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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Nov 30. 2017

무딤이 들판, 섬진강 하늘의 솜뭉치 구름

지난가을의 수채화 그 셋-사람, 나성 사람

https://youtu.be/XxOAubuJ-vM


기다림-하동 시외버스 차부


요새 터미널을 차부(車部)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은, 터미널이라는 이름보다 차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내게 있어선 그렇다. ‘차부’라고 한들, ‘터미널’이라고 한들 용어가 지칭하는 그 지점의 본질이 달라지겠는가만 차부가 훨씬 더 나의 아날로그적 정서에 맞아 보인다.

차부 말하자면 터미널, 차를 탄 사람에게는 떠나거나 도착하는 곳이지만 마중 나온 사람에게는 기다리는 곳이다. 나 또한 이 차부를 더러 이용했다. 이 차부에 내리기도 했고 이 차부에서 출발하기도, 기다리기도 했다. 악양 땅과 인연을 맺은 초기에 난 이 차부를 더러 이용했다. 하지만 내리거나 탈 때마다 기분이 그리 상쾌하진 않았다. 너무 협소했고 너저분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새로 신축한답시고 차부를 임시로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곳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너저분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새로 짓는 터미널 건물의 이용 편의성을 생각하면 감수해야 할 불편이었다. 2년 여 후인 2008년 7월 16일 드디어 개통됐다. 그런데 이것 봐라, 이럴 수가!


개통 당시 하동 지역신문의 기사다 : “새 건물로 신축 준공해 개통한 하동읍 시외버스터미널 건물,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이 드디어 개통됐다. 개통 첫날, 반가워하며 즐겨야 할 군민과 이용객 및 버스기사들의 기분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버스승강장은 노면이 제대로 고르지 않아 빗물이 고여 있고 승강장 마감 부분도 엉망진창이다.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시외버스터미널 승강장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동의 관문인 시외버스터미널이 이렇게 정비가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개통한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스럽다. 그리고 관계기관에서 모든 면에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이 건물 준공검사를 해 준 공무원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현직에서 물러난 후 악양에 머무는 일이 더 많아진 요즈음엔 시외버스를 이 차부에서 타고 내리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신 마중 나와서 기다릴 일은 가끔 생겼다. 볼일이 있어 혼자 부산 나들이를 하는 편을 마중 나와 기다리는 게 대부분이고 버스로 오는 지인의 마중 차 나와 기다리는 게 나머지였다.


하지만, 이 차부에는 기다릴 곳이 없다. 대합실도 어둡고 비좁으며 승용차를 주차시킬 곳도 없다. 그래서 터미널 맞은편 길가에 틈이 생기면 거기에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다릴 때의 잔잔한 설렘은 기다리는 불편을 다 희석시켜 주고도 남는다.


반가운 분의 악양 방문 일정이 잡힌 날이다. 편과 둘이서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갔다. 터미널에는 내 차를 정지시켜 기다릴 곳이 없기 때문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차를 멀찌감치 하동읍에 못 미친 곳에 세운 후, 타고 있는 버스가 어디쯤 왔는지 짐작하려고 두어 번 전화했다. 하동읍에 가까이 온 것이 확인되면 내 차를 터미널 앞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다. 마지막 인 후 터미널로 갔다.


드디어 버스가 온다. 편이 잽싸게 나간다. 나는 핸들을 잡고 있어야 하니 나가지 못하고 편이 나간 것이다. 임정아 선생님 내외분이 오셨다. 나성에서 서울,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진주, 진주에서 시외버스로 하동까지 온 것이다. 또 악양까지 갈 거고. 먼, 긴 여정이다. 기쁜 기다림,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동 시외버스터미널, 불편한 이 차부가 새로 지은 KTX 하동 역사 인근으로 이전될 거라고 한다. 하동군은 현 시외버스터미널의 불편을 개선하고자 복합교통 타운 조성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되면 내년 8월부터 버스터미널이 본격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내리고 탈 때마다, 마중할 사람을 기다릴 때마다 가졌던 터미널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막상 이전 계획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니 애틋한 정으로 바뀐다. 삶의 여정에서 사람이나 사물의 관계에서 쌓이는 정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해후-섬진강 옛이야기


하동읍에서 화개장터, 구례 방향으로 가는 섬진강 길(섬진강대로)의 악양 초입인 삼거리에 버섯처럼 생긴 지붕의 집이 있다. <차&식사&맥주, 섬진강 옛이야기>라는 곳이다. 여러 면에서 좋은 곳이다. 우선 섬진강 옛이야기라고 하는 이름이 좋고 위치와 풍경이 좋으며 주인과 음식이 좋다. 여기서 우리 넷, 임정아 선생님 내외분과 우리 내외는 마주 앉았다. 지난해 부산 해운대의 옛 골목에서 만난 후 꼭 1년 만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만남 장소와 이번 만남 장소에는 ‘옛’이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튼, 정갈하고 소담한 밥상을 앞에 놓고 이어진 정담과 수저질은 시간의 흐름도 잊게 했다.

