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은 손과 잡힌 손
12월 12일, 금곡의 밤 이후 2026년 새해 1월 중순, 그 열세 명이 다시 모였다. 금곡에서는 동현이의 전화를 받고 얼떨결에 모였지만, 이번에는 탑리에 사는 세 친구, 길병이와 인중이와 정도 그리고 풍기 등 네 명이 의논한 끝에 자리를 마련했다. 금곡에서 못다 나눈 이야기와, 다 나누지 못한 정을 더 나누기 위해서였다.
날은 차가웠지만 방 안에는 오래 묵은 온기가 있었다. 축동 초등 28회, 이름만 불러도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 길병, 풍기, 인중, 정도, 영래, 대식, 삼도, 숙자, 정련, 금자, 동현, 봉규, 그리고 나였다.
탑리의 세 친구, 정도는 처음부터 고향인 상탑을 지켜왔고, 길병이는 사천읍에서 한 10년 사업하다가 하탑으로 돌아와, 고향 하탑을, 누가 떼어내 메고 토낄까봐 지키고 있다.
“그때 내 잘 나갔지. 끗발 날렸지!”
길병이가 말하고는 “하하!” 웃었다.
나와 더불어 지미창 출신인 인중이는, 당시 진주사천의료보험 지사장을 끝으로 하탑의 선산에서 80여 마리 염소 정예 부대를 이끌고 사령관 노릇을 하고 있다.
이 세 친구는 초딩 때 반에서 제일 키가 컸는데, 긴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그건 여전히 그랬다. 누군가는 머리가 희어졌고, 누군가는 허리가 먼저 굽었지만, 앉아 있는 모습만은 여전히 같은 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술잔이 한 번 돌고 두 번 도니 말 수가 늘었다.
“야, 우리 이렇게 다시 모이니까 참 희한하다.”
“좋다.”
“그러게, 살아 있으니까 이런 자리도 있는 거지.”
“우리가 살면 올매나 더 살끼고, 얼굴 좀 보면서 살자.”
툭툭 던지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남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지나온 세월로 흘렀다. 회비 못 내 벌서던 이야기, 논 갈던 이야기, 공장 다니던 이야기, 사업 실패 이야기, 자식 키우느라 허리 휘던 이야기, 잘된 자식과 마음 아픈 자식 이야기…. 인생사 그런저런 이야기들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금곡 영천강 변에서 하룻밤 나눈 담론을 되짚어 본다.
그 시절 신촌 마을도 다른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은 늘 빠듯했고, 밥이 끊기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학교는 가고 싶다고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영래의 기억 속 신촌은 ‘배고픔’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리가 그때 거의 다 못 살았잖아.”
“우리 마을 또래가 열한 명이었는데, 그중에 중학교 간 애가 다섯 명밖에 안 됐다.”
영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속에는 오래 묵은 허기가 배어 있었다.
“우리 신촌이 여자애까지 합하면 열한 명이었는데, 벌써 다 가버링기라. 영래, 나, 서울의 종세, 진주 희갑이, 이렇게 네 명만 안 남았나. 일곱은 다 마흔 전후로 주소를 제 세상으로 옮겨 가버렸어.”
풍기가 전화에서 했던 회상이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면 길은 단순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풀을 베고, 품을 팔았다. 해가 지면 일은 끝났지만, 밤은 길었다. 그 긴 밤에 사람들이 모였다. 신문지를 찢어 봉초 담배를 말아 피우고, 독한 왜소주를 돌렸다. 안주는 없었다. 김치 한 가닥이면 호사였다.
“그렇게 살면 말이다. 자기 명에 살았겠나.”
영래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말은 체념이라기보다 이유를 짚는 말처럼 들렸다. 배고픔 위에 술이 얹히고, 밤샘 노름이 이어졌다. 두 장뻬이 노름이 밤을 채웠고, 몸은 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내가 묻자,
“자포자기!”
대식이의 한 마디였다.
그날 밤, 넷이서 한 방에 누워 나눈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 시절로 흘렀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누군가 말을 꺼내면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는 식이었다.
“사다골도 그랬다.”
봉규가 말했고,
“지미창도 마찬가지다.”
내가 받았다.
“가무작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식이가 웃듯 말했다.
골짜기는 달라도 이야기는 하나였다.
“쉰 넘긴 사람 거의 없지 않나?”
“못 넘겼지.”
영래가 바로 답했다.
“마흔 줄에 간 사람도 많았다. 친구 중에도.”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았던 건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생활력을 놓지 않고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 낮에는 악착같이 일하고, 밤에는 몸을 아꼈다. 그 차이가 훗날 생과 사의 간격이 되었다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버틴 사람은 결국 버텼다.”
“악착같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이 길게 이어지던 1950~60년대 농촌은 어디나 비슷했다. 그래서 신촌, 사다골, 가무작살, 지미창 이야기는 특정 마을의 기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어떤 이는 끝까지 버텼고, 어떤 이는 중간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이렇게 말이 되어 남았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아직 전쟁의 먼지를 몸에 묻힌 채 살고 있었다. 쟁기 잡은 손, 지게 진 어깨는 그냥 굳어진 게 아니었다. 삶의 멍에를 지고 새벽부터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들의 멍에가 가벼웠던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 그 이름을 잠시 입에 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길병의 아버지는 땅을 다스렸고, 풍기의 아버지는 새우젓 지게를 졌다. 일의 모양은 달라도 짊어진 멍에는 같았다.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멍에는 고통이기 이전에 책임이었고, 책임은 곧 생존이었다.
“그때는 왜 그리 악착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안하모 몬살아 남았지.”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잔을 내려놓았다. 웃음과 한숨이 섞인 밤이었다.
현숙의 노래가 누군가의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왔다.
내 인생에 박수, 내 인생에 박수
굽이굽이 내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노래 가사가 우리 얼굴 위에 겹쳐졌다. 인생 고개를 몇 번 넘었는지, 눈물 없이 말할 수 없는 밤을 얼마나 지났는지, 다들 아는 표정이었다. 청춘은 언제 피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갔고, 우리는 달빛처럼 별빛처럼 잠시 머물다 여기까지 와 있었다.
저 달이 노숙했던 지나온 세월…,
내 청춘은 꽃피었다 지는 줄 몰랐다.
“그래도 말이다.”
길병이가 잔을 들었다.
“우리, 잘 살았다 아이가.”
“하모, 이만하면 됐다.”
정도가 받았다.
그 말은 자랑도 체념도 아니었다. 굽이굽이 지나온 인생을 스스로 인정하는 말이었다. 누가 더 잘났고 못났고를 따질 나이는 이미 넘겼다. 각자 맡은 몫의 삶을 끝까지 붙들고 여기까지 온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우리는 박수를 치지는 않았다. 대신 잔을 부딪치고, 어깨를 두드리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박수였다.
아니, 박수를 치자고 했다.
박수를 쳤다.
먼저 자기 인생에, 그리고 백전노장 28회 친구들 인생에.
산전수전 다 겪고도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 웃을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이 우리에게 준 답 같았다.
아무튼, “저 달이 노숙했던 지나온 세월”을 “눈물 없이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내 청춘이 꽃피었다가 지는 줄”도 모르긴 했다마는, 그래도 우리, “내 인생에 박수”를, 친구여, “너 인생에도 박수”를 보낼 만하게 우리 살아오지 않았는가. 돌아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