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은 손과 잡힌 손
“그때 말이야.”
길병이가 말을 꺼냈다.
“너희 집 아래에 성냥간 하나 있었잖아.”
“그래, 그 대장간.”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걸 우리는 성냥간이라고 했잖아. 거기서 쟁기랑 관련된 부품을 제작했어.”
길병이는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쟁기 몸체는 ‘ㅅ자’처럼 생겼잖아.”
“그래서?”
“그거 윗부분은 소가 끄는 부분이고, 아래쪽 보습이 달린 부분, 그건 논을 가는 부분이잖아. 아래위 그 두 부분을 이어주는 쇠가 있는데.”
“즉 쇠막대기가 있는데, 그걸 ‘야마’라고 했어. 일본 말이지.”
“야마?”
“그건 톱니바퀴처럼 각을 잡아서 조절하는 거야. 깊이도 맞추고 방향도 맞추고.”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잘 모르긴 하지만 그걸 그 성냥간에서 했다는 거지?”
“잘 만들었어.”
길병이는 이야기를 꺼낼 때, 말을 천천히 고르다가 한 번에 풀어냈다. 손으로 허공에 뭔가를 잡아 돌리는 시늉을 하는 것 같았다.
“‘야마’라 카는 게 말이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볼트나 너트를 다 큰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었거든, 하지만 성냥간 같은 데서는 철근을 잘라서, 손으로 잡고 돌려가며 그 홈을 파는 기라.”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아, ‘나사산’ 말이지. 볼트에 튀어나온 거, 너트 안에 파여 있는 거.”
길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거다.”
그는 곧바로 쟁기 이야기로 넘어갔다. 야마는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라, 쟁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장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쟁기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나무로 연결했는데, 그게 제대로 쟁기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니까 조절이 안 되고, 금세 헐거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인자 금속으로 바뀐 기라. 긴 볼트 봉을 세로로 박아놓고, 위에서 너트를 돌려 조이거나 풀어주면 쟁기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면서 조절이 되는 거야.”
“그걸 일본말로 ‘야마’라 카더라.”
“그러면 내가 본 쟁기 그림이 딱 그거네.”
길병이는 말끝을 단단히 눌렀다.
“야마가 중심이다.”
“그걸 돌려서 낮추면 얕게 갈고, 솟수면 즉 높이면 깊게 가는 기라.”
“중심을 잡아주는 거지.”
그 말은 쟁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왠지 사람 사는 이치 같기도 했다. 중심이 있어야 깊이도, 얕음도 조절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 볼트 봉은 성냥간에서 만들고, 아버지는 그걸로 쟁기를 손질하고 새로 만들고.”
“이번에 네 덕분에 내가 쟁기 공부를 다 한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세상에 누가 쟁기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하겠노.”
길병이는 피식 웃었다.
“옛날에는 전부 쟁기로 농사지었다.”
“맞아. 쟁기질 잘하면, 그때는 농사 박사였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야마는 성냥간에서 만들었다 치고, 보습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보습은 그리 안 한다.”
“그건 주물 공장에서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를 그는 아주 또박또박 설명했다. 보습은 무쇠여야 했는데 그래야 닳지 않고 휘지 않았다. 논을 갈다 보면 큰 돌을 만나기도 하고, 짚이나 ‘벼 끌티’ 즉 벼를 베고 남은 뿌리를 힘껏 자르면서 쟁기가 진행해야 하는데, 무른 쇠나 철판으로 만든 보습은 그리하지 못하고 금세 휘거나 끼어버린다는 것이다.
“주물은 말이다.”
“모래하고 재 섞어서 ‘가다’를 만들고, 거기다 쇳물을 붓는 기라.”
“가마솥 만드는 솥 공장 생각하면 된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보습은 그려서 철판을 잘라 만드는 게 아니다.”
“쇳물을 부어서 형성해야 한다.”
사천 근처에는 그런 주물 공장이 없어서, 경북이나 전라도 쪽에서 보습을 사 왔다는 기억도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쟁기 하나에 들어간 손길과 공력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야, 듣고 보니.”
내가 감탄하듯 말했다.
“이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길병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엔 아버지 어깨너머로 보았을 쇠와 나무, 불과 손의 기억이 조용히 남아 있는 듯했다.
길병이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너거 집 아래의 강대범이 집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었지. 성냥쟁이 그분도 강 씨였나…, 하여튼.”
“맞다. 우리 집 아래 여무 다리 네거리 못 미쳐 있었다.”
기억이 이어졌다.
“우리 아버지가 가서 말하면,”
길병이가 손으로 무언가를 맞추는 듯한 제스처를 떠올리며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하면, 딱 맞게 만들어 줬어.”
“아하….”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래서 거기서 중요한 부품들을 조달했지.”
“그랬구나.”
내가 천천히 말했다.
“쟁기는 네 아버지가 만들고, 보습은 주물 공장에서 오고, 그 중간을 잇는 ‘야마’라는 거 그건 성냥간에서 하고….”
“그랬지.”
순간, 머릿속에서 풍경이 이어졌다.
그 옛날 유년 시절의 우리 집에서 사천읍 쪽 저기 아래 여무 다리 사거리 못 미친 곳의 성냥간…, 거기서 쇠를 두드리던 소리, 멀리서 봐도 보이던 불꽃 튀던 순간, 겨울에 벼려 달라고 부탁한 괭이, 호미 찾으러 들어가면 묘하게 따뜻했던 공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내 오늘, 길병이한테 전화해가꼬 내가 알고 싶은 걸 다 알아간다. 우리 집 밑 성냥간도 나한테는 참 추억 많은 데거든.”
