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새우젓 장사

잡은 손과 잡힌 손

by 로댄힐

그날 이야기는, 내가 품고 있던 작은 의문에서 시작됐다. 풍기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길래, 그 바쁜 시절에 아들을 두고 남의 집 아들한테까지 부탁했을까 하는 거였다. 그런데 마침 풍기가 나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김에 이것부터 물어봤다.


<부탁한 이유>


“풍기 자기 아버지가 말이다.”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들을 그리 부탁했다는 게, 나는 그게 참 궁금했어. 그때 아버지들, 식솔은 많고 먹고사는 일은 바쁘고, 애 하나하나 챙길 정신도 없었잖아. 애가 뭐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딸도 아니고…, 그런데도 말이다.”

풍기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 잠깐만.”

“나, 그때 키가 너무 아래였잖아.”

아래?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니 그때 참 작았지.”

풍기는 잠시 생각을 더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 사회생활을 일본에서 하셨어. 일본 가서 고생 고생하면서 돈 좀 모으고, 그걸로 신촌에 들어오셨다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를 낳았는데, 초등학교 때 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작았나.”

그는 웃었지만, 말끝에는 아버지의 시선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친구들한테 치이거나 당할까 봐 염려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길병이에게 부탁을 한 거고.”

나는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랬구나.”

“또 말이다.”

“울 아버지하고 길병이 아버지하고 사는 데가 등 너머 저 너머라, 고개만 넘으면 만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그랬다. 연배도 얼추 비슷했고, 그러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온 기라.”

나는 그 말이 더 마음에 남았다. 부탁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쌓인 신뢰 위에서 나왔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말 안 하고 있었는데 길병이가 그날 술 묵고 불쑥 꺼낸기라.”

“술 한잔하면 그런 게 좋지.”

내가 맞장구를 쳤다.

“맞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나서 추억 이야기하는 거, 그게 잘하는 기다. 특히 술 한잔할 때 말이다.”

“그런데 니는 와 술 못 묵노?

풍기가 불쑥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다니던 이야기, 키 작았던 이야기, 부탁했다는 이야기까지도 이제는 모두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세월이 되었다. 그때는 생존이 먼저였고, 지금은 기억이 남았다. 풍기 아버지의 그 한 마디 부탁은, 그렇게 세월을 건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손을 잡으라는 말이 아니라, 서로를 맡기고 믿으라는 말로.


<새우젓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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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다닌 그 얘기는, 풍기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그 시절을 건너왔는지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래, 그 얘기 말이다. 나는 그게 참 신선하고 재밌더라. 그러면 내가 하나 더 물어보자. 풍기 아버지가 일본에서 돈벌이하셨다, 그 말이지?”

풍기가 바로 대답했다.

“하모, 하모. 왜정 시대 아이가.”

“그래? 어디에 계셨는데? 우리 부모님은 교오토에 계셨거든. 니 아버지는?”

“대판.”

“아, 대판, 오사카에 계시다가 오셨구나.”

그 말 한 마디에, 풍기 아버지가 겪었을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타국에서의 노동, 모은 돈을 쥐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그리고 다시 시작된 생계….

길병이가 회상하던 풍기 아버지의 모습도, 영래나 다른 친구들이 기억하던 인상도 모두 거기서 이어졌다. 다들 한결같이 말하던 건, 생활력이 대단한 분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말이다.”

“전쟁 끝나고 나서, 나라 전체가 다 가난했다 아이가.”

“그렇지.”

풍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길병이와 영래가, 니 아부지 새우젓 장사하신 거 기억난다더라. 그거 맞나? 기억나나? 지난번에 내가 물었을 때 너는, 아부지 농사지으셨다 캤거든.”

그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농사도 맞다. 새우젓 장사도 하셨어.”

그제야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팔러 가셨는데? 함양이나 산청처럼 먼 데로?”

“아니다. 하동으로 가셨어.”

“지게 지고서?”

“아니 버스로.”

“아, 하동으로.”




“그런데, 그 구호 구해창 아래, 하구 마을 안 있나?”

“응, 하구 마을 있지. 거기에 새우 배가 들어왔지.”

“아, 거기에 새우 배가 닿았구나.”

“하모.”

하모,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길이 있었다. 일본 오사카에서 신촌까지, 그리고 신촌에서 하동 하구 마을까지 이어지는 길. 새우젓 통을 지고 또 버스 타고 하동으로 오가던 아버지의 발걸음 위에, 풍기의 어린 시절이 놓여 있었다.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몸 되는 대로 움직이며 하루를 이어간 삶, 그 생활력 위에서, 키 작은 아들을 걱정해 다른 집 아들에게 손을 맡길 줄 알았던 판단도 자연스레 이해되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 와중에 풍기 아버지는 아무튼 일본에서 고생해가꼬, 돈을 좀 모아 오셨을 거 아이가. 그 돈으로 뭐, 농토를 어떻게 했을 것이고.”

풍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받았다.

“하모.”

짧았지만 단단한 대답이었다.

“농토를 샀지.”

