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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희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약국을 발견했다. 

오른쪽 엄지로 명치 쪽 브래지어 중심부를 살짝 들어 올려 인위적인 숨 공간을 좀 더 넓혀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배 쪽으로 손을 내린 희영은 생각했다.

‘역시.. 돈가스는 점심으로 영 아니었어.’

직장인들의 평생고민, 점심메뉴. 

회사에 떡하니 구내식당이 있으면 메뉴 선택 같은 에너지 낭비는 덜어져야 옳은데 이상하게 이 팀은 고민을 사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점심이 되기 한참 전, 팀에 누군가는 메뉴를 슬쩍 던져본다.      

근처에 돈가스 집 새로 생겼다던데? 다들 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화합을 위해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대단한 그들..

그들은 재빠르게 타자를 치면서 일과 잡담이 구분되지 않도록 무표정한 연기를 잘도 해낸다. 머쓱한 표정, 당황스러운 기색은 늘 희영의 몫이었다. 희영은 좋아요, 네, 콜!!, 우와 너무 맛있겠다. 벌써 군침이 돌아요. 같은 같잖은 대답들을 멀뚱히 보고만 있다가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짧게 동조를 해버리고 창을 닫아버린다.


희영은 사실 1년 365일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 혼자 고요히 밥알을 좀 음미하면서 점심시간으로 주어진 한 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었다. 일주일 다섯 번이나 꽉 채워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건 죽을 맛이라고 팀 사람들은 이야기했지만 희영은 한결같았다.

 ‘도대체 왜? 이 공간이 얼마나 꿀 공간인데?’ 

희영은 구내식당에서 먹는 밥이 꼭 집에서 먹던 엄마의 밥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집에서 혼자 밥을 간신히 씹어 삼키던 기분도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곤 했는데 우울과 행복이 교차되는 이런 완벽한 감정상태의 모순이 이상했다.  일종의 현대정신병 일종인가? 그나저나 오늘도 미친 듯이 흡입하고 커피 한잔씩 들고 벤치 행을 하겠군..희영은 먹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서 속도를 따라가려 해도 팀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긴 힘들었다. 일찍이 밥을 먹고 서로를 보며 가벼운 농담이나 일상이야기를 하는 동안 희영은 대화에 흡수되지 못한 채 결승전을 다해 내달려야 했다.

“희영 씨는 밥을 녹여 먹나 봐.” / “희영 씨는 밥을 천천히 먹어서 살이 안 찌나 보다.” 같은 우스갯소리의 말들은 늘 희영의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희영은 다들 돈가스 세트를 시킬 때 그나마 빨리 먹을 수 있는 냉메밀을 시켰지만 결국에는 이번에도 같은 메뉴로 통일. 

같은 메뉴를 시켜야 빨리나 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니까. 이번에도 속도전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여전히 식당통일, 메뉴통일 같은 직장인의 논리로 교묘하게 민주주의를 잘근잘근 짓밟는 직장상사는 존재하는 것이고 자신같이 그걸 말없이 따르는 등신 같은 부하직원들도 역시나 존재한다고. 그렇기에 이 사단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희영은 생각했다.

‘등신. 그래서 어쩔 거야. 점심 때문에 회사 때려치우려고? 등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거면서 아무도 없을 때 까대긴.’

희영은 우르르 몰려나오느라 미처 보내지 못한 메일을 협력사 직원에게 빠르게 전송 한 뒤 곧바로 여행 앱을 켰다. 뭔가 답답하다 싶을 때 자연스럽게 여행 앱을 열어 여행지를 검색하는 것. 꽤나 괜찮은 해소방법이었다. 대리만족도 느끼고, 눈요기도 하고, 돈은 굳고 마음은 홀가분한 상태. 이 얼마나 건강한 시간소비인가. 

언젠가 떠날 여행지를 미리 보기 하는 기분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내키면 사직서 날려버리고 바로 떠날 수도 있는 게 바로 안희영, 자신이라고 희영은 늘 확신했다.

약국에 들어간 희영은 소화제 한 병을 샀다. 계산을 기다리는 그 찰나 희영의 눈에 ‘폐경기 여성을 위한 영양제’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문득 희영은 생각했다. 폐경기, 여성, 영양제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저렇게 영양제를 먹어가면서까지 굳이 여성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희영의 시선이 한 곳에 오래 머물자 손님 없이 한적한 작은 약국의 약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젊어서 저런 단어 이상하죠? 폐경기”

희영은 속마음이 다 까발려진 것 같아 괜히 민망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생리할 때는 귀찮고 끝나면 또 아쉽고. 참 이상해요 저게”  

희영은 더 이상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생긋 웃어 보이며 남은 소화제를 먹었다. 

희영은 약사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생긋 웃어 넘기기만 한 게 너무 새침한 행동이었나 생각하며 살짝 뒤를 돌아 약사의 얼굴을 봤다.  약사의 시선이 희영과 마주치자 당황한 기색을 대놓고 풍기며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걸었다.  

희영은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희영의 엄마는 아빠와 실컷 싸우고 나서 식탁에 앉아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보였다. 아무리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엄마였기에 희영은 그날의 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잔상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방 안에서 조용히 거실 식탁의자에 앉아있는 엄마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던 24살. 신체는 성숙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뭔가 불안정하던 24살 그 언저리..

희영의 엄마는 불안정한 폐경기를 맞이하는 중이었고 희영은 엄마의 우울감과 상실감과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고 허무해 보이던 표정을 애써 외면했었다. 그 감정까지 희영의 몫으로 떠안기는 죽기보다 싫었었지..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때.. 희영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24살 희영과 50살의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폐경기.. 꼭 나 같은 단어네...”


사실 희영은 홀가분하게 떠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은 삶의 한가운데 화석처럼 단단히 굳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체념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버텨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희영은 하루에 한 번꼴로 싸워대는 부모님을 중간에서 도와야만 했다. 그들이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게. 고성이 오가고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나고 둔탁한 폭력의 소리가 들리고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악으로 꿀꺽거리는 엄마의 죽을 것 같은 소리가 방 문 밖에서 들려올 때 즈음 희영은 거실로 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중재해야만 했다. 딱 그 정도 순간에 나가야 빨리 마무리된다는 걸 이제는 경험으로 터득했으니까. 처음에는 울고불고 소리쳤다. 누구 하나 죽어야만 끝날 것 같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간신히 견뎌내며 애원할 때도 있었다. 내가 너무 힘들다고. 내가 너무 무섭다고. 제발 그만 좀 하라고. 

