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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간


오래된 공간은 늘 이분법적이다. 

낡고 운치 있고, 정감 있고 구질하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감정을 쉽게 움직이지만 그래서 더 벗어나고 싶기도 한 공간. 

나는 지금 그 공간을 향해 운전을 하는 중이다. 

“ 오랜만이다. 광명대교.”

신호를 받고 좌회전 깜빡이를 켜는 동시에 휴대폰이 잔망스럽게 진동했다.     

 

우리 저녁 식사 시간 맞춰와

늦게 오면 반찬 없다     


죽어도 카톡은 안 쓰고 문자를 쓰는 박 여사. 엄마의 문자다. 

엄마가 문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숫자 1이 없어졌는데 답문 안 오면 이 놈 저놈 다 차단하게 될까 봐 그게 두렵단다. 

속상할 것 같다거나, 신경 쓰일 것 같다 의 뉘앙스가 아니라 자기가 누군가를 자꾸 차단하게 될까 봐 그게 겁이 난다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엄만 그런 스타일이지. 엄마. 카톡 깔지도 마.”

“ 진지하게 한방 먹인다 아들?”

그때 엄마는 나에게 진지한 등짝 스매싱을 수여하셨다. 여하튼 이번에도 엄마다운 문자였다. 나의 공간에 초대되는 넌 우리 기준에 맞춰라! 

얼핏 들으면 논리적인 이야기 같았지만 주변 엄마들과는 조금 다른 엄마만의 아우라가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정말 반찬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거란 느낌적인 느낌?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며 지상주차장에 남아있는 주차공간을 분주하게 찾기 시작했다. 공간도 협소하고 이중주차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곳이라 동물적 감각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곧바로 접촉사고가 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은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는데 놀랄만한 인심으로 작은 흠집 정도는 암묵적으로 눈감아 넘어가주곤 했다. 

‘inner peace.. 가 따로 없네.’

나는 완벽히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 이 주차장이란 공간에서 서로 이해하는 모습이 늘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이곳에서 운전을 시작한자는 절대 운전을 못할 수 없다는 지론을 만들어낸 주차 공간. 한 자리 남은 공간에 노련하게 주차를 하고 옆에 주차된 차를 보니 희뿌연 먼지와 노란 꽃가루들이 뒤섞여 엉겨있다. 

세차 좀 하지 진짜 더럽게 쓰네.라고 생각하다 지상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서 주기적으로 세차를 하는 건 무모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이 공간은 단지별로 재건축이 진행되는 곳이 많았다. 그만큼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는 그런 공간이었다. 

본가는 재건축이 아직 진행되지 않은, 그러니까 새 아파트들과 새 단장을 준비 중인 의기양양한 공사판들 사이에 애매하게 껴서 더 남루해 보이는 주공아파트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단지들 중에서 3단지가 가장 잘 사는 동네라고들 했지만 지금은 들어오는 곳과 나가는 곳 구분 없이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해야 하는 유명한 운전 난코스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고개를 들어 아파트를 올려다보자 편안함과 갑갑한 느낌이 동시에 빈 위장을 가득 채웠다. 

가까스로 회사에 취업하고 2년째 되던 날 중대한 발표랍시고 가족을 다 불러 모아 선언을 했었다. 독립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혼자 살아보는 게 우선이지 싶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더니만 가족 모두 너무나 쿨 했다. 

사실 집을 나가겠다는 이 말을 하기까지 엄청나게 걱정했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나가서 헛짓거리 하려고 한다며 말리는 부모님을 설득시킬 걱정, 연애질 편하게 하려고 별짓을 다한다는 동생에게 형으로서 그럴듯하게 핑계를 댈 걱정, 취준생 뒷바라지 끝나니 냉큼 자기 살 요량한다고 내빼는 꼴 같이 느껴져 부모님에게 혹여나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그런 걱정도 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다달이 월세를 내기는 싫고 전세를 구하려면 적금을 깨도 몇 백이 부족했다. 부족한 돈도 걱정이었다.

매매는 꿈도 못 꾸더라도 전세로 자리를 잡으면 그러다 결혼을 하고 그곳에서 새 가정도 꾸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부푼 꿈도 있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 같은 놈이었으니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 보니 이주일이 후다닥 지나가버렸고 드디어 기회를 엿보고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한 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가족은 나를 보내버린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애써 호탕하게 웃었던 것 같다.

“ 하하하!!! 장정 하나 나가면 편하다 이거지~~~”

“ 잠만 자러 들어오는 주제에.. 이 엄마도 편하게 새벽에 숙면 좀 해보자. 잘됐어.”

고민한 시간이 아까웠다. 그럴 줄 알았으면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는데.. 나는 가족들의 배웅이랄 것도 없는 “ 또 보자 ”라는 말을 들으며 그렇게 캐리어를 끌고 안녕했다. 

나올 때 적금을 깨고 모자라는 돈 580만 원은 부모님에게 빌렸다. 다달이 50 정도의 현금을 계좌이체 시켰고 12개월 정도 걸려 부모님의 돈을 다 갚았다. 