섬진강 옛이야기 이 집에 편과 나는 2006년 5월에 처음 왔었다. 그때는 경양식집이었는데 우린 스파게티를 주문했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흘러나온 음악 중에는 조용필의 ‘물망초’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혔던지 그 이후로도 이 집에만 오면 물망초가 무언의 선율로 흘러나와 나를 감싸곤 한다. 주인도 바뀌고 집 분위기도 바뀌었으며 노래를 틀어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물망초, 1981년 4월 27일에서 9월 21일까지 KBS2에서 방영한 정윤희, 노주현, 한진희, 김순철이 출연한 드라마의 주제곡이라고 한다. 물망초는 정윤희의 마지막 드라마 작품이라고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티브이의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서 자료를 찾아서 확인하지 않으면 물망초가 어떤 배경의 노래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물망초는 하이디의 소설《테스》, 또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 <테스>를 각색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테스, 흔들리고 서툴렀던 청소년기에 애잔하게 읽고 보았던 작품, 반복해서 삼독 사독 했던 소설이다. 정윤희, 김순철 두 분도 벌써 이 세상을 떠나셨고. 이런 배경에서 들으면 물망초는 지금도 강렬히 가슴을 흔든다.


“… 잊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 마음은 비가 되어, 마음은 강물이 되어 고향 바다 그 얼굴 찾아가누나. 한없는 기다림만 가슴에 담아 내 마음을 묶어버린 나는 물망초. (이희우 작사 / 조용필 작곡)”

물망초도 그렇지만 조용필의 음악은 강렬하다. 강렬해서 그런지 들으면 금방 뇌리에 자리한다. 한국의 가요 역사는 '위대한 가객'인 조용필 이전과 이후로 획을 긋는다고, 그는 중단 없이 창조적인 무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그렇게 업데이트되는 레퍼토리 패키지는 한국 최고의 '문화상품'이라고, 그래서 그가 있어 한국인은 행복하다고 어떤 음악 평론가는 말한다. 과연 그런지 그건 모르겠다만 섬진강 옛이야기 이 집은 내게 조용필의 물망초를 알게 해 준 곳이다. 지금 주인이 아니라 그 전 주인 때.


바라봄 -무딤이 들판 섬진강 하늘의 솜뭉치 구름


평사리 토지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막 들어서면 ‘고소산성’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산사에 도착한다. 한산사, 작은, 작아도 너무 작은 절이다. 하지만 알고 나면 역사가 오래기에 다시 보게 되는 절이다. 서기 544년에 창건된 구례 화엄사와 창건 연도가 같다고 하던가. 아무튼, 이곳에 오면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그 전망대에 서면 하동 섬진강과 광양 백암산, 그리고 지리산의 구재봉, 칠선봉 등에 둘러싸인 악양 평야가 한눈에 조망된다. 다만 안쪽의 우리 길뫼재가 있는 깃대봉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여기에 서서 우리 넷은 강과 들판을, 산과 계곡을 내려 보고 올려보고 또 둘러봤다. ‘무딤이’라고 하는 평사리 들판에서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도 부분적으로 재구성해 봤다. 무딤이(무디미)의 뜻은 ‘물이 디밀어 들어오는 들’이라고 한다. ‘섬진강 물이 흘러넘쳐 둑 안 평사리 들판으로 들어왔거나 악양천이 범람하여 물이 잘 빠지지 않은 평사리 들판’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아무튼 무딤이 들판은 봄이나 여름 또 가을 등 그 어느 계절에 이곳 한산사에 올라와서 보아도 풍요롭다. 겨울엔 올라와 보지 못했다. 겨울 무딤이는 텅 비어서 오히려 ‘가득’ 일 것이다. 남해의 올망졸망한 다랭이 논과는 다르게 거대한 계단식 논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다른 곳에는 흔히 있는 비닐하우스나 전봇대, 축사 같은 게 없이 벼와 보리 위주의 작물들만 재배되는 깔끔한 평야가 무딤이 들판 곧 평사리 들판이다.

서서 보니 무딤이 들판과 섬진강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솜뭉치였다.


차 한 잔 -길뫼재


길뫼재에 올라왔다. 가제보(정자) 탁자에 앉아 넷이서 차 한 잔 나누었다.

해는 기울고 갈 곳은 멀기에 차 한 잔 하고 일어섰다. 진주까지 모셔다 드리는 길, 고속도로가 아닌 지방도로를 택했는데 막힘없이 빠졌다. 진주 남강 변 숙소에서 작별인사를 나눈 후 길뫼재로 돌아올 땐 고속도로를 택했는데, 오면서 보니 반대편 길은 꽉 막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주 남강 유등축제에 오는 차량 때문에 그렇게 막혔다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막힘없이 도착’이라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에 안도의 숨을 쉬는 나의 호흡은 비교적 가벼웠다. 


이제 겨울, 11월 30일 오늘의 이곳 산기슭 바람은 영락없이 북풍이다. 지난 10월의 일들이 벌써 아득하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인데 벌써 그렇다. 서서 본 무딤이 들판 위 또 섬진강 하늘에 떠 있던 구름, 그 구름이 오늘은 한산사 전망대 사람들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 주었는지 궁금하다. 아주 오래전에 잠깐 다녀온 나성의 거리 가을 풍경도 궁금하고. 그 거리 자카란타 꽃말도 알고 싶다. “마음이 비가 되어 마음은 강물이 되어 고향 바다 그 얼굴을 찾아가는” 조용필의 물망초…, 그런데 여기서 고향 바다 그 얼굴이 뭐람? 뭐란 말인가? 도무지 짐작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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