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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Apr 20. 2018

생각난다

스친 얼굴 몇 사색

https://youtu.be/CXUtfXtssw0

벤치-덕수궁 돌담길

덕수궁에 왔다. 학회 출장길에 시간 내어 온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동 길을 도는데 돌담길에 벤치가 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앉으려니 좀 머쓱하다. 하지만 지금 앉지 않으면 내가 언제 앉겠는가. 가을 벤치 아닌가. 그래서 앉았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뭘.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이 여럿 뒹군다. 오래 앉아 있지는 못했다. 머쓱해서 이내 일어났다.

생각난다, 덕수궁. 그 벤치가 생각난다.    


K 노인-통영

1월의 어느 해 겨울, 통영의 시장통에서 K 노인은 빨래를 널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널고 있는 것은 빨래가 아니었다. 찢어 까발린 생선이었다. 남쪽 나라 통영의 한 겨울 오전 햇살은 눈 부셨고 추웠지만 따뜻했다. 바다의 푸른색은 깊고도 깊었고 닻을 내리고 있는 배들의 깃발은 더욱 펄럭이고 있었다. 길가로 줄지어 선 열대 나무들은 겨울옷을 몸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푸른 잎을 또 푸른 하늘에 담그고 있었고.

통영의 K 노인, 그의 얼굴은 그가 너는 생선의 속살만큼 희었다. 세월은 사람을 얼룩 지우기도 하지만 또 그 얼룩을 표백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말은 건네니 순순히 대답해 준다. 무표정이었지만 따스한 음성이었다. 따스한 음성으로 인해 그 무표정은 온기가 도는 표정으로 되었다. 지금도 까발린 생선을 빨래 널 듯 널고 있을까. 그 곁의 닻 내린 배들의 깃발들은 펄럭이고 있을까. 통영의 깃발은 유치환을 생각나게 했다. 저만치 가다 돌아보니 널린 생선들도 깃발이던데. 노인은 깃발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통영의 그 노인 K가 생각난다. 생선 널던 그 손도.    


M 화가-서귀포

다시 1월, 겨울이다. 서귀포는 봄이었다. 겨울 속의 봄이었다. 내가 편(便)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함께 제주도 다녀오지 못한 것은 늘 큰 미안함이었다. 내년이면 함께 한 지 25년이 되는데 그동안 우리는, 남들 다 다녀오는 제주도를 뭐하다가 한 번도 함께 다녀오지 못했다.  ‘뭐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나의 나태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녀오지 못한 제주도를 이 해엔 1월 2월 연속해서 두 번을 함께 가게 되었다. 혼자 들락거리던 서귀포도 좋았지만, 함께 걷는 서귀포 길은 더 좋았다. ‘이중섭 거리’를 걸었다. 천지연 폭포길, 그 길에선 동백꽃이 얼굴을 부끄러운 듯 겨울 햇살처럼 살포시 내밀고 있었고 그 곁에선 화가가 아이를 그리고 있었다. 또 그 곁의 아이 아빠는 저리 편한 자세로 앉아서 보고 있었고. 말하자면 관조하고 있었다. 

디카를 들이대도 좋으냐고 물으니 화가도 그 아빠도 동의한다. 아이는 아예 날 쳐다보고 있고. 편은 또 아이와 화판을 보고 있고. 나른한 오후가 아니라 정겨운 한낮이었다. 화판에 그려지는 풍경, 화판 펼치고 앉아 있는 화가 골목의 겨울 서귀포 천지연 풍경, 따스한 풍경이었다. 

서귀포의 그 화가 M이 생각난다. 아이를 그리던 그 손도 또한.    


H 시인-와룡산

6월의 와룡산, 삼천포 와룡산의 천포 산장은 녹음에 파묻히고 있었고 방초는 그 산을 뒤덮고 있었다. 6월의 풀냄새와 나뭇잎 냄새는 싱그럽다. 떠가는 흰 구름은 어떻고, 모가 자라는 논의 햇살을 받는 물 냄새는 또 어떻고. 와룡산은 그런 싱그러운 냄새들을 먼 길 달려와 피곤한 나에게 청량 선물로 주었다. 

초 여름밤의 모닥불 그 곁에서 누군가는 핏대 올리고 누군가는 담소하고 또 누군가는 관조했다. 또 누군가는 노래하고 또 누군가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렇게 어우러지는 노래를 코러스 한다면 그 코러스에 누구는 허밍으로 합류했다. 난 따라 부르기도 했고 따라서 허밍 하기도 했다. 허밍과 코러스, 그 속에 나를 반복해서 담갔다. 

H 시인이 갑자기 하모니카를 찾았다. 나는 늘 하모니카를 차에 싣고 다닌다. 잘 불지는 못한다. 본격적으로 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내 흥에 겨워 불 때가 더러 있지만. 차에서 꺼내온 하모니카를 그 시인에게 건넸다. 받아 들더니 '스와니강의 추억'과 다른 노래 두어 곡 더 분다. ‘스와니강의 추억’은 청소년 시절에 본 영화 ‘그리운 스와니’ 때문에 내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다. 

그 영화가 생각난다. 천포 산장의 그 유월도 그 밤의 하모니카 시인 H도 생각난다.    


W 거사-안동 봉정사 

7월 안동 봉정사, W 거사는 노인이라고 말하기엔 꼿꼿했고 카랑카랑했다. 나는 그를 거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는 봉정사의 유래를 봉정사 주지 스님보다 더 잘 안다고 말했고 그의 그런 말과 설명에 나는 수긍했다. 그는 안다는 것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봉정사를 과대평가하는 나의 눈, 그 눈의 꺼풀을 벗겨 주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말이다. 거품을 걷어내고 보아도 봉정사는 나에게 담백한 절로 앉아 있었다. 영국 여왕이 다녀갔다는 표식은 군더더기로 보였다. 

그의 절밥 먹은 세월이 길었고 먹은 밥그릇 수만큼이나 법륜도 쌓인 것으로 보였다. 말하자면 나이만 먹고 밥만 먹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말하는 중에 비는 간간이 내렸으며 받쳐 주는 우산을 마다했고 내내 삽과 괭이를 양손에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한학을 공부한 분이었다. 독학으로 이룬 한학, 한학 그중에도 유학과 절집에서의 긴 삶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함께 나누는 담론이 재미있어 지체하는 중에 벌써 출발해야 하는 버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기다린 모양이다. 앉아 있는 일행의 눈길이 조금은 불편하다. 

안동 봉정사의 W 거사 그 얼굴이 바람 위로 떠 오른다. 생각난다. 움켜쥐고 있던 삽과 괭이의 그 손도.  

  


 

생각난다. 그냥. 뜬금없이 생각난다. 그 벤치의 덕수궁 길, K 노인의 통영, M 화가의 서귀포, H 시인의 와룡산 천포 산장, W 거사의 봉정사 그곳들이 생각, 생각이 난다. (스쳐 지나간 얼굴 몇에 대한 아주 오래 전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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