그럴 때마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면서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았다. 결혼 생활 20년이 넘어서도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게 사랑인 것일까 병인 것일까 진지하게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날이면 희영은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 에서나마 여행을 떠나면 전 날의 악몽이나 우울감은 희석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희영은 더더욱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늘 꿈을 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즐거운 대학생활, 행복한 연애질, 아르바이트며 취업준비..

다른 친구들의 대학생활과 희영의 생활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달랐다. 

혹시 이상한 마음을 먹고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지 늘 노심초사하며 엄마나 아빠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남겼고 그런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과 관계가 너무 좋다고 부럽다고들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희영은 마음속으로 알 수 없는 비소를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완벽하게 자신의 가족을 포장하겠노라고.

저녁시간만 되면 동시에 뭐에 홀린 듯 으르렁 거리는 부모님. 그들의 웃고 있는 표정을 잘라 포토 앱으로 합성해 붙였다. 서로가 없어야만 웃는 그들을 처참하게 잘라 붙이고 다듬으면서 하나로 완성시키자 희영의 무표정한 표정이 움찔거렸다. 

“.. 씨발 그렇게 싫은데 도대체 왜 안 헤어지는 거야 그럼.”

간신히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카톡 프로필에 가족 가진 이랍시고 사진을 올렸다.  편집기술은 예술이었다. 장소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각기 다른 곳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환하게 웃음 짓던 희영과 아빠 엄마. 다양한 꽃들이 가득한 곳에서 희영의 가족은 활짝 웃고 있었다. 희영은 편집한 사진을 바라보며 이제야 드디어 자신도 가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포장하기에 이 정도면 딱 만족스럽군, 됐어.” 

희영의 부모는 서로 죽기 살기로 생채기를 낸 다음날, 어김없이 희영에게 평화로운 카톡을 보냈다. 아빠는 희영에게, 엄마도 희영에게.     

우리 딸 희영아, 네가 오늘 엄마 잘 좀 살펴봐줘라. 오늘도 파이팅.

희영아 아빠한테 연락 한 번 해주고. 아침 안 먹고 가서.     

‘미쳤어 정말. 다들 어떻게 됐나 봐 진짜. 읽고 씹는 게 뭔지 보여주지!’

희영은 생각했다. 감정의 뒤치다꺼리는 왜 항상 자신의 몫이며 밟혀 문드러진 자신의 감정은 도대체 누구한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보상받아야 하는지 그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조용히 카톡을 읽고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이 희영이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였다. 

“젠장. 파이팅? 그걸 어떻게. 보살피라고? 날 좀 보살펴줄 수는 없는 거냐고..”

상황도, 방법도 어떤 것 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던 희영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런 진흙 탕 속에서 자신을 세워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없는 부모의 태도였다. 

20살이 넘은 자식에게 지속적으로 가할 수 있는 학대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생각했다. 

때론 그들이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기도 했는데 깊이 생각에 침잠하다 보면 덜컥 두려워졌다. 혹시나 홀로 홀가분하게 떠나게 된 날 경찰서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오지는 않을까.. 하는 어이없는 불안감. 

그런 불안감이 곧 희영의 하루였다. 희영이 고민 끝에 결론 내린 ‘하루를 잘 견딜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참고 또 참으며 감정을 무뎌지게 하는 것이었다. 

무색무취, 무표정 인간 안희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일찍 잠에 들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꿈을 꾸는 것.

희영은 매일 그렇게 주문을 걸었다.     


희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건 집에 외할머니가 오시고 난 뒤부터다. 띠디디딕 –  현관에 희영의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서있었다. 하나같이 시커먼 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있는 그들이 순간 그림리퍼(grim-reaper)처럼 느껴져 희영은 온몸에 자잘한 솜털들이 바짝 섰다. 희영의 아빠는 작은 짐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고 엄마는 자연스러운 척했지만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 희영아 할머니가 여행을 오셨어.”

“ 희영아~ 할미 여행 왔다.”

블랙을 사랑해 가방도 옷도 신발도 뭐든 블랙 구입비중이 높은 희영은 순간 블랙은 세련됨을 드러내는 대명사가 아니라 우울을 대놓고 보여주는 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할머니. 어릴 때부터 왕래가 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명절만큼은 늘 찾아뵀던 할머니였다. 2년 전 추석 즈음이었나. 희영의 할머니는 갑자기 오만 사람 다 지겹다며 가족들을 밀어냈다. 밀어냈다는 표현보다는 갑자기 패대기를 쳤다는 단어가 더 어울릴 수 있겠군. 

본인도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친구 만나고 연애하며 홀가분하게 남은 인생 살다 가겠다는 할머니를 온 가족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몇 날 며칠 음식을 해대고, 그걸 또 다 소분해서 돌아가는 길 여기저기 나눠주느라 정신없던 할머니 아니었던가.

평생 몸을 혹사시키며 살았더니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더러운 습관이 생겼다며 중얼거리면서.. 늘 일하느라 허리가 굽어있던 할머니 아니었던가. 

그랬던 할머니였으니까 정말 진절머리 날만큼 지겨워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말을 할 때도 됐다 싶었다. 무엇보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인사라도 건네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오해한다고 눈도 안 마주치던 할머니가 연애를 한다면야 춤추며 박수까지 쳐주겠노라고 생각했다.  

앞뒤 문맥 하나도 맞지 않는 이 상황을 가족들이 너무나도 쉽게 수긍했던 이유를 희영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가장 속 편한 대응은 무관심이니까. 

가족을 하나 둘 밀어낸 건 할머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던 초기였던 것 같다고 언젠가 희영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계속했다.

희영은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애써 민망함과 수치심을 감추려 한다는 것을. 

