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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쌤 Nov 13. 2023

우리 아부지한테는 내가 교사인게 최대 자랑인데


옛날 옛적 관사 앞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내가 첫 발령을 앞두고 시골학교 관사로 

이사갔을 때 얘기다.


옆 학교에서 고맙게 신규교사였던 나에게

방 한 칸 내어주어서 나는 아부지랑 둘이서 이사를 했다.


꼭 필요한 몇 개의 가구들과 옷가지들.

그리고 안 가져오겠다고 해도

아부지가 필요할 거라 고집을 부려서

고향집에서 바리바리 챙겨온 샴푸, 치약 같은 생활용품들까지.


한 번도 와본 적도,

밟아볼 거라 상상한 적도 없었던 낯선 지역에서

아부지랑 단둘이 짐을 옮겼다.


그날 짐도 다 옮기고 나서

고향집까지는 꼬박 3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터라 

아부지는 관사에서 주무시고 내려가기로 했다.


이 지역에 막걸리가 유명하다며

근처 슈퍼에서 막걸리도 한 병 사오셨다.


앉아서 마시지 뭘 그리 불편하게 싱크대에 서서 

고향집에서 가져온 물컵에 흰 탁주를 

콸콸 담아서 마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는 근처 슈퍼 아저씨한테

우리 막내딸이 여기 선생님 되었다고 슬쩍 자랑했다가,

아이구, 병아리 선생님이네요? 라고 아저씨가 그랬다며

난 하나도 안 웃긴 얘기를

아부지는 막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날 밤에

알딸딸하게 취한 아부지랑 

관사에서 이부자리 피고

"주무세요."라고 얘기했다.


근데 아부지가 대뜸 그러는게 아닌가?


"아빠는 네가 선생님 됐다고 해서 너무 안심했다."

"왜? 임용 재수할까봐?"

"아니... 공부 잘 했는데도 떨어졌을까봐."


그리고 충청도 사람 특유의 그 느릿한 말투로 

전하던 말은 할아버지에 대한,

생전 처음 듣던 얘기였다.


굉장히 똑똑하셨지만 

일찍 돌아가셨다고만 알고 있던 할아버지였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6.25 전쟁 중 마을 사람들 보호하려다 

북한군이랑 얽혀서 굉장히 고생을 했고,

나중에 고문까지 받았었다는 얘기.


그게 너무 억울해서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얘기.


돌아가시고 나서도 할아버지 이력이 문제가 되어서

아부지를 비롯한 자식들은 당연하게도 줄줄이

큰 일들에서 완전히 배척 받았다는 얘기.


그게 싫었던 큰아버지는 

가장 먼 곳이었던 부산으로 쫓기듯 떠났고

아들 중에는 아부지만이 할머니 곁에 남았다는 얘기.


흔한 시골의 밤이 그렇듯,

그날 밤은 희미한 빛마저 비추지 않았다.


허공인지 천장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칠흑 같은 눈앞을 마주하면서,

지금 듣고 있는 얘기가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세 자식 중 막둥이가 

24살이 되었던 그 긴 세월 동안

할아버지에 대해 

단 한 마디 하지 않고 살던 양반이었다.


막내가 공무원으로 출근하기 전 날 

겨우겨우 토해낸 사실이라니.


이 양반이 얼마나 그동안 마음 졸이며 살았을지.

그게 너무 아득했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괜찮을 거라고 여겼으면서도

내가 떨어졌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기를 탓했겠지.



그런 우리 아부지한테는 

내가 교사인게 너무 큰 자랑이라서

종종 고향집에 내려가면 

나를 빤히 보다가 한 마디씩 한다.


"너 아빠가 시키는대로 선생님 하길 잘했지?"


아부지가 그런 말을 하면

어린 애처럼 삐딱하게 얘기하고 싶기도 하고

학교 안에서 시들다 못해 

바스라지고 스러진 내 동료들이 생각나서

울컥하기도 한다.


그런데 10년 전에 보았던

허공인지 천장이었는지 모를 

그 캄캄한 눈앞이 생각이 나서,


그때 후련한 목소리로 다행이라고 말하고

그제야 깊은 잠에 들었던 아부지의 

평온한 숨소리가 생각나서,


"... 맞아. 아빠 말 듣길 잘했네." 라고 대답한다.


이 양반은 

아직도 어딜 가도 막내딸이 

나랏밥 먹는 공무원이라고 먼저 소개하거든.


우리 아부지한테는 아직도 내가 제일 큰 자랑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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