엄마는 악착같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매달 21일 날, 월급날 오후 4시가 되면 엄마의 문자는 딩동 울리거 나나 부르르 떨었다.     


농협

154 – 51 – 6576165155

박정자 이름으로 50만 원 입금 부탁드립니다.

580만 원 중 100만 원 해결되셨습니다.


해결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백한 아메리카노가 쓰게 느껴졌다. 악착같이 자식에게 돈 받아내는 악덕한 엄마로 만들지 말고 제 때 갚으라고 말하던 엄마의 눈빛이 생각 나서였기도 했지만 휴대폰도 잘 못 만지는 사람이 어디서 예약문자를 걸어놨는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간격 하나 바꾸지 않게 보내는 행동이 대단하다 느껴졌다. 엄마에게 애교스럽게 5만 원 정도의 여분 돈을 이자삼아 더 이체했다. 엄마의 계산법에 따르면 이자삼아 보낸 5만 원 정도의 돈, 그러니까 12개월 동안 60만 원 정도 내드린 이자는 580만 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 엄마도 참.. 이걸 뭐 또 해결씩이나 해야 되는 문제라고 야박하게..”

문자를 받자마자 내가 통화버튼을 누르면 늘 엄마는 물었다.

“ 왜~ 엄마 지금 바쁜데~”

“ 엄마는 뭘 그리 21일만 되면 바쁘대?”

“ 21일만 전화하는 아들놈 얄미워서 그런다. 왜!”

“ 엄마도 21일 날만 문자 보내놓고서는 뭐.”

“ 계좌로 보내~끊는다!”

“ 어~알았..” 

뚜뚜뚜뚜...................

이 단칼 같은 여인 같으니라고..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엄마의 행동이 자신을 덜 부담스럽게 만드는 본인만의 방법이란 걸 말이다. 

절절매는 엄마가 아닌 단호하고 명쾌한 엄마, 주저하지 않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보통의 엄마가 아닌, 할 말 다 하고 얻어낼 것 다 얻어내는 엄마가 사실 난 편했다.

사실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연애를 하려면 혼자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크게 한 몫 하긴 했다.  

누릴 만큼 누려보니 이 생활이나 저 생활이나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인생이란 설렘이 지나가면 담담함을 견뎌내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오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딱 1년 반 정도 자유를 누렸다. 

2년 넘게 연애하던 지연이와 1년 정도 모텔비를 줄일 수 있었고, 외식비를 줄일 수 있었고, 극장에 따로 가지 않아도 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는 게 최대 장점이라면 장점이었을까. 

주말마다의 지연이와 함께 한 영화관람, 영화를 볼 때 꼭 사야만 했던 大자 캐러멜 팝콘과 음료 두 잔, 매일 한잔씩은 죽어도 먹어야 하는 화이트 플랫 라테와 달아 죽을 것 같다 면서도 꼭 먹던 디저트, 지연이가 좋아하던 회전 초밥 집 방문과 미디엄 레어 살짝 핏물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썰었던 가격, 모텔 대실 또는 숙박비 등등 여타 것들을 어림으로 계산해 보니 족히 300만 원은 넘게 줄이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장을 보고 직접 음식을 해서 먹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기는 했지만 몸이 조금만 밀착돼도 금방 달아오르던 때였기에 노동조차 행복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졌다.  

둘만의 시간도 언제나 침체기라는 것이 찾아오는 법이고 독립에 대한 회의감과 익숙한 연애가 지루해질 즈음 우리는 소원해졌다. 

소원해진 이유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열거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서로 권태기가 맞물린 것이 꽤나 감사했다.

나 혼자 ‘나쁜 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익숙하게 사랑했고, 어린 부부 같은 생활을 지속해 오던 우리들은 정리할 서류도 서로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안녕 없이 우리 사이는 마무리 됐다. 이건 흡사 완성되지 않은 어중간한 문장 같기도 했다. 

헤어졌지만 우린 가끔 만나 집에서 섹스를 했다. 

헤어졌기에 우린 다른 사람을 만나 연애도 했다. 

헤어졌지만 우린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가끔 주말 점심을 같이 해 먹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헤어졌기에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친구 민석이에게 이야기하면 민석이는 미친놈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마지막은 목소리를 낮춰 늘 나에게 속삭였다.

“... 아 미친 새끼. 야 졸라 부럽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애매한 관계에서 발을 완전히 빼지 않는 이유?

나도 그걸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내가 내린 합리적인 핑계는 ‘나도, 지연이도 둘 다 아무 말하지 않고 있으니까’ 정도였다. 

까놓고 말해 당장 결혼할 생각이 없는 혼기 찬 남자 여자, 그것도 서로 과거를 공유한 사람이 편하게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타인의 귀에 흘러들어 갈 일만 없다면 아무리 무거운 도의적 책임일지라도 비밀에 부쳐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난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 미안해야 한다면 연애를 하면서도 나를 만나 뒹구는 지연이가 나쁜 년 아닌가. 그래서 덜 미안해했다. 

2년 정도의 연애란 생각보다 많은 추억을 남기고 서로에게 스며들어있는 법이라 새로운 사랑을 하더라도 가끔씩은 내가 생각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래서 날 찾는 거고 그런 지연이가 난 싫지 않은 거고. 

