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이라는 훌륭한 플랫폼은
사람들의 물건을 쉽게 사고팔게 만든다.
그래서 원래 뭘 팔아본 적이 없는 사람조차
‘거래'라는 것을 하게 된다.
당근마켓의 절반이 넘는 이용자가
육아용품을 거래한다는 통계처럼,
나도 아기가 생기면서
당근마켓의 이용자 대열에 본격적으로 끼기 시작했다.
특히 이사하면서 당근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가격 책정을 너무 후려치고
얼른 처분하기를 바라는 나는
영 훌륭한 판매자는 아니었고,
예상보다 당근마켓의 많은 이용자들이
충동구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빨리 치우고 싶을수록
가격을 낮게 책정했어야 했고,
그건 내 시간의 값과 돈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준보다 터무니없이 낮아진 물건은
올린 지 5분도 안 되어서 연락이 우후죽순 온다.
진짜다, <거래 중>이라고 잽싸게 체크 안 해놓으면
10분 동안 5명은 연락 온다.
이렇게 몇 개씩 처분하다 보니
굉장히 많은 분들이 충동구매를 하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갑자기 우후죽순으로 연락 오시는 분들은
키워드 알람을 해놔서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필요는 없는데 혹 해서 사는 분들이 많으셨다.
놀랍게도 나오시는 분들의 나이대는 거의 5-60대 분들이시다!
생각해 보니 집에 가면
우리 아부지도 당근 마켓을 심심하면 보고 있더라고!(어쩐지!)
이분들은 거래 날짜가 2-3일 딜레이 되면
갑자기 현실 자각이 되시는지 거래를 취소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번거롭지 않기 위해서는
당일이나 다음날 거래를 해야 했다.
그래야 거래 취소를 안 당했다.
그러던 중 티비장과 식탁세트를
이사 이틀 앞두고 값을 엄청 후려쳐서 급히 판매할 때
일어난 일이 있었다.
우후죽순 오는 연락들 속에서
제일 먼저 연락하신 분에게 판매하려고
티비장 하나, 식탁세트 하나,
이렇게 각각 약속을 잡았는데,
갑자기 어떤 분이 다른 상품을 통해서
연락을 주시는 것이었다.
어....
어쩌지?
한 3초 고민하다가
그냥 제일 먼저 연락 오신 분께 판매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이 분이 얼마를 제시했으면
넘어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5만 원이 약속을 저버리기에는
나에게는 너무 작은 금액이었을까?
옆에서 짐 정리하고 있던 짝꿍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물었다.
"얼마면 약속 취소할 것 같아? 20만 원?"
"10만 원 정도?"
"10만 원? 너무 쉽다."
"아니 10만 원이면 크지!"
"그런가, 막상 10만 원 얘기하면 흔들릴 것 같긴 한데?"
"그지,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건 그렇네."
모르는 사람과의 약속의 크기는 10만 원일까?
모르는 사람과의 약속의 크기가 10만 원이라면,
아는 사람과의 약속의 크기는 얼마일까?
100만 원?
아는 사람이 더 가까울수록 그 금액은 올라가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약속도 있을 것이고,
돈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은 약속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일은
약속대로 내 티비장이 팔렸을 때 일어났다.
티비장을 구매하시는 분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티비장을 가져가시는데,
뭔가 티비장을 휙휙 다루시는 것이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서 확인은 못했지만,
순식간에 기스가 엄청 났을 거다.
그리고 티비장에 있는 구성품 중 위의 보호 유리는
안 가져가시겠다고 했다.
이 티비장에서 위에 놓인 보호유리는
코팅되지 않은 나무로 만들어진 티비장이
쉽게 오염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라서,
정말 필요했는데....
심지어 조심스레 내가
우리가 이 티비장을 써보니
유리가 필요하긴 할 것 같다고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렇게 오래 쓸 생각은 없어요." 하고
퉁명스럽게 답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뚱해 보이는 구매자와
내 것이었던 티비장이 함께 떠나가는 것을
짝을 잃어버린 보호 유리와 지켜 봤다.
그러면서
그 '5만 원'을 제시해 주신 분이 생각났다.
그분이라면 이렇게 다루지는 않았을 거야.
굳이 내 다른 상품까지 찾아와서 얘기도 하고,
5만 원을 함께 제시했던 '정성'을 보이신 분이시라면.
오랫동안 나와 살아왔던 티비장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을 거야.
싸게 산다고 함부로 다뤄지는 티비장을 보면서
어쩌면 그 5만 원은 '정성'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제멋대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