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처럼 왔다

파리#9

by 니지

감기가 떨어지질 않는다. 며칠째 나을 듯 말 듯을 반복하다 결국 내 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았는지 나을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갈 거라며 버텼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약국에서 파는 종합감기약 몇 알을 먹었다. 얕잡아 본 탓인지 감기는 더욱 심해졌다. 병원에 가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결국 직접 병원을 찾았다. 독감. 그렇게 무시하고 무시했던 감기는 더욱 독해졌다. 머리만 아프더니 이젠 뜨거운 전기장판에 이불을 몇 겹 씩 덮고 있어도 온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약을 먹고 링거를 맞고 며칠 가만히 누워있었더니 입맛도 생기고 움직이고 싶어 졌다.


많이 나아졌다며 너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며 하루 남은 약을 먹지 않았다. 빨리 털고 일어나고 싶었다. 이렇게 얘한테 발목을 붙잡히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무심하게 대했던 감기는 결국 다시 도지고 말았다. 더 심한 감기 때문에 난 지금 사시나무 떨리듯 온몸이 떨리고 있다.


그냥 기침만 할 때, 머리만 아플 때 조금 보듬어 줄 걸.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 진실을 알면서도 그 진실이 마냥 두려웠던 것인지. 이렇게 아플 것이라는 걸 몰랐던 것일 수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감기라고 생각했나보다. 아니 그냥 스쳐가기를 바랐을 수도. 그냥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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