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런저런 일들 101225
내 눈에는 일한 표가 확실히 보이지만, 남들 눈에는 잘 띄지 않을 것이다. 출입구의 돌들을 펜스 아래 바짝 밀어 넣어 다시 정렬했다. 한 면 한 면 맞추느라 신경을 썼고, 놓고 보니 이전보다 훨씬 단정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눈에 그렇다는 것이지, 남들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일지 모른다.
그래도 종일 부산을 떨며 이것저것 부지런히 했다. 밭에서 돌멩이 몇 통을 주워냈고, 연못 둘레와 농막 뒤 언덕의 마른 풀도 긁어모아 퇴비장에 넣었다. 벽돌로 밭 경계를 잡는 일도 작은 성취였다. 겨울 밭은 여름보다 훨씬 다니기 편하고, 형제봉 너머 겨울 하늘은 맑고 쨍하다. 드문 구름 두어 점만 흘러가는 그런 하늘.
그런데 부산 쪽 지인들이 와서는 한결같이 말했다.
“부지런히 다닌다더니, 밭에 풀이 이게 뭐꼬?”
예전 같으면 억울했을 것이다. 끼니도 제때 못 챙길 만큼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표가 별로 안 난다”라는 말을 들으면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촌 일을 한 해 두 해 계속하고, 그것도 집에서 165킬로 떨어진 산기슭 밭을 오간 지 5년이 되니, 노동이 일과를 넘어 일종의 도력(道力)처럼 느껴진다.
그런 내가, 남들 다 다는 내비게이션을 이제야 달았다. 아이폰 등장 이후 전용 내비의 수요가 거의 사라졌다는 이 시기에 달았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달고서 두 번째 내려오는 길, 이제야 조금 사용법이 손에 잡힌다.
둘째 아이가 오래전부터 “사 드릴 테니 달고 다니시라”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난 늘 사양했다. 인터넷 지도로 미리 길을 보고, 필요하면 지도를 출력해 들고 초행길을 찾아가는 것이 나름 신념이었다.
하지만 부산을 포함해 어느 도시든 길 사정이 워낙 자주 바뀐다. 나는 ‘길치’라서, 내가 사는 동네 길도 심심찮게 헤맨다. 보다 못한 아이들이 더 강하게 말했다.
“사 드릴 때 부착하세요!”
그렇게 달게 된 내비, 결국 큰아이가 사서 보내왔다.
막상 달고 보니 세상 편하다. ‘더듬수’ 놓을 일이 줄었다. 복잡한 길이든 먼 길이든 이제는 겁낼 것 없다. 단순히 운전의 길 안내자를 넘어, 남은 생의 항로까지 밝히는 조용한 동반자를 얻은 듯한 기분이다.
며칠 전엔 색소폰 연주용 앰프와 마이크도 새로 들였다. 큰 앰프가 이로써 두 개다.
큰아이는 드디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의 첫 단계를 이루었다. 고교 시절부터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던 아이는 긴 준비 끝에 영어권의 규모 있는 주한 외국 대사관 공채에 합격했다.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다. 지난 추석, 부모에게 안겨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큰아이는 그 전의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에서 일했는데 그것 또한 국가적 행사에 힘을 보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아래 바위 밭에 남은 거름을 아직 다 주지 못했다. 내려가서 지게 짐을 지려면 하루쯤 온전히 틈을 내야 한다.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돌을 고르고 나무 밑 흙을 조금 더 고르게 펴는 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여름 예취기 작업이 한결 수월해진다.
겨울 하늘은 맑고, 산기슭의 일은 끝이 없다. 그래도 산중의 일은 내 속도를 알고, 내 속도대로 따라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한다. 표가 잘 나지 않는 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