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순간

런던#1

by 니지

당신에게 열정적인 순간이 있었나요?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야구와 축구를, 겨울부터 봄까지는 배구와 농구를 보고 즐기며 한 해, 한 해를 보냈다. 좋아하는 해외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을 새기도 했다. 물론 한국 대표팀의 경기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기에 더 많은 사람들과 스포츠로 소통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말로, 글로 스포츠를 전하고 싶었고 그 꿈이 잠시 실현되기도 했다.


이런 내게 런던에서 축구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운 좋게도 EPL 개막에 맞춰 유럽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런던에 머무는 일정에는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결국 여행 루트를 모두 바꿨다. 마지막 도시였던 런던이 두 번째 여행지가 됐다. 여행 보름을 앞두고.


손흥민이 뛰는 토트넘과 이청용이 뛰는 크리스탈 팰리스 경기를 예매했다. 한국인이 함께 런던 그라운드를 누빈다는 것, 그것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있길 바라며.


그러나 리우 올림픽이 겹치며 손흥민은 브라질로 떠났고 난 아쉬움을 삼켰다. 그래도 런던에서 축구를 볼 수 있는 게 어디냐고 위로했다. 경기가 열리기 일주일 전 즈음, 한국이 올림픽 8강에서 온두라스에게 패하며 4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와 함께 손흥민은 다시 런던으로 온다는 기사에 토트넘의 감독은 손흥민이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2라운드 경기에 교체 선수로 나올 가능성을 시사했다.


4강 좌절은 가슴 아팠지만 손흥민과 이청용의 맞대결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을 기대했다.


TV로 듣던 함성소리, 노랫소리. 모두 익숙했다. 축구에 미친 사람들의 함성소리 역시 친근하게 다가왔다. 손흥민은 벤치 대기도 아닌 결장, 그 대신 이청용이 선발로 출전했다. 그가 몸을 푸는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애국심이 절로 샘솟는 순간.


옆에 앉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겠지만 아저씨로 보이는 백인 남성은 내게 "운이 좋은 거야. 이런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건"이라고 웃어 보였다.


나도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난 그 아저씨에게 "당신이 더 운이 좋다. 이런 경기를 매주 볼 수 있으니까"라고 받아쳤다. 그 역시 "자신은 이런 경기를 자주 볼 수 있어 행복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관중들의 열기 속에 전반전이 마무리됐고 후반이 시작됐다. 후반 중반까지 양팀 모두 골이 없던 상황. 후반 37분 해리 케인의 패스를 받은 빅토르 완야마가 헤딩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토트넘의 열성팬인 그는 골이 터지자 환호성과 함께 내 목을 감쌌다. 그는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에 나를 안은 것이라 하겠지만 족히 100kg은 더 나가 보이는 아저씨의 백허그는 헤드록처럼 느껴졌다.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숨이 막혔지만 행복했다. 목을 감쌌던 아저씨는 자신의 동행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즐기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것도 한 손으로.


모르는 중년 남성이 나를 들어 올린 것 자체에 지인들은 내게 수치스럽지 않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저 그들과 함께 하이파이브를 하며 신났고 홈팀인 토트넘이 이기는 경기를, TV로 보던 경기장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승리를 노래하는 토트넘 팬들

2시간 남짓, 그 중년의 남성과 함께 하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저렇게 열정적인 순간이 있었니"라고. 소위 무언가에 미쳐서 열정적인 적이 있을까.


20대 초반에는 꿈이 많았다. 교직이수를 하면서 교단에 서는 꿈을 꿨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캐스터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꿈과는 멀어져 갔다. 물론 꿈에 도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매일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거늘.


그러나 도전한 시간들이, 도전했던 나 자신이 아쉽고 안타깝지 않았다. 20대 중 가장 열정적이고 행복했던 시간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중년의 남성이 온 힘을 다해 축구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니 순간 내가 꿈을 너무 쉽게 포기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정말 죽도록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 자신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돌이켜보니 공부도, 사랑도 후회 투성이었다.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했던 적이 많지 않았다. 공부도 여기까지만, 상처받을까 두려워 사랑도 여기까지만. 모든 것들을 적당하게, 평범하게.


지금부터라도 매사 '적당하고 평범하게'가 아닌 죽을힘을 다해 도전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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