더 극성스럽고 밝게 행동하려 노력하는 중이라는 걸. 가족은 할머니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희영은 할머니의 여행지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한 번쯤 다시 오고 싶은 그런 여행지로 마음에 깊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희영이의 아빠를 예뻐했다. 자상하고 엄마를 곰살갑게 챙기는 게 자기 할아버지랑은 딴판이라며 칭찬했다. 그런 칭찬을 받는 희영의 아빠는 늘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희영의 엄마도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장단을 맞춘다는 게 희영은 소름 돋았다. 할머니는 건넛방에서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보는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왼쪽 이어폰을 뽑아 자기 귀에 꽂더니 자그마하게 말했다.

“다 안다 희영아. 할미는 다 알아. 우리 희영이 잘 알지 그럼 잘 알고말고.”

희영은 노랫소리에 묻혀 정확하게 들리지도 않았던 할머니의 말을 분명 그렇게 들었다. 

할머니는 희영의 귀에 이어폰을 다시 꽂아주며 말했다.

“할미가 도와주러 갈 거야. 할미가 우리 손녀 힘들게 안 해.”

이어폰이 희영의 귀에 다시 꽂히자 할머니의 목소리는 묵음이 됐고 신나는 음악이 귀 안을 뒤덮었다.

할머니의 입모양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할머니가 드디어 나를 도와주러 오신 걸까. 희영은 무음으로 오물거리던 할머니의 입 모양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희영의 집에 경찰관이 들이닥친 건 할머니의 증세가 점점 악화돼 가족이 당황하던 횟수가 잦아지던 여름밤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은 잘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 간혹 가다 알아봐도 몇 분 못가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몽둥이부터 찾았다. 

그래도 희영의 얼굴은 귀신같이 잘 알아봤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날 때마다 늘 중재인은 희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이용당하는 희영은 사태가 어수선 해질 때마다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날 언제 어떻게 도대체 뭘 도와준다는 것일까.’ 

그러다 보면 알 수 없는 체념과 짜증이 솟구쳐서 그 주체하기 힘든 감정의 싹을 죽이려 발악하며 무표정을 짓곤 했다.

‘역시 나란 인간의 운명은 이런 것이지. 어깨에 무거운 짐 하나 더 얹혀져야 안희영 인생이지. 남들 다 몰라봐도 나만 알아보면 그래.. 난 또 책임을 져야 하지. 그래야 하지.’ 

희영은 혼잣말을 하다가도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희영,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이. 그리고 저녁마다 짐승처럼 싸워대는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무표정, 이게 또 사람을 객관적으로 만든다? 요망한 것.’  

순간 거실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희영이 놀라 거실로 다가가자 할머니는 희영의 앞에서 아빠를 향해 보란 듯이 다시 한번 몽둥이를 휘둘렀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서 아빠의 뜨거운 피가 흘렀고 놀라 제지하는 희영의 엄마는 할머니에게 뺨을 맞았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아래층에 사는 이웃분이 올라왔고, 벨이 울려 희영은 문을 살짝 열었고, 그 사람은 꽤 많은 양의 피를 봤고........

꺅! 하고 소리를 지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마... 신고를 했었나 보다. 

같은 아파트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지겹게도 싸우는 집구석이라고 소문이 났을지도 모르겠지만 경찰이 집안에까지 오자.. 이제 볼 장 다 봤구나. 끝이 보이는구나.그들은 떠들어댔다. 동시에 어떻게든 가족을 포장하려던 희영의 에너지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감출 것도 감춰지지도 않은 희망 없는 상황. 손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경찰관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의 상태를 이해시키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고 이런 상황에 뭔 말을 더하겠나 싶던 희영의 부모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희영은 그들을 지켜보며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수치심일까. 분노감일까. 생각하는 찰나 팬티 위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졌다. 내려다보니 밝은 청바지 아래로 새빨간 생리혈이 보인다. 원래 첫날은 팬티에만 살짝 묻는 정도인데 오늘은 온몸의 피가 아래로 다 쏠렸는지 첫날치고는 양이 많았다. 밝은 색 청바지 아랫부분이 점점 선명한 피로 민망하게 물들었다. 

희영의 할머니는 희영 아빠 이마에 흥건한 피를 손으로 문질러 희영의 옷 여기저기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피가 희영의 하얀색 티셔츠를 그로테스크하게 만들었다.

“할머니! 뭐 하는 거야! 아 진짜!”

참고 참았던 희영의 분노는 할머니를 향해 폭발했고 할머니는 더 작아진 입을 오물거리며 쉬지 않고 희영의 곳곳을 문질러댔다. 

경찰관은 그런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말리며 희영을 향해 말했다.

“아구. 학생.. 가서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희영의 청바지에 묻은 생리혈은 할머니 때문에 아니, 할머니 덕분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옷의 무늬처럼.. 그렇게 무관심하게 흘려졌다.


그날 이후 동네사람들은 희영의 가족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할머니를 불쌍하게 바라봤고 관심을 빙자하며 조롱하고 쑥덕거렸다. 신기한 건 할머니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자 늘 화두가 됐던 희영의 부모에 대한 문제들이 조금 작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저녁시간 일 같지도 않은 자잘한 이유 때문에 에너지를 아깝게 낭비해 버릴 때 희영의 할머니는 벽에 똥을 칠하기도, 이상한 고함을 지르기도, 머리를 자르기도 했다. 

그 자잘한 이유보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해결하는 게 우선순위였고 할머니의 증세가 악화될수록 이상하게 희영의 집은 활기를 찾아갔다. 이런 잔인한 가족 같으니라고..

다른 사람한테는 생난리를 쳐도 희영에게만큼은 늘 작은 아가 대하듯 하던 할머니가 가끔 험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 이.. 청춘을 그냥 날로 버려버리는 병신 같은 년.” 

여행 한 번 안 떠나고, 남자하나 품에 못 안는 게 무슨 공부냐고 내 전공 책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아 진짜 할머니 욕 배틀 내보내야 될까 봐. 오늘은 또 왜 이러실까”

“귀하디 귀한 청춘을 골방에 갇혀가지고 지지리 궁상이나 떨면서 그리 축낼 셈이냐? 너 남자랑 너 뒹굴어보지도 못했지?”