그렇다고 다시 서로 옭아매며 연애를 시작하기는 또 싫었다. 

‘지연이가 떠오르지 않을 만한 새로운 사랑을 곧 시작해야지..’

그날 저녁 지연이에게 카톡이 왔다.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단다. 

“이런 미친...”

나는 욕을 하며 답을 썼다.

축하! 행복하게 잘 살아라~

구질 거리게 보여서는 안 된다. 

‘네년이 날 즐긴 게 아니라 내가 널 즐긴 거야!’

난 아무렇지도 않다. 아주 덤덤하게. 그래서 더 열받아 쓰러지게..

내가 생각한 방법은 짧은 대답. 이게 다였다.

그 뒤로 지연이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집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바뀌는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지연이의 감정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정도가 딱 나와 지연이의 거리였다. 

“이기적인 년. 나쁜 년. 못된 년.”

민석이와 소주를 들이붓고 등신 중에 상 등신짓이라는 잘 지내? 카톡을 보낸 걸 안 다음날 머리를 쥐어뜯으며 민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연이 한테 연락 왔냐?”

“ 나 왜 안 말렸냐!”

“ 안 왔구먼? 사랑한다며. 사랑한다고 쓰는 거 내가 말렸어. 내가 너 살린 거다 미친놈아.”

“...... 하... 돌겠네.”

다행히 내가 보낸 글자 앞에 숫자 1은 없어지지 않았고 일주일이 넘을 때까지 숫자 1이 없어지지 않는 걸 보고 그제 서야 내가 지연이에게 차단됐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다행이다.

한동안 그 지연이년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 짐을 빼려고 했었다. 그때 집주가 사정사정하며 날 붙잡았다. 편의 최대한 다 맞춰 드릴 테니까 6년 정도만 살아달라고. 뭔 이유인지는 몰라도 꿍꿍이가 고대로 느껴졌지만 뭐 저렇게 사정사정하는데..

그래서 그냥 져주는 척하고 살며 갑과 을의 위치를 교묘하게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집주는 말도 참 많았다. 누가 보면 친구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주 연락을 했고 근처에 왔다며 같이 라면이나 한 끼 먹자고 똑똑 거리기도 했다. 라면을 끓여 같이 먹으면서 리모델링도 다 되어있고 괜찮으니 신혼집으로도 좋을 거라고 말을 하더니만 신혼집 분위기와 비슷하게 벽지며 화장실도 좀 손을 봐주겠단다.

자기가 다 돈을 댈 테니 편안하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계획하라는 집주에게 나는 슬그머니 물 컵을 내밀었다. 가지고 있는 물 컵 중 가장 비싼 도자기 물 컵으로. 

집을 여기저기 손 보고 일도 새로운 연애도 좀 잘 되어간다 하는 찰나 집주는 나에게 통보했다. 급하게 집을 좀 빼줘야 할 것 같다고. 

결혼을 한단다. 지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해서 미안하다면서 청첩장은 만나서 주겠다는 집주에게 난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소심하게 반항했다.

“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6년 정도 살아달라고 그때..”

“ 아 제가 생각보다 결혼이 앞당겨졌어요. 상황이 좀 그렇고.. 

뭐 자세한 건 말하기 그렇지만 사정상 제가 이 건물에 들어오는 게 나은 상태라. 

미안해요 정민 씨.”

“......”

“ 아 그나저나 언제가 편해요. 청첩장 들고 갈게 그날 소주 콜?”

“... 축하드립니다.”.

축하란다. 이 얼마나 지질한 사내의 대꾸인가.

그날도 술을 퍼먹고 지연이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 썸 타는 수진이가 아닌 지연이에게.

불러도 대답 없는 그녀에게.. 보내도 읽지 않는 카톡을... 보냈다. 

괜찮다. 어차피 읽지 못하니 이건 나만 아는 굴욕 아닌가.

주기적으로 굴욕의 시간들이 내 공간을 휘감았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이건 구질구질한 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계시 같았다.

혼자 생활하는 사람한테는 일정한 루틴이 가장 중요하다. 그게 없으면 한순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회사 흡연실에서 만난 3년 선배 황민철은 가정적인 남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전자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를 얼굴로 휘감으며 민철 선배가 말했다.

“ 야 결혼을 왜 하는 것 같니? 조련이야 조련. 결혼은 책임감이라는 말 알지. 

근데 그거 잘 생각해 보면 서로를 조련하는 과정이거든. 

난 이거 절대 싫다. 그러니 하지 말아 달라. 내가 싫은 건 이거다. 너도 이건 하지 말라. 블라블라 조련이 곧 결혼이다 이거야,”

“ 아 선배님 결혼을 까는 겁니까. 옹호하시는 겁니까. 하하”

“ 난 오브콜스~옹호지.”

“ 지금까지 혼자 살았으면 더럽게 늙었을 걸? 내 퇴폐미를 조련해 준 게 내 와이프잖아. 크크.”

