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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Jun 16. 2018

보릿대 모자

나도 장미도 보릿대 모자도

 https://youtu.be/boZp8Y3Q3rs

(백만송이 장미 / 컴백 마돈나 밴드)

                                                 

감자    

오늘이 6월 16일이고 지난 8일에 캤으니 감자를 좀 일찍 캔 편이다. 감자는 하지(夏至) 전후로 캐는 거라고 하는데 올해 하지는 21일이다. 감자는 캘 때가 되면 잎과 줄기가 시들해진다. 그런데 아직 캘 때가 멀었는 데도 잎과 줄기가 좀 비실거렸다. 다른 해보다 키도 좀 덜 자랐고. 그래서 감자대의 크기나 시기를 보면 한 일주일 더 기다려야 하지만 우리는 캐기로 결정했다. 캐어서 보니 크기가 그런대로 적당하다. 약간 작긴 했지만 삶아 먹기에 알맞은 크기인지라 다 캔 후 캐길 잘 했다는 뜻에서 둘이서 하이 파이브 했다. 캔 감자를 바로 삶아 정자(가제보)에 앉아서 먹으니 그 맛은 약간 덜 성숙한 맛, 그러니까 싱그럽고 풋풋한 초여름 맛이었다.    


들깨 묘판    

감자를 캐낸 자리에 들깨 묘판을 만들었다. 들깨와 참깨는 고추, 김장용 채소와 더불어 내 밭농사의 주력 품목이다. 지난해까지는 들깨를 더 심었는데 올해에는 참깨를 좀 더 심을 예정이다. 들깨는 발아가 잘 된다. 며칠 후면 싹이 연두색으로 돋아날 것이다.     


참깨 묘판    

참깨는 씨앗을 심어도 잘 나지 않는다. 발아의 여러 조건 중 하나만 틀어져도 씨앗이 순을 흙 위로 올리지 않는다. 이번엔 세 번째 뿌려 발아에 겨우 성공했다. 이 봄의 일기불순, 6월의 불순한 일기가 농사에 끼친 피해가 크다. 녹차, 양봉, 과수 등 농사가 전반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보도를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우리 밭 참깨 농사나 꽃조차 피우지 않은 사과나무를 통해서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참깨 모종, 장마철이 오면 솎아서 옮길 것이다. 세 번째 심어 난 여린 참깨 순이 안도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내게 안겨 준다. 밭은 내가 다듬지만 파종은 편의 몫이다. 옆에서 볼 때에도 심는 성의가 눈에 확 뜨이는데, 농사란 하늘과 땅의 일이기 때문에 심는 손의 성의만으로 성사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보릿대 모자    

보릿대 모자를 쓰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잔디의 풀 뽑고 잔디 가장자리를 큰 가위로 짧게 깎는, 즉 면도하는 일을 할 때에. 그런 일을 할 때에 다른 모자가 아닌 왜 보릿대 모자? 서서 일을 할 때에는 흐르는 땀 때문에 모자가 젖거나 또는 모자가 나뭇가지에 걸리는 수가 많으므로 창이 넓은 보릿대 모자가 적절하지 않지만 햇볕 아래서 앉아 일할 때에는 적절하므로.

    

여기 내 처소의 잔디 면적이 제법 넓고 길다. 지난해까지 10여 년 동안 ‘줄 예취기’로 잔디를 깎았는데, 예취기 줄(날)을 바짝 대어 깎으면 흙먼지를 심하게 날리는지라 보통일이 아니었다. 잔디 깎기를 사려하다가도, 전동 잔디 깎기는 값이 비쌀 건데 그것을 사서 써야 할 만큼의 면적은 아니라는 생각에, 또 수동 잔디 깎기는 힘이 들 거라는 생각에 사지 않고 예취기로 버텼다. 그러다가 수동 잔디 깎기를 사게 된 데에는 지난해 어느 집에 가서 그것을 직접 손으로 밀어본 다음이었다. 직접 밀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힘이 덜 드는 것 아닌가. 그래서 구매하기로 결심, 산 후 그것으로 깎아 보니 예취기로 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들었다. 그 대신 새로 생긴 일은 가장자리를 가위로 잘라 주어야 하는 일, 예취기로는 돌로 된 경계선까지 바짝 깎을 수 있지만 잔디 깎기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디밭에 앉아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창이 넓은 보릿대 모자가 자연스레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릿대 모자가 등장한 것이다. 하동 시장의 모자점에서 샀는데 거기에는 내가 찾던 또 다른 모자, 즉 X-Large 크기의 벙거지도 마침 있어 그것도 곁들여 샀다. 이 크기의 벙거지가 찾기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이번에 그것까지 구하게 되었으니 어야 말로 일거양득이었다.  

