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등하굣길

잡은 손과 잡힌 손

by 로댄힐

“길병이, 너그 동네 이름이 뭔데? 거기가 탑리 아이가?”

“맞다. 하탑이다. 근데 탑리에는 하탑만 있는 게 아니고, 하탑·중탑·상탑, 이렇게 세 군데가 있다.”

이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이미 머릿속에 지도를 한 장 펼치고 있었다. 기억은 늘 말보다 먼저 지형을 찾는다.

<탑리 : 하탑·중탑·상탑>

길병이는 마을을 위아래로 짚듯 설명했다.

“조금 올라가면 중간에 중탑이 있고, 그 위, 정도가 사는 동네가 상탑이다. 우리 동네 하탑에는 인중이 염소 농장도 있고.”


듣고 보니 하탑이 하나로 뭉뚱그려 부를 수 있는 마을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다시 갈라졌다. 중탑의 남쪽에는 땅이 움푹 파인 물통골이 있었고, 평바구 아래 골짜기에는 이깨골이 있었다. 하탑의 동쪽에는 퇴미가 있었는데, 병무네 집과 윤식이네 집이 그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윤식이는 벌써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겼다.


“그 퇴미 말이다.”

길병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은 남해고속도로로 다 바뀌었다. 물통골도 완전히 없어졌고.”


말이 끝나자, 내 머릿속 지도 한 귀퉁이가 지워졌다. 고속도로가 들어서고, 큰 태풍이 한 번 지나간 뒤에는 골짜기마다 집이 버티질 못했다. 물에 치여 떠내려간 집도 있었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졌다. 지금은 길병이가 사는 이깨골에 인중이 염소 목장을 포함해 열댓 가구 남짓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신촌>


“그러면 풍기가 신촌에 사니까.”

내가 말을 이었다.

“너거 집 앞을 지나서 같이 학교를 다녔다는 거네.”

“맞다.”

“우리 집 앞길로 안 오면 학교 갈 길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손잡고 데리고 다닌 거고.”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길이 없었다는 말은, 선택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풍기 아버지랑 네 아버지랑도 서로 잘 아셨겠네?”

“그럼.”

“고개만 넘으면 바로인데, 다 알지.”


나는 다시 지형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리고 상탑 그 위가 신촌이고?”

“아니, 그건 틀리지.”

“왜냐하면 신촌은 골 자체가 달라.”


그는 손으로 허공에 선을 긋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인중이 집 있는 데서 길이 안 있더나. 그 길 고개 하나만 넘으면 신촌이다.”


“풍기가 등교한다고 신촌 아이들과 고개 넘어오는 그림이 그려지네”

“우리 집 앞으로 다녔지.”

길병이는 단호했다.

“거기 아니면 길이 없었어.”


그 말은 길병이 개인의 기억이자, 그 시절 마을의 구조였다. 골짜기는 달라도 길은 하나였고, 아이들은 그 길로 모여 학교로 향했다.

<삼거리>


“거기 아니면 길이 없었어.”


이 말 마디에 그 시절 아침 풍경이 겹쳐졌다. 신촌에서 내려오는 아이들은 책보를 멘 채 고개를 넘고, 하탑 삼거리에서 숨을 고른 뒤 다시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마을이 나뉘어 있어도 길은 하나였고, 그 길은 아이들을 묶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아이들이 학교로 가는 방향으로 언제나 열려 있었다.


1950년대 길병이 집 앞 삼거리는 지금처럼 아스팔트가 반듯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길의 기운이 모이는 자리였을 것이다.


아침이면 신촌 쪽에서 풍기가 작은 몸에 책보를 메고 먼저 삼거리에 도착했을 것이다. 잠시 뒤, 바로 그 삼거리에 사는 길병이가 나타난다. 또래들보다 한참 큰 키의 길병이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둘은 삼거리 한쪽에서 자연스럽게 합쳐졌다. 약속은 없었지만 늘 그랬다. 손을 잡은 길병이의 발걸음은 풍기 보폭에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


<도시락 냄새>


“그런데,”

길병이의 회상이다.