회사 흡연실에서 뭐 저딴 얘기를. 나는 회사 선배랍시고 말에 장단을 맞춰주면서도 대화의 핵심을 짚어내기 힘들었고 결국엔 일방적인 대화로 급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그는 회식자리에서도 종종 자신이 결혼 안 하고 혼자 나이 들었다면 이상한 짓거리는 다 했을 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민철 선배의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만 같아 불쌍했다. 

혼자는 편하다. 아무리 늘어져있어도, 아무리 더러워도, 뭔 짓을 해도 혼자 있기 때문에. 터치할 사람이 없으니 찔릴 필요도 없다. 그러다 정신을 못 차리고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다 보면 온몸에 덕지덕지 지방덩어리를 달고 나이 들어가게 된다. 나처럼. 

그리고 한 순간 불안해지기도 한다. 불안과 회의는 소리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오곤 하는데 시간과 공간 개념 없이 우후죽순이다. 

회사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비대한 몸을 진지하게 마주하게 된다거나. 

주말에도 아무 의욕 없이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야동을 보고 자위를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 때, 친구가 주선한 여자와의 대화에 무의식적으로 하품을 할 때, 심지어 대변을 볼 때..

나는 오래간만에 엄마에게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엄마 나 요새 살 많이 쪘어?

늙었다보기 흉하네인스턴트 많이 처먹으면 인스턴트 인생 된다.     

엄마의 문자를 보자 갑자기 집이, 내 방이 그리웠다. 이렇게 살다가 정말 폐인이 될 것 같아 정신 수양을 한다는 명목 하에 집으로 복귀했다. 이번에도 쿨 한 내 가족은 나를 환영하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나는 40kg 캐리어와 기내용 캐리어 하나, 백 팩 하나에 짐을 챙겨 올라갔다.       

“ 시간 맞춰 왔네? 밥 먹자.”

슬쩍 보니 방에 쓰던 이불이 고대로 펼쳐져 있다.

“ 대단하다. 엄마 그 시간 동안 내 방은 어떻게 이렇게 그대로 둬? 관심이 없는 거야? 뭐야?”

“ 이렇게 기어들어올걸 뻔히 아는데 다시 손보려면 그게 더 귀찮아.”

“ 들어올 줄 알았어?”

“ 결혼 안 하면 기어들어오겠다 싶었지. 내가 널 모르냐.”

“ 엄마 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뭐 캥거루족이다 뭐 이런 느낌 아닌 거지?”

“ 캥거루 새끼는 귀엽기라도 하지 80kg 캥거루새끼가 어딨냐. 넌 그냥 아들새끼지.”

혼자 살면서 집에는 자주 오지 않았다. 주말마다 바빴고 시간이 지나자 귀찮기도 했다. 오래된 집 냄새가 나는 방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막상 가면 뭘 해야 할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들러도 한두 시간 있다가 급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일원임을 상기시켜 주는 딱 그 정도. 

그때마다 모두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쿨 하게 보내준다는 행위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지연과 연애를 하면서 몸소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가 지금껏 해오던 짓거리들을 내 자식들을 통해 재방송처럼 보게 됐을 때 쿨 하게 바라봐줄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런 반문 역시 지연과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이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집을 나온 뒤 나는 예전보다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만큼의 공백이 있던 공간이지만 몇십 년 동안 커온 집이라고 일주일 만에 난 또다시 이 공간에 완벽하리만큼 적응했다. 

엄마는 또다시 잔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쿨하고 시크한 이상한 매력을 내뿜었다. 

결혼한 동생은 가족 대소사를 제외하고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조련당하는 중이겠거니 생각했다.

거래처 직원과 미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형!”

“ 정환아. 근처면 나올래? 맥주나 한잔하자.”

“ 나 지금 수정이 운동 가서 애 봐.”

“ 고생이 많다.”

“ 형, 30분 뒤면 수정이 오는데 어디 들어가 있어 나도 형 핑계 대고 잠깐 바람이나 쐬게.”

아내의 여가시간을 위해 내 동생이,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정환이 이 자식이 아기를 보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결혼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조련방법임이 확실하다.

우리는 자주 가던 치킨 집에서 닭 한 마리와 소주 한 병, 생맥 두 잔을 시켰다.

“ 역시.. 소맥에는 양념치킨이지.”

“ 아 형. 반 반 시켜!”

“ 정환아. 너도 이제는 좀 인정해라. 이 양념의 맛과 소맥의 어우러짐이 얼마나 찰떡궁합인지.”

치킨을 먹을 때마다 투덜거리던 정환이었지만 결국엔 양념 묻은 손을 쪽쪽 빨아가면서 오만가지 표정으로 맛있음을 표현하고 만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 형 그런데 우리처럼 술 더럽게 먹는 사람 어디 있나 테이블을 한번 봐봐.”

“ 크크크 원래 술은 사람을 더티하게 만들어. 옆 테이블이나 앞 테이블.. 저 뒷 테이블.. 고고하게 앉아 홀짝거려봤자 나갈 때는 다 더럽게 취하고 더럽게 비틀거리고 더럽게 꺽꺽거리고 더럽게 냄새 풍기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그러니까 소맥에는 양념치킨이다!! 마셔!!!”