“ 크크 아 진짜 할머니는 뭘 맨날 뒹굴래 나보고? 웃겨 진짜. 그리고 나 청춘 즐기고 있거든요? 할머니?”

“뛰쳐나가. 왜 안으로만 기어들어와? 어둑해지기도 전에 기어 들어와서 저녁밥이나 꼬박꼬박 처먹지 말고 나가라 이것아.”

“크크 할머니, 할머니 손녀 정말 남자랑 막 뒹굴고 다닐까?” 

“미친년. 뒹굴어 막 뒹굴어. 그렇게 집에만 처박혀서 살다가 평생 남자도 모르고 늙어 뻐려라.”  

“아우 나 그런 싸구려 아니거든?”
 “망할 것. 뒹굴어서 다 싸구려면 이 세상 애 낳은 년 놈들 다 싸구려 게?”

“ 연애가 뭐 대수야? 할머니 나 그런 거 안 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여행도 안 해. 무슨 내 주제에.”

“쯧쯧 그 몸뚱이 뭐에다 쓸 건데. 젊고 건강한 몸뚱이 하나 있으면 그만이지 왜 못 떠나. 등신. 청춘을 통째로 버려버리는 건 죄악이야 이것아.”

“오늘 또 물 만났네. 울 할머니.” 

“....... 졸리다. 할미 잘 거야.”

희영은 가끔 혼을 쏙 빼놓는 할머니가 좋았다. 

정신없이 연속 어퍼컷을 날리고 바람처럼 쏙 빠져버리는 할머니 스타일의 대화법도 꽤 마음에 들었다. 거침없이 쏟아내고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서는 일명 ‘내 멋대로’의 아이콘. 대리만족이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단 한 번이라도 날 향해 떠나라고 말 한 사람 있었던가.... 희영은 생각했다. 

늘 나를 움켜쥐고 도와달라 말하고 쪼르르 달려오게만 만들었던 가족들 속에서 굳어진 퇴적암 같던 사람이 안희영, 나 아니었던가. 

희영은 멀리 떠나라고, 남자랑 좀 뒹굴어보라는 할머니의 말이 소화제같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실컷 쏟아낸 말이 많은 날이면 말의 양과 비례한 양의, 독설의 농도와 비례하는 양의 잠을 잤다. 그러고는 한동안 또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희영도 예외 없었다. 희영은 놀러 온 낯선 처녀로. 희영의 아빠는 침입자로 희영의 엄마는 파출부로.. 그렇게 불려 지곤 했다. 

“엄마 왜 엄마보고 파출부라고 할까. 나도 아빠도 다 이해되는데 파출부는 좀 애매하지 않아?”

희영은 영혼 없이 물었다.

“네 할머니 평생 꿈이었어. 파출부 한 번 부려보는 거. 평생 주방에서 일만 해댔으니 그럴 법도 하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식당일 하면서 자식 다 키워냈고.. 정말 지겹게 주방에서 살고 지겹게 장보고.. 그러면서 무슨 파출부는..”

“사람 아무나 못써. 할머니는 절대 사람 쓸 타입 아닌데”

“그 한 이제야 푸시나 보다. 뭐 어떠니. 그 소원 나라도 들어 드리는 건데.”

덤덤하게 말하는 엄마를 보자 갑자기 희영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울면서 처절하게 말했던 말.

엄마 아빠 제발 날 봐서 그만해 줘. 제발 싸우지 말아 줘. 나 마음이 너무 힘들어.라는 그 어린 소녀의 소원은 완전하게 묵살된 게 맞는구나. 확인사살을 당한 것 같았다. 

삐비비빅.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고 이마에 커다란 밴드를 붙인 희영의 아빠가 들어왔다. 검은 봉지 안에는 소주 두 병이 들어있었다. 희영은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하는 자신이 애처로웠다. 소주만 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그 앞일을 불안해해야 하는 청춘이.. 너무나 불쌍했다. 떠나고 싶었다. 어디로든.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방법.. 

희영은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꽂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희영은 자신을 완벽한 소두로 만들어 주는 블랙 버킷했을 장만했다. 

소두로의 탈바꿈! 그게 핵심이지.

백 팩에다 속옷 두 개, 갈아입을 얇은 반팔 티 1개, 반바지 한 개, 실내복 하나를 구겨 넣었다. 인간실격, 멋진 신세계, 자기만의 방, 귀염 뮈소의 소설, 박상영의 퀴어 소설도 챙겼다. ‘이거.. 책 무게로 끝나겠군.’

생리대를 하나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 말아버렸다. 아직 가슴도 몰캉거리고 아랫배도 덜 팽창한 기분이니 일주일은 여유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체크카드에 500만을 이체시켰다. 언젠가 떠날지 모를 자신을 위해 조금씩 모아둔 돈은 벌써 천만 원이 훌쩍 넘어있었다. 입금만 있던 그 통장에 처음으로 출금 500만 원이 찍힌 날 희영은 통장의 출금 글자를 사진으로도 찰칵 남겨 놨다. 

1년 전부터 눈치 보며 어렵게 허락받은 2주 통 휴가! 다들 미친 거 아니냐고 소리쳤지만 남들 쉴 때 안 쉬고 남들 놀 때 안 놀고 나름 악착같이 모아놓은 휴가, 제발 이번만은 통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얻어내지 않았던가. 장하다 안희영! 

2주 동안은 어디든, 얼마가 들든 싸돌아다니겠다고 생각한 희영은 비행기 표가 아닌 KTX를 티켓팅한 자신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운전면허가 없는 희영은 온전히 뚜벅이 여행을 해야 했다. 지금 이 나이에 난생처음 국내여행을 하는 게 뭐 그리 설레는 일이고 대단한 일일까 싶으면서도 솔직히 희영은 이 여행 자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제야 성인으로서 독립을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딘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제야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 난생처음여행인데 차근차근해보자. 국내 찍고 해외도 찍자. 외국 못 나가본 거 그거 손가락질받을 일 아니다 안희영?!! 즐겨보자. 한 번 해보자고 너도.”

혼자 짐을 싸면서 연신 떠들어대던 희영의 눈앞에 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외치고 싶었다.