“풍기 손잡고 신촌 애들과 학교 댕길 때 신촌 아이들 등하굣길에는 도시락 냄새가 안 났다.”

“그거 무신 말이고?”


길병이가 기억하는 신촌 아이들의 점심은, 밥이 아니라 요령이었다. 가을이 되면 고구마를 캤다. 집에서 한두 개 슬쩍 챙겨 나오는 게 전부였다. 도시락을 싸 올 형편이 안 되니, 생고구마를 바지 포켓에 넣고 학교로 향했다.


그걸 학교까지 지니고 오는 게 아니었다. 남 눈에 띄지 않게, 자기만 아는 장소가 필요했다. 학교 오는 길, 풀잎이 무성한 술 속에 고구마를 슬쩍 숨겨 두었다. 표시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했다. 어느 풀, 어느 돌 옆인지를.


오후가 되면 배가 먼저 신호를 보냈다. 두 시간쯤 수업을 더 하고 나면, 아이들 속은 텅 비었다.

그때 하굣길이 시작됐다.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먼저 풀숲으로 향했다. 숨겨 둔 고구마를 찾는 게 급했다.

“찾아서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길병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돌 위에다가 얹어 놓고 손바닥으로 탁, 때리는 기라.”


돌 위에다가 생고구마를 놓고 손바닥으로 “탁!”하고 치면, 단단한 껍질에 금이 갔다는 거라고 했다. 갈라진 틈을 따라 손톱으로 껍질을 살살 벗겼다. 불도 없고, 익힐 시간도 없었다. 그냥 생으로 씹었다.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 맛이 났지만, 그게 점심이었다.


“맞아, 맞아.”

내가 맞장구를 크게 치지 길병이는 더 신이 났다.

“그렇게 묵어가면서 집에 가는 거지.”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책보는 등에 메고, 한 손엔 고구마를 쥐고, 껍질은 길가에 떨어뜨리면서 걷는 아이들. 누가 봐도 배고픈 행색이었지만, 그들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들키지 않고, 버텨내는 방식. 즉 등하굣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버티는 법을 배우는 첫 번째 학교였다.


“그런 에피소드들이 참 많다.”

길병이가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울컥했다.

“아이고, 길병이 자기가 이야기를 이렇게 구수하게, 재밌게 하는 줄은 몰랐다.”

길병이는 조금 으쓱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상세히 안다. 그런 건 인중이도 모른다.”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며칠 후 밤에 다시 전화해도 되나?”

“언제든지 해도 괜찮다.”




신촌 아이들의 생고구마 이야기는, 배고팠던 시절을 웃음으로 건너오는 다리 같았다. 웃기지만 가볍지 않고, 사소하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 그렇게 길병이는 신촌 아이들의 등하굣길을 아직도 또렷이 품고 있었다.


나의 회상이다.


그때 우리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배가 먼저 수업을 끝냈고, 아이들 눈은 칠판보다 창밖 길가로 더 자주 갔다.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아이들, 지금 생각하니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런 아이들 사정,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 축동초등학교, 학교 뒤에, 그때 발걸음으로는 제법 높은 그러나 지금 발걸음으로는 낮은 솔동산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겨울이 아닐 때는 거기로 우르르 몰려가 둘러앉아서는 벤또를 까먹은 기억이 지금 되살아 난다.


그때 교실에는 저학년 때 책걸상이 없었고 교탁을 몇 개 놓고는 빙 둘러앉아 공부했는데 그 모양은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분단학습이었다. 학년이 올랐을 때 어느 학년 때부터는 책걸상이 있는 교실에서 공부했다.


아무튼, 겨울에는 교실 화목 난로 위에 벤또를 얹어 데운 후 더불어 까먹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도 책가방과 식구가 적지 않았는데도 우리 어머니, 어떻게든 벤또를 싸주셨다.


그때 배고프지 않은 아이 어른 있었을까? 먹을 입(食口)은 많은데 양식은 없고…, 그런 중에도 초딩 때 벤또 밥 싸준 울 어머니가 새삼 고맙다. 그래도 그 당시 하루 세 끼 밥 다 챙겨 먹은 집, 축동초등학교 아이들 집 중에서 몇 집이나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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