  

'보릿짚 모자'와 '밀짚모자' 중 맞는 표현은? 밀짚모자가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표준어 규정 제25항에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료가 보릿짚이건 밀짚이건 간에 ‘밀짚모자’가 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 입에는 ‘보릿대 모자’가 더 익숙하다. 밀짚모자는 대중가요 가사 등에서 많이 쓰여 세력을 얻은 용어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보리 재배 면적이 밀 재배 면적보다 훨씬 컸었다. 그러니 모자를 만드는 재료도 보릿짚이 더 많이 쓰였을 것이다. 여기서 ‘보릿대’는 보릿짚의 비표준어인 것 이번에 확인했다.  

  

장미    

색이 다른 세 종류의 장미가 화단의 제 각각 대장이다. 자르는 데도 키를 위로 경쟁적으로 쑥쑥 올려 하얀 집 창을 넘본다. 화단의 장미, 꽃집에서 보는 장미나 저기 곡성의 장미원에서 보는 장미처럼 탐스럽거나 흠이 없는 그런 장미가 아니다. 핀 후에 금방 얼굴이 망가지거나 찌그러진다. 그래도 좋다. 내 눈엔 최고의 장미다.  

   

백만 송이 장미라, 흠 없는 장미가 백만 송이 피어 있는 정원을 들어선다면 내 눈은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세월이라는 기차를 타고 멀리까지 달려온 지금의 내 정서가 백만 송이 장미를 본다고 별다른 감응을 하게 될까만,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를 실물 장미에다 오버랩시키면 찌그러진 우리 정원의 장미도 좀 달리 보인다. 보릿대 모자를 쓰고 장미 곁에 서니 장미들이 나를 보고 웃는 것 같다. “어디서 온 촌 영감?” 하면서 말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왜 어떤 것은 존재하고, 왜 무(無)는 없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본래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이런 질문을 제시할 때라도, 이러한 질문은 내가 처음부터 갖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과거로부터 온 내가 존재하고 있는 어떤 상황에서부터 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칼 야스퍼스 / 철학Ⅰ, 철학적 세계정위 089쪽)    

겨울엔 없던 장미가 가지에서 피었다. 장미가 지금 내 곁에 있다. 보릿대 모자를 하나 샀다. 그전에 없었던 모자가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다. 장미꽃, 곁에서 보니 반복해서 여러 번 피더라. 그래도 겨울엔 없어진다. 보릿대 모자 아껴서 쓸 것이다. 그래도 몇 년 후엔 없어진다. 있는 것은 이렇게 없는데서 생기고 있다가는 또 없어지는 거…. 당연한 순리를 새삼스럽게. 구태여 말한다면 ‘있고 없음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유(有)의 무화(無化)와 무(無)의 유화(有化)는 영원히 이어질 존재의 질서이다.    

있고 없음에 대한 이런 생각이 뜬금없이 떠올랐지만, 그 뜬금없이 떠올랐다는 것이 사실은 시간과 공간 범위 밖에 이루어진 건 아니다. 말하자면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에서 떠오른 것이다. 상황이라, 상황(Situation)은 야스퍼스 실존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둘러싼 상황 속에서 나는 생활하고 생각하고 일한다. 그런데 또 야스퍼스에 의하면 상황에는 일반상황과 한계상황이 있다. 이 중 한계상황은 죽음, 투쟁, 사랑, 죄, 우연성 등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나의 실존적 각성의 계기가 된다.  


나는 지금 있다. 없지 않다. 일상인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벼랑 끝의 문제 앞에 절박하게 서 있지는 않다. 일반상황 속에서 평범하게, 무난하게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한계상황이라고 하는 절실한 문제가 나를 비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성이라는 한계상황이 어떻게 작동할진 알 수 없는 거고, 또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음영을 분명히 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이 시점과 지점에는 장미가 내 곁에 있다. 보릿대 모자도 있고. 나 또한 산기슭 여기에 기대어 잘 있다. 없거나 없어지지 않고.

(맨 위 연주곡은 '백만송이 장미'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때 /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 그립고 아름다운 내별나라로 갈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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