“할머니 저 드디어 떠납니다!! 할머니!! 저 오늘 좀 막 놀아볼게요!! 할머니 덕분에 나도 떠나네 결국. 고마워 할머니.”

희영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다 다시 짐을 정리했다. 

어디선가 여행자의 짐으로 초짜와 고수가 갈린다고 했다. 짐이 쓸데없이 많으면 하수. 짐이 단출하면 여행의 고수. 버리고 체념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인 것인가. 

희영은 작은 가방에 짐을 넣고 빼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애초부터 백팩 하나만 매고 다닐 짐을 쌓기로 생각했다. 뚜벅이라 짐 자체가 버거울 수 있었고 여행하수의 느낌을 풍기기도 싫었으니까. 

작은 백팩 하나에 꼭!!! 필요한 물건을 챙겨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고 싶었는... 데..... 이건 뭐 왜 이렇게 꼭! 필요한 물건은 계속해서 생겨난단 말인가. 

반팔티를 입고 다닐 거니까.. 겨드랑이 털도 좀 정리해야 하고 수영할 일도 있으려나? 수영복? 잠옷 따로 넣어야 하나? 쌀쌀할 때 대비해서 바람막이 하나? 피곤하면 곤란한데.. 영양제 하나 챙겨야 하나? 아 맞다 노트북. 배터리도 넣고.. 휴대폰 충전기랑...

가방 앞에 늘어놓은 짐들은 딱! 봐도 엄두가 안 나는 양이었다. 

‘고수는 무슨 하수 중에서도 탑 찍을 기세고만..’

희영은 고심하며 하나하나 짐을 치워버렸다.(던져버렸다) 

가방에 들어간 것은 책 5권과 윗옷 2벌 아래 1벌 속옷 2개. 클렌징제품과 선크림 끝!

필요한 건 그냥 쿨 하게 사버리겠노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여행 고수가 된 것 같았다.      


속초. 

희영에게 속초는 그냥 로망 같은 곳이었다. 

희영은 노트북으로 가끔 드라마를 켜 놨다. 어쩌면 드라마 시청이 주된 목적이라기보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합리적으로 감추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을지 모른다.

이어폰을 꽂고 화면을 한 시간 남짓 바라보다 보면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으니까.  

몇 회였던가.. 드라마 주인공이 애매하던 썸에 종지부를 찍고 연애에 돌입하려는 중반쯤 됐었을까. 커플은 바다를 바라보며 캔 맥주를 홀짝였다. 

안방에서 오가는 정신없는 고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노트북을 껴안고 드라마나 보고 있는 희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우아한 그림 같았다. 

어둡고 우울한 이 방구석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들 곁에 앉고 싶었다. 

‘지나가는 행인 1이라도.. 어떻게 안될까?’

“그래 다 좋다 이거야. 내가 백번 양보하고 쭉 볼 테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키스는 아니다. 뭐야 그런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지 마! 아... 진짜.. 둘이 입 맞추면 끝이야 나 이 드라마랑.!!”

희영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 줘....’ 복화술을 하면서.

그래서 남자 주인공의 “이런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키스 따위를 할 수는 없지!” 대사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다. 희영의 마음이 이해받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희영은 그들의 데이트 장소인 속초도, 그 남자와 여자도 애정하기로 결심했다. 

파도소리와 둘의 은밀한 눈빛, 그리고 맥주가 넘어갈 때의 목 울림대를 스토커처럼 관찰했다. 말로 딱히 표현하기 어려운 희영의 다양한 감정과 상황, 그 순간의 드라마 장면이 절묘하게 맞물려 사진 한 장처럼 희영의 뇌에 각인돼 버렸던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데이트를 하면서 그들이 들렀던 시끌벅적한 속초시장, 자전거를 타던 호수 도로, 주변에 반짝이던 영랑호 호수.. 드디어 희영도 그곳에 간다. 

KTX가 출발하자 괜히 배가 살살 아파왔다. 국내여행이라 걱정은 덜 했지만 그럼에도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있었다. 

희영은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이 가고 싶어 편의점에서 작은 휴지 하나를 샀다. 옆에 작은 생리대가 보였다. 희영은 여행 중 생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오우.. 최악.’

그러고는 생리가 터지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자신의 몸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 한 여름에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리고 배가 욱신거리고 가스가 차고 가슴이 단단해져 아프고 수시로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탈출시켜 준 것만으로도 여행의 조짐이 좋았다.

코너를 돌아 냉장 문을 열어 맥주 캔 하나를 샀다. 

가장 먼저 희영이 들른 곳은 근처에 보이는 작은 해변이었다. 아담해 인적도 드물고 해변의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데지! 조용한 파도소리 들을 수 있는 곳!” 

희영은 아무도 모르는 아지트 같은 작은 해변 모래에 털썩 앉아 캔 맥주를 땄다. 

딱!! 

“캬... 이 넓은 바다 앞에서 캔 맥주 따는 소리가 이렇게나 크고 영롱하고.. 청량하게 울려 퍼지다니. 저 위에 누가 계신지는 모르지만 그냥 다 감사합니다. 크크” 

희영은 하늘을 보면서 실없이 웃었다. 

그때 옆에서 아이씨!라는 작은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 아.. 이.. 씨..?” 

희영을 향해 겅중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빗질하며. 

“저기요...” 

“네?”

“녹음 중이거든요.”

“네?”

“ASMR녹음 중이었다고요. A.S, M.R!! 알죠? 파도 소리가 녹음되는 중인데 지금 방금 그쪽 캔 맥주 따는 탇!!! 하는 소리가 아주 기막히게 가운데 쏙 박혀버렸어요.”

“................. 제가.. 지금 뭐.. 사과라도 해야 되는 상황인가요?”

“............ 네?”

“보자 보자 하니까 누가 보자기로 보이나. 아니 이봐요. 그쪽이 바다 전세 냈어요? 딱 좋은 기분! 딱 좋은 순간! 완벽한 지금을 지금 그쪽이 망쳐버렸거든요?!!! 

그쪽은 녹음이지만 난 지금 인생 생방이라고요!!”

