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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 지게 쉰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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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거름 짐을 쉰 짐쯤 졌다. 바윗밭에 있는 나무가 마흔 그루 남짓인데, 그날 온종일 지게로 나르며 겨울 밑거름을 모두 주었다.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해를 버틸 힘은 될 만큼 챙겨준 셈이다. 매화꽃이 필 초봄과 매실이 열릴 초여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 거름은 지난여름 K가 경운기로 두 번이나 실어다 준 소똥거름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날라다 준 K도 고생했지만, 그것을 뒤집고 관리한 나 또한 적잖이 힘들었다. 재작년에도 같은 고생을 했던 터라, 이제는 여름 거름은 정중히 사양해야겠다는 결심까지 했었다. 다음에 올라오면 가을이나 겨울에 가져다줄 수는 없는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지게에 담으려고 포크로 떠보니, 거름이 놀라울 만큼 잘 삭아 있었다. 냄새마저 향기라 할 만큼 부드럽고 고왔다. 그 순간 여름에 준 거름이라도 마다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돌아왔다. 한 번 소똥은 영원한 소똥, 소똥거름은 거름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진리를 또 깨닫는다.


다행히 지게 지는 기술은 아직 몸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를 마친 뒤 두 해 동안 짐 지던 경험이 지금에 와 유용하게 쓰인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 속에 내가 끼지는 않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 틈엔 내가 있었다. 아니, 우리 동네와 옆 동네를 합쳐도 나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어쩔 수 없이 깊어진 ‘온몸의 기술’이 지금 산기슭 생활에서 이토록 쓸모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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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짐쯤 지고 나니 팔다리 힘이 다 빠지고 허릿심도 푹 꺾인다. 더는 못 지겠다 싶다. 지게를 메려면 먼저 오른 무릎을 꿇고 지게막대를 왼손에 단단히 잡은 뒤, 오른쪽 멜빵을 걸고 왼쪽 멜빵을 끼워, 막대기에 힘을 실어 꿇었던 무릎을 펴야 한다. 그런데 이 펴는 동작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편이 걱정스레 말한다.


“그러다가 삐끗해 허리라도 다치면 우짤라꼬….”


지게 짐을 질 때는 지게막대기와 등, 그리고 일어설 때 무릎의 힘 배분을 절묘하게 맞춰야 한다. 이게 기술이자, 온몸의 예술이다. 바위고개 머슴의 대학원 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테크닉이나 스킬이 아니라 예술(art)에 가깝다. 피아니스트의 기교가 예술이 되어 결국 덕목으로 승화하듯, 이 몸의 기술도 나름의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다. 지난해 지게를 새로 장만한 이래 심심찮게 짐을 지며, 옛 기술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길뫼재에서 다시 돌아온 일상의 공간, 부산 집이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는 하루 종일 그칠 줄 몰랐다. 기말고사 감독 내내 강의실 유리창을 ‘후두두’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밑거름 준 뒤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 터라 반가움이 컸는데, 길뫼재에 와서 확인하니 강우량은 ‘0’. 땅이 젖어야 거름이 뿌리까지 닿을 텐데, 애가 조금 탄다. 일기예보에도 비 소식은 없다. 겨울이지만 비가 아쉬운 요즘이다. 어쩌랴,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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