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글쓰고 강의하는 최지은
Oct 12. 2024
“뭐에 홀린 듯 ‘반해야’ 버틸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고로, 우리는 인생에 반해야만 한다.”
1. 하지만
“떨어졌다.”
나는 떨어졌다 앞에 ‘또’라는 한 글자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최대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고, 최대한 덤덤히 노트북을 닫으며 생각했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가벼움에 대해.
선택된 한 명보다 나처럼 선택받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나는 애써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굳이 선택받지 ‘못한’이 아닌 ‘않은’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씨, 보내주신 원고는 좋지만 안타깝게 함께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고의 완성도는 충분하지만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등등 탈락을 전하는 메시지 안에는 늘 칭찬이 반 조각 즈음 들어가 있었다.
한 조각은 과하고 딱 반 조각 정도의 표현들. ‘좋지만’, ‘다음기회’, ‘완성도’ 이런 말들이 나에게는 반 조각의 말들이었다.
이러한 글귀, 나는 글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다음번에는 함께 할 것 같은 그 덧없는 희망조각이 다음 탈락을 더 힘들게 만들어버리니까. 차라리 부족한 부분을 하나라도 말해주면 그 부분을 수정이라도 할 텐데 이건 충분한 위로도 동기도 되지 않는 애매한 활자들의 반복이었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탈락 횟수를 기록해 놓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 자체가 내 발목을 잡고 한 발짝 더 내딛을 수 있는 힘까지 앗아가지는 않을까 신경 쓰였다.
그리고 기약 없는 희망에 대한 자기 방어적 철벽이기도 했다.
‘그래 아무리 희망을 쥐어 줘 봐라. 나는 그 따위 자잘한 희망고문에 넘어가지 않을 테야. 나는 그냥 쓰고 싶은 만큼 미친 듯 쓰며 걸어갈 테니’
내 진가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판에 박힌 감사하다는 말 대신 당신은 찐!이다라고 말해 줄 것이라 늘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탈락의 쓰디씀은 잠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야! 하지만, 어깨 펴라! 나는 아직 이리 창창한 33살, 아니 31살 아닌가. 너의 그 진가, 수면 위로 통! 떠오를 날 분명 있을 거다.
-내 이름, 하. 지. 만.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어색한 주목을 받지만 인생을 보면 그리 주목받을 일 하나 없는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
내 이름의 탄생은 실로 허무하다. 아빠와 엄마, 둘이 연애할 때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하지만’ 였단다. ‘하지만’이라는 단어의 앞뒤에는 설명을 이어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나. 뭐라나. 그들의 유치한 말장난은 흡사 이런 것들이다.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아빠가 운을 띄우면 엄마는 “사랑을 증명하는 길은 어렵지.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사랑 아닌가, 하지만..”
“사랑에도 기한이 있다는데 그 기간이 지나도 유지될까.. 하지만..”
“시간을 함께 하다 보면 증명할 수 있겠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의 진심들을 하지만..”
끝없는 말장난 같이 보이던 문장의 향연들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의미였고 그 의미의 꼭짓점 덕분에 내 이름은 ‘하지만’이 되었다.
둘만의 의미타령으로 이름을 부여받은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살짝 걸쳐 놓고 사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한자 풀이가 좋아서 이름을 지었다 거짓말이라도 하지.’
아무리 투덜대도 내 의지 없이 부여된 이름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았다.
부모와, 성별 같은 부분은 정말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와 결부되는 것들이었다.
아빠의 성이 ‘하’씨인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 모른다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담담히 내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부모와 성별, 이름 같은 것들을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 나머지 것들은 내가 직접 선택하며 살아보겠노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총 합 16년을 이름 하나로 주목받기도 하고 놀림을 받기도 했으며 이름을 애정하기도 증오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아보면 시간이 갈수록 추상적인 의미로 만들어진 활자, 이름은 나에게 큰 의미가 아니었다. 충분히 개명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내 이름을 선택했다.