“.. 네? 아니 사과하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그냥 저도 좀 당황해서.... 그.. 제.. 가”

“ 아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ASMR이고 나발이고 바다 세대주가 당신은 아니라고요. ”

“ 그.. 그렇죠. 기분 나빴다면 죄.. 송.. 하긴...”

“ 아 됐어요!”

“ 제가 지금 한 달 가까이 여기서 머물면서 오늘 딱 하루 기막히게 녹음이 잘 된다 싶었던 찰나라.. 15분 동안 완벽하게 찍고 있었던 거라... 그게.”

“ 당신이 15분을 찍었는지.. 녹음을 하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현수막이라도 걸어 놓고 하던가!”

“........... 현수막... 그..... 그렇죠?.. 그러게요 현수막.. 하하하”

“ 지금 웃어요? 웃겨요 이게?”

“ 죄송해요. 들어보니 제가 잘못했네요. 제가 사과할게요.”

“ 아 됐어요!”

희영은 완벽하게 기분이 잡쳤다는 오만상과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짜증 깃든 제스처를 남발하며 일어나 엉덩이 모래를 털었다. 

“.. 허.. 어! 저........ 잠깐 앉아보세요. 앉~아~”

“.... 개 훈련시켜요? 뭐래요 지금?”

벌떡 일어나 엉덩이 모래를 턴 희영의 손이 약간 축축하다. 손바닥에 빨간 기가 돈다. 

‘뭐.. 야..’ 모래를 보니 생리가 터졌다.

습기를 머금은 모래에 앉아 있던 희영은 찔끔 나오는 생리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 순간에 흠뻑 취했었는지도 모른다.

“아.. 씨..”

“아 잠깐 앉아계세요. 저한테 여분 옷이 있어서.. 아!  잠시만 기다려 봐요.”

‘뭐 이렇게 신호를 안 주고 터져 진짜. 분명히 아니었는데.. 느낌 없었는데...’

희영은 뻥 뚫리는 기분으로 만끽하던 첫 여행의 시작이 어쩐지 이상했다 싶으면서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미친... 꼭 터져도 이렇게 분위기 보면서 딱딱 맞춰 터져 주시지. 아주. 장하다 장해.”

당황한 내색을 최대한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보면 민망해질게 뻔하고, 지금 가릴 옷은 없고.. 어떻게 일처리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멀리서 겅중이가 또 한 번 겅중거리며 희영에게 달려온다.

가까이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멀리서 뛰어오는 걸 보니 몸의 균형이 잘 맞는 남자 같았다. 다리길이가 길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다. 키는 180 정도? 음.. 운동도 좀 하나 봐?   

약간 긴 듯한 머리는 무심한 듯 보였지만 자신을 방치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 정도의 센스로 느껴졌고 뛰면서 나풀거리는 체크 남방과 카키색 바지도 잘 어울려 그의 육체를 더 돋보이게 했다. 희영은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야 안희영 너 지금 뭔 생각하니. 너 지금 생리 터졌다고. 바지에 다 묻었다고 등신아!!!’

“이거 두르세요. 부담 없이 쓰고 버리시면 되는 옷이에요. 제가 한 달 동안 여기서 있어서 싼 옷들 몇 개 샀는데.. 이건 저한테 좀 작아서요. 허리에 두르세요.” 

“ 아! 됐어요!”

“....... 거절보단 이게 나을 것 같은데..”

남자는 고개 짓으로 저길 보라는 듯 가리켰다. 희영이 고개를 돌리자 해변과 차도에는 사람도 차도 많았다. 

“아까는 분명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희영이 울먹거리며 웅얼거리자 남자는 그런 희영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애매한 시간이었고요. 그 애매한 시간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과 애매한 시간에 와서 낮술 한 그쪽만 있었던 거고요.”

“이 씨...”

“아우 욕도 잘하세요. 화도 잘 내시던데.”

“이 씨는 욕이 아니거든요. 이와 씨. 낱글자의 조합이라고요! 놀리지 마세요. 이건 제가 나중에 드리던지..”

“아니에요 쓰고 그냥 편하게 버리세요.” 

“.. 남의 옷을 제가 왜 버려요. 연락처라도 주시면. 제가 세탁을 해서라도..”

“ 남의 옷이니까 버리죠. 하하 아.. 제 연락처가 궁금하신 거라면.. 연락처를 주고받아야 되는 상황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 하....”

‘뭐라냐 저 인간..’ 

희영은 허리에 남방을 두르고 발로 핏기가 살짝 벤 모래를 쓱쓱 문질렀다.

영역표시하고 모래로 덮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아까는 화내서 죄송했습니다. 요새 제가 신경이 날카로워서는.. 괜히 화살이 그쪽한테 향했네요. 미안합니다.”

“저도 초면에.. 죄송해요. 첫 여행이라 저도 들떠있어서 오버했어요.”

“아 첫 여행이세요? 와 그럼 평생 이 순간은 안 잊혀지겠네요.”

“그러게요.. 잊혀질 수가 없겠네요 이거....”

“영광입니다... 하하 아 빨리 가보세요.” 

“네... 이 옷은.. 연락드릴게요.” 

희영은 냅다 뛰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화장실을 향해 일단 뛰었다. 아! 화장실보다 편의점이지. 아 인생이여! 너무 잘 돌아간다 했어 안희영. 일단 어떻게 해보자. 

옷을 너무 적게 가지고 온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 옷을 돌려주는 것도 문제였다.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나의 중요한 것을 모조리 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일까. 왠지 희영은 그 사람이 편하게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고 마음이 진정되자 아까의 일을 곱씹어보고는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 있나 희영은 생각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 그의 번호를 누르고 ‘남’이라고 저장했다. 

희영은 이곳저곳을 사진 찍었다. 혼자 서서 먹기도 하고 조용히 벤치에 앉아있기도 했다. 뭔가 물컹한 기분이 심하게 드는 순간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화장실을 들러 생리대를 갈았다. 다시 재정비를 하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영랑호는 꼭 첫날에 들르고 싶었다. 1년 전 속초에 크게 산불이 났을 때 영랑호 물이 불을 끄는데 큰 몫 했다는 신문기사를 볼 때마저도 희영은 괜한 자부심 같은 걸 느꼈다. 영랑호 근처 작은 벤치에 앉아 희영은 발을 까딱거렸다. 