나와 정환이는 죽이 잘 맞았다. 3살 터울이 나서 늘 겹쳐버리는 입학식, 졸업식 참석도 간단명료 쿨 한 부모님 덕에 아무런 갈등 없이 지나갔다. 

“ 가위바위보해! 입학식이든 졸업식이든 이기는 놈 쪽으로 간다.”

어느 집에나 자격지심 심한 자식 한 명이 있다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그런 게 없었다. 아마도 배 째라! 방법으로 아이를 키워온 엄마의 계략 때문일지 모르겠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 살만하냐. 어때 제수씨는 요새도 우울해해?”

“ 뭐 그렇지.. 운동하면서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저녁에 나가는 게 소원 이래서 운동도 일부러 저녁에 가는데 그 한 시간은 도와줘야지. 

답답하긴 하겠지 그렇게 활동적인 애가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보고 집안일 하고 그러는데.”

“ 일 다시 안 한대?”

“ 회사 사정도 그렇고 지금 집에서 채아 돌보기도 바쁘잖아. 엄두를 못 내더라. 둘째 생길까 봐 걱정하는데 뭐. 형은 결혼생각 없어? 지연누나랑은? 아직 연락은 한다며”

“ 뭐.... 이제 안 해. 유부녀한테 뭔 연락을 해.”

“.... 뭐가 뭐야? 결혼했어? 언제 결혼을 했대 그 누난? 그나저나 형 눈빛이.. 사연 있어 보인다?”

“ 그냥 헤어졌는데 가끔 연락은 했다가 결혼했고 뭐 끝난 거지 뭐.”

헤어졌는데 만나 섹스도 했다는 말을 동생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남남인 친구한테도 하면서 피 섞인 가족에게는 입이 쉽게 안 떨어지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 

“ 잘했어. 결혼한 사람 아직 생각하는 그런 헛짓거리 안 하지?”

“ 에라이. 무슨.” (형... 아직도 헛짓거리다. 가끔 생각난다 어쩌냐.)

“ 결혼하면 선배라는 말 몰라? 나 결혼하고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느끼는 중이다... 형...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더 놀고 즐기고 마시다 해.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게.”

“ 크크크 본심 나오는 고만! 몇 시에 들어가야 해?”

“ 12시까지 허락받았지!!!! 형이라고!!”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동생을 보며 ‘너도 잘 조련받고 있구나.’ 생각했다.

“마시자!!”

동생은 결혼 얘기를, 나는 연애이야기를 했다. 비슷한 듯 달랐고 다른 듯 비슷했다. 

이야기가 흡사 멈추지 않는 쳇바퀴 같다는 느낌이 들자 우리는 둘 다 짠! 을 외쳤다.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꼴리는 대로 하다 죽자아~~~”

오랜만에 소주냄새와 치킨의 양념 냄새가 셔츠에 스며들었다. 

“ 엄니~~ 정환이랑 한잔 했어요!!”

“ 정환이가 웬일이랴? 이 시간에 형이라고 또 뛰어 나갔구먼? 수정이 치킨 한 마리 사 들려 보내지 그랬어~”

“ 당연하지!! 보냈지!!”

“ 또 그런 건 안 시켜도 잘해요. 씻어. 밥은 없다!”

씻고 나니 술이 깼고 술이 깨니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걷고 싶었다. 

습기 머금은 새벽. 한산한 동네거리. 아직 불 켜진 집을 조용히 찾아보며 뭘 하고 있을까 감성에 젖을 수 있는 알맞은 시간이었다. 

‘아 이 냄새였지.’

솔직히 특정한 냄새가 기억나진 않았지만 분명 동네에서 났던 향기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유난히 나무가 많고 손대지 않은 자연은 이곳의 숭고한 시간 같은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자부심인가 이런 것도. 

내가 이 동네에서 애먼 짓 안 하고 그래도 밥벌이를 할 수 있게 자라난 것은 다양한 나무에서 내뿜는 피톤치드 덕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덕이 아니라) 지랄 맞던 성격이 온순해진 것도, 야동만 보던 새끼가 사람다워진 것도 다 동네에 그득한 나무 때문에, 피톤치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옆에 보이는 커다란 통나무에 손을 댔다. 어릴 때 판화 칼로 좋아하는 여자애 이름을 새기다가 경비 아저씨에게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있었다. 

“ 여전히 크네, 넌.”

혼자 웅얼거리면서 통나무를 두 팔로 살짝 안아보았다. 

“ 아 진짜. 저기요. 노상방뇨 안되거든요?!!”

“... 네? 저 오줌 안 쌌는데요?”

“ 아니 동네에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아니 그게 제가 오줌을... 싼 게 아니니까!!!”

“... 뭐야 너 정민이 아냐?”

“ 네?!!”

이런 당황스러운 순간을 봤나. 어둑한 시간에 어두컴컴한 차림의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누군지 불분명했고 일순간에 노상방료를 하는 파렴치한으로 몰렸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 누구...”

“ 크크크크 야, 뭐야 나 기억 안 나? 나 지은이!!”

“ 6학년 4반 박지은?!!”