나의 의지로 내 이름을 선택했다. 그것이면 된 것 아닌가.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니까.
한 단어로 규정하기 힘든 다양한 감정들과 수시로 솟구치는 심술들을 버티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의 방법대로.
-성별, 여자.
성별이 어째서 나를 규정짓는데 중요 한 부분인가. 나는 늘 이 부분을 반문하고 싶다.
인간이면 인간이지 성별을 구분 지어서 나를 소개하는 건 시대에 한참이나 뒤떨어지는 발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자기소개서에는 성별을 체크할 수 있는 네모 칸이 버젓이 그려져 있고 쿨 한 척, 자신은 아닌 척해도 여자는 – 남자는 -이라는 말로 성격을 추측하고 판단해 버리는 못된 습성이 만연하다. 원래 못된 습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성별이 여자라고 하면 또 한 번 나는 주목받는데 성별과 이름과의 연관성은 어떤 것으로 이미지화되는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이름이 하지만 이니 왜 남자라고 생각하는가.
이 부분을 늘 꼬집어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공모전 신청서에 이름과 성별을 적어 냈는데 확인 전화를 한 통 받은 것도 나에겐 나름의 충격이었다.
묻고 싶다 도대체 와이.
-나이. 약국봉지 나이로 31살. 결국, 33살.
약국 봉지에 박힌 ‘만 31살’은 2년 정도의 여유시간을 선물해 주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죽어도 ‘만’ 나이를 고집하는 인간. 사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크게 상관없다.
단,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고 덕분에 여분의 공간이 생길 수 있다면야 그깟 2년 정도의 여분의 시간을 못 가질 것도 없지 않은가.
친구들이 왜 그렇게 나이 가지고 구라를 치냐고 쏘아붙였다. 친한 것들이 더 난리다.
“지만아 너 왜 이렇게 나이 속임?”
“뭘 속여. 여기 봐봐 떡 하니 쓰여있구먼 31살”
나는 약봉지를 과장되게 흔들며 가리켰다. 만 31살이라는 숫자를.
“와 언제 30이 넘었냐 우리가. 그런데 2살 어려지면 좋냐? 어린애도 아니고 만으로 나이 타령하기는!”
“안될 건 뭔데. 내가 강도짓이라도 했냐.”
“오! 맞는 말이네 시간 강도네. 크크”
“아 정말 이정인!!!”
이정인은 가장 가까이에서 내 꿈을 함께 바라보는 친구다. 그냥 말 그대로 ‘바라만 보는’ 친구,
정인이는 정인이의 인생을 잘 살고 있다. 원하던 출판사에 들어가 경력 차근차근 쌓으며 일하다 소개로 만난 남자들 중 그럭저럭 제일 괜찮았던 한 놈을 골라 결혼을 했고 그 남자는 변태도 아니었고 사이코도 아니었다. 도벽이나 사람 환장하게 하는 주사도 없었다.
불임이나 난임 없이 2년 정도 신혼을 즐긴 후 아기를 낳았고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정인이네 가족이 근처 공원을 지나가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꽤 화목한 가족이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의 딱 그 느낌으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분위기가 난 늘 신기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 느낌이야 말로 결혼의 최대 조건이라고 말하곤 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평범하게 사는 거라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나는 지랄 맞게 살란다. 쉽게. 어렵게 살지 않는다고!’
“결혼도 했겠다. 아이도 낳았겠다. 난 큰일 다 했어. 지만이 너 결혼 생각 없어?”
정인이가 불쑥 이런 질문을 할 때면 그냥 짧게 “별로”라고 대답했지만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뒤섞여 또 불 같이 쏘아붙이고 싶었다.
불같이 쏘아붙이면 정인이 저것은 또 물같이 쓱 – 스며들어 헤헤거리고 말 테지만.
결혼이며 아이 낳는 것이 왜 내 인생의 큰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큰일이라 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하고 싶다고 끄적거린 문장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느끼는 쾌감 같은 것들인데.
