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은 손과 잡힌 손
그날 이야기는, 전화 너머에서 불린 이름들이 나를 오래전 아이들 곁으로 데려가면서 시작됐다.
사흘 뒤, 나는 길병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히 미뤘다가는 또 한참 지나갈 것 같아서였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숙자의 버스 데이’ 만찬장에서 흩어졌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풍기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쟁기 이야기 등. 그렇게 전화 한 통이 또 다른 기억의 문을 열고 있었다.
내 전화번호가 그의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을 리 없으니, 모르는 번호를 보고 잠시 망설였을 게 분명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더 그렇다.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한 박자 쉬는 숨소리가 느껴졌다.
“저… 누구신데요?”
“나, 배채진이다.”
그러자 바로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 채진이가. 배 박사, 어쩐지.”
“그날 저녁 자리에서 말이야.”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풍기 손잡아 준 얘기, 그리고 니 아버지가 쟁기 장인이셨다는 얘기, 풍기 아버지가 니한테 아들을 부탁했다는 얘기…, 그게 마음을 짠하게 하더라.”
전화기 너머에서 길병이가 낮게 웃었다.
“우리 아버진 목수셨어. 이 부근이나 사천, 축동, 진주 쪽에서 쟁기 손보는 일은 아버지가 거의 다 하셨지.”
“그래서 말인데.”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은 전화로 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두 아버지 이야기로 글을 하나 써보고 싶다. 니 아버지랑 풍기 아버지 이야기. 근데 내가 쟁기를 잘 모르잖아. 쟁기 보습이 뭔데?”
“쟁기 몸체는 나무로 만들고, 거기에 붙어가, 땅을 가는 게 보습이다.”
“그것도 나무로 된 기가?”
“아니, 쇠로 된 거.”
“그걸 끼워야 소가 끌고 논도 갈고 밭도 가는 기다.”
“그럼 보습도 직접 만드셨어?”
“아니.”
“보습은 주물 공장에서 나와.”
“깨지거나 빠지면 사다가 다시 끼워 주고.”
“그게 분업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듯 수화기를 잡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쟁기의 모양이, 두 아버지의 손길과 함께 머릿속에 천천히 그려지고 있었다.
신촌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동네 출신인 영래의 회상이다. 아침마다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발소리, 뛰기도 넘어지기도 하면서 왁자지껄 떠들며 오가던 등하굣길 등, 영래의 기억 속 신촌은 늘 아이들로 북적였다.
나는 영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우리 축동면에서는 면 소재지 길평 마을이 제일 컸잖아.”
“학교 다니는 애들도 제일 많았고.”
“근데 신촌은 도대체 동네가 얼마나 컸길래 애들이 그렇게 많았노?”
영래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우리 동네 애들 많았다.”
“한 50여 가구쯤 됐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학년만 해도 열하나인가 그랬고.”
“그리 많았어?”
내가 놀라 되물었다.
“우리 학년에 열한 명이나?”
“그렇지.”
영래가 웃었다.
“그래서 길평 애들하고 공차기도 많이 했다.”
그 말에 장면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운동장 한쪽, 아니면 동네 공터. 주먹만 한 말랑말랑한 고무공 하나를 가운데 두고 길평 아이들과 신촌 아이들이 갈라섰다.
“와, 그거 안 있나.”
영래가 손으로 공 크기를 그리며 말하는 듯했다.
“그 고무공.”
“길평 애들하고 우리 신촌 애들하고 시합도 더러 했다.”
“그러니께로.”
내가 말을 받았다.
“길평이랑 신촌이 축동면에서 애들이 제일 많았다는 거네.”
“맞다.”
“여섯 명씩 갈라서 공차기 시합 붙었는데.”
“길평 애들이 조금 우세하더라고.”
“면사무소 있고 학교 있는 동네라고.”
내가 웃으며 말했다.
“길평 애들이 괜히 목에 힘 좀 줬지.”
“맞다, 맞다.”
영래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잠시 웃음이 잦아든 뒤, 내가 물었다.
“그때 공차기할 때 풍기도 낑겼나?”
영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맞다.”
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말랑말랑한 고무공.”
“그걸로 축구도 하고, ‘하루 놀이’도 했지.”
‘하루’라는 놀이가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야구 비슷한 놀이였다. 누군가 고무공을 던지면, 다른 아이가 주먹으로 공을 쳤다. 공을 치고 나면 맨손으로 공을 받아내며 1루, 2루, 3루를 돌아 점수를 냈다. 규칙은 단순했고, 웃음은 많았다.
그 놀이는 특히 동네 공터에서 자주 벌어졌다.
“하루는.”
내가 덧붙였다.
“누나들이나 여학생들이 더 많이 했던 것 같아.”
영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때는 그거 하면서 다 같이 어울려 놀았지.”
나도 문득 기억 하나를 더 보탰다.
“나도 가무작살 애들하고.”
“그 동네 하루놀이에 낑겨본 적 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은 멈췄지만, 머릿속엔 그 고무공이 또렷했다. 손에 닿으면 살짝 눌리던 감촉, 땅에 튀길 때 나는 둔탁한 소리.
“근데 말이다.”
내가 말했다.
“그때 그 고무공은, 지금은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 온라인에도 안 나온다.”
영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끼다.”
그 고무공처럼, 그 시절 신촌 아이들의 공놀이 풍경도 이제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튄다. 말랑말랑하게, 웃음과 함께.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그 그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길병이의 쟁기 이야기와 영래의 고무공 이야기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이어져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그 공은 더 이상 튀지 않지만,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굴러가고 있었다. 손바닥에 남은 감촉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로.
전화는 이미 끊겼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전화 너머에 남아 있었다. 쟁기를 고치던 아버지의 손 옆에서, 고무공을 차며 웃던 아이들이, 수화기 저편에서 한 명씩 불려 나왔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 아이들은 다시 길을 건넜고, 고개를 넘었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전화 너머에서 되살아난 아이들은 그렇게, 말없이 다음 이야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