“ 대박. 오줌 싸는 널 발견하다니. 신기하다 야!”

“ 아 진짜! 나무를 느낀 거라고!!”

“ 뭐 좀.... 그러니?”

“ 뭐.... 좀... 그러니는 무슨 말?”

“ 느끼고.. 뭐.. 촉감변태 같은 것도 있다던데... 그런...... 건 아니지? 크크크”

말끝마다 크크크 거리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올 블랙으로 타이트하게 빼입은 와중에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볼륨감이 눈에 띄었다. 

모자를 쓰고 있어 시선이 다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 신기하다. 나 요기 살아. 학교 다닐 때부터 쭈욱 여기 살았는데 왜 너 못 봤지? 

오다가다 동창 애들 만나긴 하는데. 이 시간에 자주 나와? 난 이 시간이 늘 퇴근이라.. 지나가다 만나면 인사하자!! 간다~~”

이기적인 계집 애. 지 말만 하고 내빼다니. 

지은이를 보자 이기적인 지연이가 살짝 스쳐갔다. 지은이는 결국 자기는 어디 사는지. 자기 퇴근시간이 언제인지를 지껄이고 사라졌고, 난 노상방뇨를 하는 촉감변태로 기억될 것이다. 

옷을 킁킁거렸다. 술 냄새와 양념치킨 향이 아직 입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아씨.. 이를 안 닦았지.... 아... 겁나 심하네. 이 양념치킨냄새...’

지나게 되는 곳곳마다 추억이 떠오르는 건 나나 친구들이나 비슷할까?

그윽하게 통나무를 한 번 더 바라보다 쓸데없이 센티해지는 것도 병이다 싶었다. 

‘주말에는 목욕탕이나 가야겠다.’ 말끔하게 몸을 씻고 한 주를 시작해야지. 

나는 스스로를 조련하는 중이니까. 애써 주말 계획을 잡으며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40분. 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네?.. 12시.. 40분...’     

금요일. 금요일마다 회식을 잡는 박 팀장. 유배라도 보내고 싶다. 

회식이 끝나고 시계를 봤다. 12시 20분. 

나는 통나무가 보고 싶은지 지은이가 보고 싶었는지 굳이 빙 돌아 집으로 향했다. 

정확히 12시 30분 즈음부터 통나무를 중심으로 같은 길을 여러 번 반복해 걷는 중이었다. 괜히 주변을 의식하며 노래도 흘러나오지 않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척했다. 

난 지은이를 보려고 어슬렁거리는 게 아니다. 잠시 술김에 본 그 가슴이 생각나서가 아니다. 그냥 오늘 유난히 잘 어울리는 블루 톤 와이셔츠를 입었고, 유난히 왁스 질이 잘 돼서 회사에서 보는 사람마다 머리스타일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고 유난히 괜찮은 사람같이 느껴지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맨 정신으로 지은이를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었다.

또각또각. 일부러 여유 있게 한 텀 늦게 고개를 까딱이며 뒤를 돌아봤다.

지은이다.

“ 어? 너도 이 시간에 퇴근하네? 또 술이니?”

“ 엇어~~~!! 또 보네?”

“ 연기 안 되는 건 여전하구나? 딱 나 기다린 사람 분위기다?”

“ 어?!”

“ 뭘 또 어?! 농담이야 농담. 너도 퇴근 늦다? 회식이야? 난 프로젝트 시작한 게 있어서.. 매일 이렇다.”

“ 결혼,,”

왜 이 순간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39살이라는 나이는 결혼과는 무관할 수 없는 그런 글자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맥락 없이 결혼.. 

‘뭐 어쩌자고. 했으면 어쩔 거고 안 했어도 어쩔 건데.’

“ 아.. 결혼? 안 하니까 이렇게 일을 하지. 결혼하면 이렇게 늦게까지 일을 어떻게 해.”

“아......”

“ 넌.. 안 했지?”

“ 어?!”

“ 뭘 또 어?! 대답을 해 대답을. 왜 이렇게 당황하니 13살짜리 남자애처럼 크크”

“ 아.. 난....”

잠시 주춤거릴 틈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은이는.

“ 다녀왔어 한번?”

“ 응? 아.. 아니~안 했지 뭐. 어쩌다 보니까 뭐. 요새 뭐 결혼이 필수도 아니고...”

“ 그렇지 뭐.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니까. 그래 뭐, 지금 우리한테 결혼얘기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하~~~ 음. 진짜 피곤하다. 피곤한데 캔 맥주나 한잔 할래?”

“ 피곤하다며.”

“ 피곤할 때 캔 맥주 원 샷 하고 들어가서 샤워하고 누워봐. 바로 숙면이야. 뭐야 아마추어처럼~”

“ 크크크”

“ 왜 웃어!”

“ 아.. 갑자기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잠만 자러 들어온다고.”

“ 아... 우리 엄마도 그래. 어머님도 안녕하시지? 너희 어머님은 오며 가며 주말에 자주 마주쳤는데. 인사도 한다 우리. 어머님은 진짜 소녀 같으셔.”

“아. 우리 엄마 필러 맞아.”

“아.... 우리 엄마는 보톡스.”

