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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쌤 Nov 04. 2023

얼마면 약속을 저버릴 수 있을까?

당근마켓이라는 훌륭한 플랫폼은

사람들의 물건을 쉽게 사고팔게 만든다.


그래서 원래 뭘 팔아본 적이 없는 사람조차

‘거래'라는 것을 하게 된다.


당근마켓의 절반이 넘는 이용자가

육아용품을 거래한다는 통계처럼,

나도 아기가 생기면서

당근마켓의 이용자 대열에 본격적으로 끼기 시작했다.


특히 이사하면서 당근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가격 책정을 너무 후려치고

얼른 처분하기를 바라는 나는

영 훌륭한 판매자는 아니었고,

예상보다 당근마켓의 많은 이용자들이

충동구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빨리 치우고 싶을수록

가격을 낮게 책정했어야 했고,

그건 내 시간의 값과 돈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준보다 터무니없이 낮아진 물건은

올린 지 5분도 안 되어서 연락이 우후죽순 온다.


진짜다, <거래 중>이라고 잽싸게 체크 안 해놓으면

10분 동안 5명은 연락 온다.


이렇게 몇 개씩 처분하다 보니

굉장히 많은 분들이 충동구매를 하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갑자기 우후죽순으로 연락 오시는 분들은

키워드 알람을 해놔서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필요는 없는데 혹 해서 사는 분들이 많으셨다.


놀랍게도 나오시는 분들의 나이대는 거의 5-60대 분들이시다!


생각해 보니 집에 가면

우리 아부지도 당근 마켓을 심심하면 보고 있더라고!(어쩐지!)


이분들은 거래 날짜가 2-3일 딜레이 되면

갑자기 현실 자각이 되시는지 거래를 취소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번거롭지 않기 위해서는

당일이나 다음날 거래를 해야 했다.

그래야 거래 취소를 안 당했다.


그러던 중 티비장과 식탁세트를

이사 이틀 앞두고 값을 엄청 후려쳐서 급히 판매할 때

일어난 일이 있었다.


우후죽순 오는 연락들 속에서

제일 먼저 연락하신 분에게 판매하려고

티비장 하나, 식탁세트 하나,

이렇게 각각 약속을 잡았는데,

갑자기 어떤 분이 다른 상품을 통해서

연락을 주시는 것이었다.​


어....

어쩌지?


한 3초 고민하다가

그냥 제일 먼저 연락 오신 분께 판매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이 분이 얼마를 제시했으면

넘어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5만 원이 약속을 저버리기에는

나에게는 너무 작은 금액이었을까?


옆에서 짐 정리하고 있던 짝꿍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물었다.


"얼마면 약속 취소할 것 같아? 20만 원?"


      "10만 원 정도?"


"10만 원? 너무 쉽다."


      "아니 10만 원이면 크지!"


"그런가, 막상 10만 원 얘기하면 흔들릴 것 같긴 한데?"


      "그지,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건 그렇네."


모르는 사람과의 약속의 크기는 10만 원일까?


모르는 사람과의 약속의 크기가 10만 원이라면,

아는 사람과의 약속의 크기는 얼마일까?


100만 원?


아는 사람이 더 가까울수록 그 금액은 올라가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약속도 있을 것이고,

돈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은 약속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일은

약속대로 내 티비장이 팔렸을 때 일어났다.


티비장을 구매하시는 분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티비장을 가져가시는데,

뭔가 티비장을 휙휙 다루시는 것이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서 확인은 못했지만,

순식간에 기스가 엄청 났을 거다.

그리고 티비장에 있는 구성품 중 위의 보호 유리는

안 가져가시겠다고 했다.


이 티비장에서 위에 놓인 보호유리는

코팅되지 않은 나무로 만들어진 티비장이

쉽게 오염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라서,

정말 필요했는데....


심지어 조심스레 내가

우리가 이 티비장을 써보니

유리가 필요하긴 할 것 같다고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렇게 오래 쓸 생각은 없어요." 하고

퉁명스럽게 답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뚱해 보이는 구매자와

내 것이었던 티비장이 함께 떠나가는 것을

짝을 잃어버린 보호 유리와 지켜 봤다.


그러면서

그 '5만 원'을 제시해 주신 분이 생각났다.


그분이라면 이렇게 다루지는 않았을 거야.

굳이 내 다른 상품까지 찾아와서 얘기도 하고,

5만 원을 함께 제시했던 '정성'을 보이신 분이시라면.

오랫동안 나와 살아왔던 티비장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을 거야.


싸게 산다고 함부로 다뤄지는 티비장을 보면서

어쩌면 그 5만 원은 '정성'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제멋대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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