내가 생각하는 그 어떤 큰 일속에 이상하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꿈, 일, 시간, 여행 등 다양한 단어들이 문장 속에 여기저기 빠지지 않는 돌덩이처럼 박혀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정말 한 군데도 없었다.
차분히 문장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다 조용한 소리로 사분거리며 소리를 내자 문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어감과 운율과 청각의 느낌 때문에서라도.
28살이 되던 해 정인이는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계획 하나를 처리하듯 결혼을 했다. 미리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이 규격에 맞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실행력에 혀를 내둘렀었다.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바라보다 보면 뭐에 홀린 듯 살아가야 버텨지는 게 인생인 것 같기도 했다.
정인이도 뭔가에 홀린 듯 보였다. 그러니까 자신의 인생을 버텨내기 위해 뭔가에 홀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렇게 보였다.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둘러하냐는 친구들의 말에 정인이는 딱 결혼 적령기라고 늘 못을 박았다. 하긴 이정인은 20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서른이 되기 전에 무조건 결혼을 할 거라고. 신체나이 한창일 때 결혼하고 가장 예쁠 때 사진으로 남길 거라고.
결혼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나는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나의 결혼 적령기를 정하는 요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정인이는 일찍 결혼해서 누가 봐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을 거라고 내심 생각했다.
나와 정인이는 그냥 뼛속부터 다른 사람, 다른 환경 일거라는 그런 확신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문득 이렇게 나와 정인이를 분리시키고야 마는 생각들을.
결혼한 정인이는 신부대기실에 백합처럼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돋보이지도 않던 쇄골에 음영이 더해져 우아한 호수 같았다.
“야 너 오늘 엄청 예쁘다! 쇄골에도 화장하니??!”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지만 내 질문을 들은 웨딩 도우미는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딱한 그 의상은 누구 옷을 추스리기에 불편해 보였다. 여자의 시선이 찰나 나의 쇄골에 머물렀을 때 나도 모르게 어깨 쪽에 힘이 들어갔다.
“보이는 데는 다 화장해 주던데? 숨기고 다녔다. 왜.”
정인이는 백합처럼 환하게 웃었다. 나는 정인이의 환한 미소를 따라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입 꼬리가 정인이만큼은 올라가지 않았다. 괜히 어깨 쪽에 힘을 주고 자세를 고쳐 잡아 쇄골에 힘을 줘봤다. 입 꼬리에 힘을 주고 힘껏 올려봤다. 마음대로 온몸의 근육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반대쪽 거울에 비치는 한 무리, 그 속에 있는 성하선배를 발견한 것이다.
“와줘서 고마워 지만아”
정인이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나는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야. 나 어제 회사 그만뒀다.”
놀라서 동그래진 눈 위에 부담스럽게 붙어있는 속눈썹들이 정인이의 표정을 숨겨주었다.
속눈썹 덕분에 난 그날 정인이의 진심을 알지 못해 다행이었노라고 생각했다.
백합 같은 얼굴을 한 정인이는 미소를 유지한 체 말했다. 흡사 복화술처럼.
“넌 정말 미친년. 하지만 넌 지린다 정말”
“야 웨딩드레스 입고 미친년이 뭐고, 지린다는 뭐니? “
“고급 어휘 거든?”
정인이의 눈에는 낡은 노트북 하나를 품에 안고 종일 씨름하는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고.
내가 불이라면 정인이는 물 같은 아이였다. 어디든 흘러가고 어디든 섞일 수 있는 그런 물 같은 아이.
내가 늘 불같이 때려치우면 정인이는 늘 물같이 스며들어 시간을 이겨내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정인이가 올바른 삶이라고 말했다. 내 주변 사람들도 모두 ‘불’ 같은 너의 인생보다 ‘물’ 같은 정인이의 인생이 속 편한 거라고 넌지시 표현했다.