“넌?”

“ 난 안 하는 게 없지. 크크크 40 되기 전에 관리 안 하면 한 번에 훅 가는 걸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자주 봤는데. 

돈은 쓸라고 버는 거야. 막 벌 거야 막 쓸 거야! 그런 의미로 내가 오늘 동창한테 캔 맥주에 과자 한 봉지 쏜다 크크!!”

“ 얼씨구...”

단 30분의 시간 동안 이렇게 가까워질 수도 있는 건가. 그것도 20년 만에 만난 친구가. 지연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지은이가 너무나 진지하게 안주를 고르고 있다. 간단하게 한 잔 하자던 우리는 흐릿해진 기억들을 조각 맞추기 하듯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해 1시 30분이 다 돼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목욕탕에서 때나 좀 밀어야지.’ 

나는 나를 조련 중이다. 조금 더 깔끔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나만의 루틴, 주말 오전 목욕탕 행을 묵묵히 수행 중이다.

목욕탕을 갈 때는 최대한 구질거리는 몰골로 향해야 한다. 그래야만 뽕을 뽑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 기분이 좋아지니까. 나는 최대한 거지같이 남루한 몰골에 사방으로 뻗은 머리 고대로 나왔다. 

“어!!! 뭐야 너!!!”

김 달건. 달건이는 6학년 때 동창이었다. 본인이 슈퍼맨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학교 복도 창문 3층에서 뛰어내려 두 다리가 아작 난 미친놈.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중학교에서도 여전한 똘기를 이어가던 친구. 

대학생이 된 뒤 동창 모임 사이트가 한창 인기를 끌 때 만나 술을 한잔 먹은 게 전부였다. 

“ 와 진짜 몇 년 만이야!!! 은근히 동네에 애들 진짜 많이 남아있다니까! 나 어제는 지나가다가 민수 만났었는데. 민수 알지? 아직도 시험 준비 하더라. 8년째인 거 너도 알긴 알지. 아! 그거 알아? 요 앞 약국에서는 소진이 일 하는 거? 나도 얼마 전에 알았잖아. 친정엄마에게 아이 맡기고 약국에서 파트타임으로 일 시작했다고 하더라고. 와. 정말 세월이 이렇게 무섭다. 너 근데 몰골은 왜 그러냐 40 앞둔 사람 티 팍팍 내면서 다니고. 동네 이렇게 활보하면 못써 너”

특유의 똘기와 입담은 여전했고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기억했던 것보다 잘생긴 얼굴, 달건이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자 친구..

“ 아 소개가 늦었네. 여기는 내 와이프.”

“ 안녕하세요. 아 목욕탕 가는 길이라.. 제 꼴이 좀...”

“ 아 우린 병원 가는 길이야. 임신 중이거든. 아직 초기라 병원에서 검사할게 많아. 대기시간도 엄청 길고. 우리가 좀 늦었지 빨리 낳아서 키워야 하는데 언제 키우냐... 넌 초등학생쯤 됐어? 애들 보니까 10살짜리 키우는 애들도 좀 있긴 하더구먼.”

“ 아... 난 아직 뭐.. 아직 연애 중이라.”

“ 올......... 미혼이야?!!”

“자기야 나 병원.. 예약시간 늦어.”

“ 아 미안 자기야. 나중에 얘기하자. 잘 다녀오고.”

달건이도 열심히 조련받는 중이군. 

함께 술을 먹었을 때, 달건이는 나에게 영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그 꿈을 이뤘는지 궁금했다. 

민수.. 민수는 조용한 친구였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식은땀이 흘러 등이 다 땀에 젖던 친구. 민수와 집 방향이 같아 자주 붙어 다녔고 엄마들끼리도 친해서 따로 가족여행도 다녀온 꽤 돈독한 친구였다. 민수는 6학년 졸업식 날 지은이에게 좋아한다는 쪽지를 줬었다. 대답은 못 받았지만.. 중학생, 고등학생 때도 학원에서 지은이에게 줄곧 쪽지를 건넸다. 그리고 줄곧 대답을 받지 못했다. 

불쌍하고 짠했던 자식이 지금도 짠한 모습으로 고시원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니...

언제 한번 민수 이 자식은 몸보신이라도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유인이다. 나를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유일한 사람, 나뿐이다. 

그러니 지금 제일 잘 나가는 건 나다 나.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어깨를 한 번 쫘악 폈다. 

솔직히 그랬다. 유부남보다는 미혼남이, 아이 손을 잡은 아빠보단 여자 친구 손을 잡은 애인이 더 그럴싸해 보였다. 그중에도 제일 좋은 건 뭐든지 가능한 혼자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신경 쓰지 않던 옷에 더 신경을 쓰고, 주변을 괜히 한 번 더 의식하면서 동네로 진입하던 게. 퇴근하는 길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를 동창들에게 꽤나 멋진 모습으로 각인되고 싶은 건 단순한 나의 대리만족이었다. 

어릴 때 바지에 김칫국물이나 흘리며 다닌 지질한 아이가 아니라 누가 봐도 눈 길 가는 그런 멋짐을 풍기고 싶다고나 할까. 일명, 수컷냄새.