“또 보네요? 운명인가요? 하하”

“허...... 얼...”

“전 숙소가 여기 근처라.”

“아... 네... 에...”

말을 끌며 빈정거림을 어필하려 했지만 희영의 앞에 서있는 남자인간은 사람 좋게 웃고만 있다.  

“친척분이 외국 나가시면서 집이 하나 비어있어요.” 

“아.. 네...”(어쩌라고)

“숙소 잡았어요? 편견인가 이런 것도? 여자 혼자 여행하면 숙소도 잘 선택해야 하지 않아요?” 

“... 편견이네요.”( 지금은 네가 제일 위험해 보인다 이 자식아)

“저희 집에서 무료로 지내셔도 좋아요. 사과의 의미예요. 진상 짓 한 거.”

“어우.. 됐어요. 아니 제 말은 괜찮다고요.” (무슨 저런 미친놈 같은. 어디서 개수작을)

“저 미친놈 아니고요. 제 여동생도 집에 같이 있으니까... 뭐 부담 느끼시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 오해하시지는 말고요.”

“ 옷은 세탁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다리를 까딱거리며 햇빛에 반짝이던 호수를 바라보던 희영은 심호흡을 하고 자리를 옮겼다.

‘완벽하게 좋은 순간을 망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네 저 사람은.’ 

조금 더 걸어 다른 벤치에 앉은 희영은 고요하게 넘실거리다 작은 새끼오리의 동동거림에 큰 물 원을 그리는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은 오리발 하나에 호수의 우아함은 금세 흔들렸고 희영은 그 모습이 꼭 어수선한 자신의 인생 같았다. 중심을 잡으려고 해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자꾸만 등장해 파장을 일으키는 움직임들이 떠올랐다.  

가슴팍에서 풍겨오는 땀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희영은 꿈꿔왔던 여행은 딱 드라마 그 정도였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버스를 기다리고 때론 버스를 놓치고 숙소 값을 검색하고 캔 맥주를 먹고 나오는 트림을 손으로 휘젓고, 길을 잃고, 생리가 터지고, 땀 냄새가 진동하는 상황의 연속이었으니까. 

달달한 로맨틱영화보다 리얼한 전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블랙 버킷햇 안에서 소두가 된 희영이 작은 뇌 속을 유영했고 그 생각들 사이사이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이 불쑥 등장했다. 

희영은 그 ‘남’ 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름은 뭐예요? 여행은 왜 왔어요? 여행 중? 아니면 일? 머리는 일부러 좀 기르신 건가요? 그 ASMR녹음은 왜 해요? 많고 많은 소리 중에 왜 파도 소리인데요? 청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난생처음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바보 같나요? 생리 터진 여자.. 눈앞에선 처음 봤죠? 가족은 화목한가요?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 든 적 있어요? 부모님이 죽을 만큼 밉거나 싫을 때... 있었어요? 나이는? 왜 한 달이나 여기에 머물고 있어요? 여행의 이유는? 남녀가 뒹구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희영은 문득 할머니가 떠올랐다. 집구석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밀어내던 할머니.

청춘을 상기시켜 주던 할머니. 우리 집으로 여행을 왔다던 할머니.. 날 도와주고 가겠다는 할머니..

희영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할머니의 묵음 처리 된 입모양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이 우울한 구렁텅이에서 내빼게 도와주기 위해.. 

우리 집으로 여행을 왔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희영은 속초 시장에 들러 씨앗호떡 하나를 사서 한입 깨물어 먹었다. 감자전 한 개를 샀고. 호박식혜 하나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수산시장까지 내려가 가장 작은 문어를 하나 삶아 포장했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몸에 좋은 거 하나하나 채워 넣어 원기를 회복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희영은 기분이 좋았다.  

희영은 닭 강정 하나를 주문하고 대왕만 한 김밥도 몇 줄 주문했다. 

두 손에 검은 봉지가 넉넉히 들리자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공. 일. 공. 팔. 사. 공. 삼. 이. 팔. 사. 팔?

이팔사팔.. 그래 이판사판이다. 짜증 나는데 계속 생각나니까 그냥 전화나 해 보는 거야. 옷도 되돌려 줄 겸. 고마움의 표시로 음식도 먹을 겸.

그냥.. 전화라도 해보는 거니까...

신호음이 울리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여보세요. 안희영이라고 합니다.”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렸는지 하하 웃으며 남자는 말을 했다.

“아 연락 주셨네요. 이 번호가 희영 씨 번호죠? 이름이 안희영이었구나..”

“전 동욱이에요. 김동욱. 두 번 보고 통성명했네요.”

“다름이 아니라. 그냥 다른 뜻은 없고 먹을거리를 좀 넉넉히 샀는데 별일 없으면 거기 동생분도 있다고 하니까 같이 먹어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옷도 드리긴 해야 될 것 같고...” 

“하하 감동인데요 이거? 시장이에요 지금? 근처니까 제가 차로 모시러 갈게요. 집에서 같이 먹어요.”

“...... 일단 그럼.. 오세요.”

전화를 끊고 안희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어쩌자고...”

희영은 그냥 수시로 떠오르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자위하며 그를 기다렸다. 

10분 뒤 희영은 그를 만났다. 그의 차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기계들로 복잡했다. 

뒷 자석을 힐끔 본 희영은 깔끔 떨지 않는 성격이니 까탈스럽지는 않아도 때론 무신경한 털털함이 여자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 같은 예언자 같은 생각을 했다. 

“뒤에 너무 정신없죠? 정리를 잘 못해요 제가.” 

“저도 잘 못하는데요 뭐.”

“혼자 드시려고 산 건데 나눠주시는 건 아니에요?”

“맞아요.”