기억을 더듬다 보면, 한 장면이 또 다른 장면을 끌고 나오는 법이다.

“그러면 말이다. 아버지 따라서, 그 구해창 아래 하구 마을에 배 들어올 때 가 본 적 있나?”

“아, 있지. 우리 집안이 하구 마을에 안 있나.”

그제야 퍼즐 하나가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아, 그랬나. 나도 초등학생 때, 울 아버지 친구가 하구 마을에 살아서 한두 번 따라가 봤다. 그 앞에 왜 그거, 강지 섬 있잖아. 거기서 놀았던 기억도 나고.”

잠시 그 풍경을 함께 떠올린 뒤, 내가 다시 물었다.

“근데 그러면, 아버지가 장사를 오래 하신 건 아니지?”

“하모. 조금 했지.아마 한… 5년쯤?”

“아, 그 정도.”

“그라다가 말이다. 통일벼가 나왔잖아. 그 통일벼.”

“맞다. 그 통일벼, 나도 기억난다.”

“그게 말이다. 재래종 심을 때보다 수확이 억수로 더 나왔거든.”

“맞다. 맞다.”

“그래가꼬 집안이 좀 넉넉해졌지.”

나는 다시 궁금증을 던졌다.

“그럼, 하구에 새우젓 받으러 갔을 때, 뭐 재밌는 에피소드 같은 거는 없고?”

“워낙 어릴 때라 별로 기억나는 건 없다. 그냥 버스 타고, 한 5년 동안 하동까지 오가며 장사하셨다.”

“음, 신촌에서 하구 마을까지면, 웬만하면 걸어 다녔겠다. 제법 먼 길인데.”

“그렇지. 걸어서 다녔고말고.”

나는 또 하나를 떠올렸다.

“근데 말이다. 길병이가 그러는데 그 구해창 하구에 조개도 많이 났다카던데?”

“그렇지. 그거 갱조개 말하는 거 아이가.”

“그래, 갱조개. 우리 동네 사람들도 거기 잡으러 간 거 기억난다. 자연적으로 나는 데는 우리나라에서는 거기뿐일 걸로 안다.”

“그렇나?”

풍기가 되묻듯 말했다.

이쯤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 말이다. 어린 시절 그때를 포인트로 잡고 아버지 이야기 들은 것만 해도, 글감은 충분하다.”




풍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가 이거다. 열심히 하셨거든. 그래서 남들보다 확 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림이 좀 나아졌지.”

그는 숫자를 들어 설명했다.

“논 열다섯 마지기에, 일반 벼 심었으면 삼십 섬 나올까 말까 했다. 근데 통일벼로 바꾸고 나니까, 예순 섬, 일흔 섬, 곱절로 나오더라. 국가에서 매상도 다 해주고 그라니까 생활 수준이 좀 올라갔지.”

“그래? 아무튼, 그게 확실한 전환점이었네.”

“그래.”

풍기의 대답은 짧았지만, 단단했다.

그 말 뒤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시작해 하구 마을을 거쳐 신촌 논으로 이어진 한 아버지의 길이 고스란히 겹쳐 있었다. 새우젓 장사와 통일벼, 걸어서 오가던 길과 버스 창밖의 풍경들, 그 모든 것이, 아들의 기억 속에서는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라는 한 문장으로 남아 있었다.


<강주섬>


강주 섬은 지금은 사라진 섬이다.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와 사천읍 중선리 사이, 사천강과 중선포 천이 만나는 하구에 있었다. 사람이 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작은 섬이었다.

이 섬은 강지 섬이라고도 불렸다. 이름 뜻은 어렵지 않다. ‘강 하구에 있는 섬’이라는 말 그대로 붙은 이름이다. 옛 기록에는 강주포, 강지도와 같은 이름으로도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름을 진주의 옛 이름인 강주(康州)에서 따왔다고도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주시 예하리 정촌의 강주 연못 이름과 같아서 홍수 때 떠내려온 섬이라는 전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정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강주 섬은 작았지만, 그냥 비어 있는 섬은 아니었다. 굴 양식도 했고,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동집’이라는 당집도 있었다. 강지 섬엔 무엇보다 백일홍 나무 즉 배롱나무가 많았다. 자생지라고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축동면 탑리 화당 산에서 불을 피우면 강지 섬에서도 연기가 보였다”라는 말도 전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섬을 볼 수 없다. 사천 비행장 활주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데 위험하다고 판단해 군에서 섬을 폭파해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주 섬은 지금 지도에도, 강물 위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앞에서 놀았던 기억, 조개 잡고 물장구치던 추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섬이다.




결국 풍기 아버지와 길병이 아버지,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말로 책임을 말하지 않고 몸으로 책임을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버텨야 할 하루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자식 앞에서는 늘 한 발 앞에 서 있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대신 포기하지 않는 법을 남겼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그들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가장 무거운 선택이었다.

그렇게 건너온 시간이 쌓여,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삶을 이야기로 불러낼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서야 알게 된 건,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모두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하루를 끝까지 밀어내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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