퇴근길, 소망약국 앞에서 삿대질을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인성 자체가 바닥이에요라고 온 사방에 떠들어대는 사람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조아리고 있는 건 바로 소진이었다. 

‘모르는 척 다가가 뭔 이리 몰상식한 분이 다 있냐고 소리를 좀 낼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를 할까.. 아니면 약국 지금 하는 중이냐고 질문을 던져볼까...’

소진이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나는 재빠르게 모른 척 휴대폰으로 고개를 내렸다. 친구에 대한 배려. 

그 상황에서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내내 찜찜했다.

진흙탕에 소진이만 내버려 두고 냅다 도망간 기분.

오랜만에 달건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소진이를 물어볼 심산이었다. 

달건이는 우리 동네 동창들 이야기를 다 아는 것 같았다. 수진이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중이란다. 아이 때문에 지각을 자주 한 것 같단다. 아이가 아프단다. 달건이는 그 약국에 납품을 하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란다. 꿈을 이룬 거구나 달건이가. 기특한 자식.

소진이의 야무진 표정이 떠올랐다. 13살의 야무졌던 소진이. 지금 세상에 이혼이 뭐 흠이냐고 혼자 생각하다가 그래도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게 쉽지는 않겠다 걱정을 하다가 또 내가 무슨 이런 걱정까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이 동네에 다시 온 이후부터 자꾸 13살의 정민으로 되돌아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공간의 시간은 흐르고 공간 속에 부유하는 그들만의 의미들은 켜켜이 쌓여간다. 

달건이의 유산소식과, 민수의 합격소식, 소진이 아이의 입학소식이 내 인생의 작은 일부인양 품으며 나도 내 공간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나갔다. 

나는 요즘 들어 부쩍 회사를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미친놈 엔진에 또 발동이 걸렸구나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직을 고려하는 이유가 고가점수가 낮아 동기보다 월급이 많이 적기 때문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곱씹어보니 쉬운 게 이유였다. 상대적으로 결정이 어렵지 않았으니까.

경력자로 이직은 어렵지 않았다. 딸린 가족이 없어서 부담도 적었다. 연봉을 줄여서라도 지향점이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보며 선택할 수 있는 선택 자유권도 있었다. 

퇴근길, 혹은 집에서 있다 12시 30분쯤 되면 슬렁슬렁 근처를 돌았다. 

10번 중 9번은 지은이를 만났고 그때마다 우리는 간단한 수다를 떨거나 시간이 괜찮으면 캔맥주 하나를 놓고 일상이야기를 했다.

가끔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가벼운 저녁도 먹었다. 그럼에도 애정은 배제할 수 있는 이성이란 게 존재하는 남녀 사이었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심심하면 언제 종로로 놀러 와. 점심이나 먹게.”

“ 점심?”

“ 너 회사 쉬고 있는 거 아냐? 이직준비?”

내가 이걸 말했었나? 얘가 이걸 어떻게 알아?

“ 티 나냐?”

“ 티가 안 나겠니 그럼? 애가 멍해지고.. 눈깔이 썩은 동태처럼 흐리멍덩해 보여. 그건 딱 보여. 특히 나같이 예리한 사람한테는 크크크”

“ 그 정도야?”

“ 농담이고. 패턴 비슷하던 애가 다르니까 이직준비든 뭐든 있나 보다 했지. 이직은 찍은 거고.” 

일이 해결되면 이야기하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가족들은 당연히  알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느 때처럼 쿨 하게 넘어가며 자식 놈의 인생이 잘 흘러가기를 기다려 주는 중일지도.     

“응 아직 젊으니까 계획대로 잘 보내봐야지.”

“ 계획은??”

“ 음.....”

“ 계획을 한다고 다 이뤄지디? 계획 없이 하루하루 열심히 돈 버는 게 내 삶의 모토다. 계획 꼼꼼하게 하는 애들치고 공부 잘하는 애들 없었고 잘 되는 애 없었어. 원래 간도 크고 통도 크고 뭐든 지 꼴리는 대로 밀어붙이는 애들이 뭘 해도 잘돼. 나처럼.” 

“ 너 애가 좀 전투적이다? 원래 이랬나?”

“ 응 나 좀 골 때리잖아.”

지은이와 자주 가는 동네 작은 편의점 테이블 위에 우리가 자주 먹는 과자 한 봉지가 바닥을 보였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지연이다. 

전화번호는 지웠지만 잊혀지지 않는 번호가 밝은 휴대폰 화면 위에 둥둥 떠 있다. 

나는 지은이를 바라봤다. 나에게는 아무 관심 없이 손가락으로 과자 가루를 찍어 쪽쪽거리는 지은이를. 

그리고 수신거부를 눌렀다. 아싸 복수를 했다. 드디어 복수를 했다. 

“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게 상책이지.”

지은이가 과자를 정리하며 웃는다. 

오래된 공간을 새롭게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걸었다. 

내일은 종로에서 지은이를 만날 것이다. 오후 12시 30분 종로에서 지은이를 만나는 건 처음이다. 가장 잘 어울리는 블루 셔츠를 입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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