아니라고 얘기하면 너무 속이 보일까 싶어 곧바로 맞아요!라고 대답했지만 이미 뻔히 속은 다 드러났을 거 아닌가. 희영은 그냥 이실직고 화법으로 돌입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전화를 고민하긴 했어요. 너무 웃기잖아요. 처음 본 사람이고. 뭐 황당한 만남이기도 했고. 그런데 옷이 얽혀있긴 하고. 버리긴 좀 그렀고요. 첫인상은 더러운데. 아 미안요. 첫인상은 좀 그랬는데 두 번째는 허허 웃는 게 좀 예뻐 보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다니는데 그쪽이 수시로 생각나는 게 짜증 나잖아요.”

“하하.. 짜증이라...”

“궁금한 것들도 있고.. 그냥 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연이 여행객이니까..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는 말고요.”

“저 무겁게 생각 안 했는데..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연일지, 아니면 평생 마음에 간직될 사진 같은 인연일지는 여행이 끝나봐야 알죠. 안 그래요?”

“.....”

희영은 그의 대꾸가 마음에 들었다.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했고 무례하지 않고 따뜻했으며 너무 다가오지도 너무 밀어내지도 않은 편안한 그의 말투와 표정이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주는 것 같았다. 

“저를 궁금해한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저도 오늘 희영 씨가 생각나더라고요? 혼자 떠난 첫 여행이란 말도 떠오르고.. 왜 속초예요?” 

“드라마 주인공들이 너무 질투 나게 데이트를 하더라고요. 부러워서 와봤어요.”

“하하.. 멋지다.”

“일하는 중이에요 여행 중이에요?”

“음.... 전 반반? 일도 하고 여행도 하고.. 언제 돌아가요?”

“맥시멈 2주 잡고 왔지만 그렇게 오래 있진 않을 것 같고. 그냥 내킬 때?”

“내킬 때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런 날씨에 집에서 처박혀 먹는 건 죄짓는 것 같은데. 둘이 어디 앉아서 먹을래요?”

“밖에서요?”

“소박하긴 하지만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는 곳을 제가 알거든요.” 

“그래요.”

희영과 동욱은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 자리를 잡고 갖가지 음식들을 펼쳤다.

“와... 손 크네요?”

“.......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럼 우리 인연을 위해 건배 한번 할까요?”

짠. 

담백한 대화가 오갔고 청춘의 푸릇함이 짭조름한 바다 향과 어우러져 꽤나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희영은 문어 하나를 질겅거리며 동욱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사람들은 여행을 왜 떠날까요?”

“.. 벗어나려고?”

희영은 이번 대답도 마음에 들었다. 

‘힐링’ 같은 같잖은 단어를 사용해주지 않아 고마웠다. 동욱은 바다를 보면서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뒤 말을 이어갔다.

“사람마다 상황은 다 다르겠지만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 아닐까요? 벗어나서 바라보면 ‘그래 뭐 내 삶도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르지’ 뭐 이런 얄팍한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도망자처럼 뛰쳐나왔는데 언젠간 끝나는 여행도 삶이랑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스스로 자기 위안을 하게 되고... 다시 삶에 편입됐다가 다시 도망자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또 그 속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고...”

“듣고 보니 다람쥐 쳇바퀴네요?”

“하하 그렇게 되나요 얘기가?”

동욱은 희영의 여행이유를 묻지 않았다. 희영도 동욱에게 여행의 이유 따위를 묻지 않았다. 질문의 대답만으로도 충분히 뭔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동욱과 희영은 모든 음식을 클리어하고 해변에 앉아 캔 맥주 하나씩을 더 먹은 뒤 정말 담백하게 안녕했다.      

정신없이 울려대는 알람소리. 

정신없이 고함치는 할머니의 소리...

희영은 5분 단위로 맞춰놓은 알람시계를 힘겹게 누르고 침대에 앉았다. 편안한 숙면 여행을 위해 매너알람시간대를 설정해 놓은 희영의 아침은 쌓여있는 알람메시지 폭탄으로 시작한다. 

밤새 업데이트 된 희영의 여행앱은 안성맞춤 가격으로 새로운 여행루트가 업데이트 됐다고 수북한 메시지를 남겼고 팀원 한 명은 단체 카톡 창에 오늘 점심메뉴는 중국집 어때요?라는 환장할 카톡을 보냈다. 오전 7시 10분이었다. 

메일함 알람도 딩동 울렸다. 협력사 직원의 답 메일일 테고.. 이건 회사일이니까 가장 나중에! 

세상 모든 알람이 나를 향해 집중 공격하는 것 같은 아주 일상적인 아침.

그래. 언젠가 떠날 거다 여행 앱이 그때까지 열일 좀 계속해주고. 

점심메뉴.. 난 식당 갈 거고요.. 

메일. 그래 체크! 오케이.”

희영은 얇고 긴 검지손가락 하나로 연속해서 울리는 메시지와 알람들을 매끄럽게 처리해 나갔다. 

“그래.. 이제 씻어볼까.” 

희영은 화장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출근하자마자 처리해야 할 희영의 일들 중 가장 우선순위부터 하나하나 정리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점심메뉴!

희영은 재빠르게 카톡방에 오늘은 근처에서 선약이 있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고 일단락했다. 두 번째는 여행앱 업데이트, 연관 검색어 추가.

그리고 영혼 없는 인사를 건네고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31평 방 3개에 사는 사람이 안희영 자신 뿐인 것 같은 움직임으로 무미건조하게 집을 빠져나오고 나면 비로소 그녀만의 자유가 시작된다. 파워 워킹을 하는 그녀의 휴대폰이 작게 진동한다.     

좋아요 / 전 짬짜면이요! /  탕수육 추가 가능? /  잡채밥이 당기는데?     

‘등신들. 어차피 오늘도 통일이다 등신들아.’

그다음... 협력사 직원에게 온 메일을 들어가서..      

 RE: 마케팅팀 안희영입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연락처 남기겠습니다. 미팅 때 자세한 얘기는 하도록 하죠. 

김동욱. 010 –8403 –2848     

희영은 입으로 곱씹었다. 이. 팔. 사. 팔.

이. 팔. 사. 팔. 이. 판. 사. 판.?

그러고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희영은 출근하자마자 여행앱을 열어 우선순위목록을 확인하고 결제했다.

희영의 난생 첫 여행결제. 그렇게 꿈꿔오던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이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희영은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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