 과잉 평가가 뒤섞여 타인을 쉽게 규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런 환경일수록 글은 독자에게 ‘비워진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규범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독자가 자기감정과 세계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여백을 두는 글을 선택한다.
자기 생각을 ‘영향력’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강하게 주입하려는 글은, 결국 읽는 이의 삶을 저자의 세계관에 종속시킬 위험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계몽적 글쓰기나 연설은 많은 경우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개인의 적성과 상황을 무시한 채 타인의 삶을 바꾸려 하다가 비극을 낳기도 했다.
나는 군복무 시, 저명인사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 길로 들어섰지만, 적성에 맞지 않음을 알고서 진로를 바꾸었는데, 거듭 잘못 선택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른 한 장교 사례에서 이 교훈을 얻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타인의 인생 궤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말한 사람은 그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다.
나의 글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스스로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여백을 건네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신앙이나 신념이 글에서 전면적으로 주장될 때, 그것은 곧 독자를 설득하거나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믿음은 말로 강조될 때보다, 삶의 태도와 문장의 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때 훨씬 진실하게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신앙을 설명하거나 주장하기보다, 글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고자 한다.
지식 과시는 결국 저자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기 쉽고, 독자와의 거리를 벌린다. 무엇보다 지식의 본질은 ‘아는 상태’보다 ‘배우는 과정’에 있다. 배움의 자세가 드러나는 글은 독자를 억누르지 않고 함께 사유하도록 돕는다.
나는 아는 것을 늘어놓는 글보다, 이해하고 소화한 것이 문장의 결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글을 지향한다. 이는 곧 ‘배움의 윤리’에 충실하려는 태도이기도 하다.
악양 골 구석구석 그 많던 감들은 다 어디로 갔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