“지나가면서 봤지?”
“그럼. 일하는 거.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길병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분, 오래는 못 살았을 거야. 성냥간 하던 사람.”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근데 얼굴은 남아 있다. 기억 속에.”
전화는 끊겼지만, 머릿속에서는 쟁기와 볼트 봉, 그리고 여무 다리 네거리 못 미친 곳에 있던 성냥간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쟁기를 만드는 장인의 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던 이름 모를 성냥간의 불꽃까지. 그 시절의 논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갈아졌다.
아래는 나의 길뫼철학 제6권 『와룡산 수채화』, <지리산 천왕봉-성장 백색화>에 수록된 ’옛집과 대장간‘ 일부이다.
집을 나서서 읍으로 갈 때 처음 만나는 지점이 커브가 심한 모랭이길이다. 오른편 얍 산의 나무들은 무성할 땐 짙었고 그래서 더 어두웠다. 게다가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동원되어 흙을 파낸 곳이기 때문에 홈이 크게 나 있는 곳이었고 흙을 파서 던진다는 여우 목격담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입에 회자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모랭이를 돌면 읍이 보이고 비행장도 보이면서 밝아졌다. 숲을 벗어나 들판이 나타나기도 했고 또 멀리서나마 읍내의 전깃불이 간접으로 어둠을 밝혔기 때문이다.
아무튼 읍으로 갈 때 그 모랭이길을 막 돌면 집이 두서너 채 나타나고 그중에는 성냥간도 있었다.
성냥간, 그때 우리가 성냥간이라 부른 대장간은 어릴 때 자주 출입하던 곳이었다. 시골에서 대개 어른들이 성냥간을 드나들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내가 자주 드나드는 심부름을 한 편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성냥간을 드나든 집이 우리 집 말고도 다른 집들도 있다.
그 성냥간에 가면 벌겋게 달구어진 쇠를 장정 둘이서 다루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은 큰 망치를, 달구어진 쇠를 잡은 사람은 작은 망치를 들었는데 작은 망치를 든 사람이 주인이며 말 그대로 철장(鐵匠) 즉 ’대장장이‘였다. 그분은 키가 작았었고 머리는 짧게 깎았던 것 같다.
그 성냥간이 생각난다. 오가는 길에 쳐다보면 쇠를 달구는 아궁이가 벌겋던,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나던 그 성냥간….
그때 그 성냥간을 지나가면 곧바로 길호 강과 연이은 축동사거리(여무 다리 사거리)가 나왔다. 여기서 직진하면 사천읍이고 왼편으로 가면 동치라는 마을에, 또 오른편으로 가면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아버지가 근무하신 면사무소와 그리고 지서가 있는 길평리에 닿았다.
지금 농촌 마을에 성냥간이 그 어디에도 없다. 지금은 농사짓는 방식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기로 호미나 괭이를 벼를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성냥간이 생각난다. 지금은 우리 집도 없어졌고 그 성냥간도 없어졌다. 전부 골프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프장은 많은 것을 삼켰다. 우리 집도, 대장간도 꿈도 다 삼켰다.
<워낭소리>
그 옛날 쟁기로 논밭 갈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아버지는 벌써 소여물을 주고 계신다. 밭갈이하는 날이면 더욱 일찍 일어나셔서 소를 달래고 준비하시는 거다. 아버지는 지게에 쟁기를 지고, 한 손으로는 소고삐를 잡고 천천히 걸어가신다. 밭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쟁기를 내려놓고 소한테 쟁기를 연결하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소는 마치 오늘 할 일을 알고 있는 듯 얌전히 서서 아버지 손길을 기다리고 서 있다. 쟁기가 소에게 연결되면 본격적인 밭갈이가 시작된다.
"이랴, 이랴!" 아버지 구령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진다. 소는 아버지 목소리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쟁기는 단단한 땅을 갈아엎으며 흙을 뒤집어 올린다. 소가 딴전 피우거나 게을러질 때면 "워 워!" 하며 달래시거나 이까리로 가볍게 등을 두드려 주의를 주신다. 이까리, 소고삐의 사투리.
아버지와 소, 그리고 쟁기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농요이다. 갈아엎어진 흙에서는 촉촉한 흙냄새가 피어올랐고, 그 뒤로는 하얀 물새들이 벌레 찾아 모여든다.
쟁기질, 그건 그냥 기술이 아니다. 예전에는 젊은이가 혼인할 자격이 있는지, 쟁기질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로 판단했다고 한다. 쟁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모르는 머슴은 다른 일을 아무리 잘해도 새경을 다 못 받았다. 그만큼 쟁기질은 한 사람의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었던 거다.
그래서 쟁기는 단순한 농기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농업은 우리 삶의 근본이고, 쟁기는 그 시작을 알리는 도구였다. 쟁기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생명을 키워내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랴, 이랴, 워, 워!" “좌라, 좌라, 워, 워!” 소리와 함께 펼쳐졌던 그 옛날 풍경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기계화된 현대 농업 속에서도 쟁기가 대변하는 농업의 정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는 여전히 소중한 가르침이다.
아, 들판의 소 구령 소리와 흙냄새 그리고 워낭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