하지만! 나, 하지만은 생각했다. 각자에게 필요한 순간과 중요한 부분은 다른 거라고.
그 쓰임 자체는 내가 ‘선택’하면 그만인 거라고.
나는 마음을 숨기면서 스며드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물과 기름처럼 애매하게 뜨거나 가라앉는 것도 힘들었을 뿐이라고. 차라리 그럴 바에는 불처럼 타올라 재가 되든지, 화상을 입더라도 뜨겁든지. 난 그런 삶을 살 것이라고.
정인이가 정인이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나도 하지만의 인생을 나름 잘 이끌어가고 있으니까.
“정인아, 봤어? 저기 성하 선배 온 것 같더라?”
정인이는 성하 선배 쪽을 바라보고 슬쩍 웃음을 내비쳤다.
정인이가 보인 웃음의 의미가 반가움인지, 놀라움 인지, 민망함 인지, 당황스러움 인지 나는 재빠르게 판단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그 순간 내 감각으로 선택한 단어는 어이없게도 ‘분노감‘이었다.
-나의 직업, 꿈 있는 프리랜서 작가라고 해 두자.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공모전에 몰입을 한지, 엄마의 표현을 빌려오면 ‘생 지랄을 한 지’ 5년째. 자잘한 공모전에서 크고 작은 상을 받고 나서는 뭐든 될 수 있겠다는 격한 자존감 하나로 드라마 작가 공모전에만 작정하고 매달린 지 2년여..
소설 공모전에서 5번의 입상 후 나는 정말 내가 소설가가 된 줄 알았다. 크고 작게 상금도 받았고, 축하도 받았으며 글도 이렇게 잘 써질 때가 따로 있구나 거들먹거리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소설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인간 하지만 이다.
공모전에서 입상도 하고 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꿈을 좇고 있는 생명체일 뿐이었다.
드라마 시나리오를 준비한 것은 단순한 계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 소설 구상을 하고, 글에 교묘하게 드라마 대사를 녹이다가 문득 ‘그래 이렇게 글을 잘 쓰고 센스 있는데 드라마 시나리오도 가능한 거 아니겠어?!’ 생각한 게 시작이었다. 드라마 작가가 돼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여기저기 배치해야지 하는 막연한 상상도 한몫했지만.
평생 먹고살 일이 찰나에 결정될 일이냐고 다들 반문했지만 나는 또다시 반문했다.
왜 찰나는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자부하는가.
나는 글이라는 것은 부분과 부분으로 자잘하게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결국 장르는 달라도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나 희곡이나 평론이나 사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 이름을 듣고 너무 과하게 놀라거나, 과하게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캐묻거나, 정규직 비정규직을 논하는 과한 리액션을 확인할 때 나는 그 사람에게 조용히 마음을 닫는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나만의 첫 번째 룰 다.
소설을 끄적거리다가 갑자기 드라마 작가로 꿈이 또 변했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도 이제는 더 이상 피곤하게 반문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또 저 하지만이 객기를 부리고 삐딱선을 탄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
꿈이 바뀐 것이 아니라 선을 살짝 옆으로 끌어온 것뿐이지만 아무리 설명한 들 그걸 이해한 인간이라면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 생각했으니까.
이런 질문에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가 두 번째 룰.
직장에 사표를 내고 온 날 팀장은 다른 말보다 인수인계는 완전하게 해 놓고 가라는 말로 사람을 진절머리 나게 했다. 그래도 같이 밥 먹고 회식하고 야근하고 주말까지 단합이다 뭐다 하는 이유로 보낸 시간을 따져보면 저건 인간성의 문제였다.
인간성의 시소 법칙.
나의 세 번째 룰이다. 너의 인간성만큼 나도 무게를 맞춰 대하겠다는 의지랄까.
그래서 나는 인수인계를 발로 하고 나와 버렸다.
그날 유난히 생리통은 심했고 사표도 낸 마당에 책임감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반차를 낸다는 말에 팀장의 표정은 한마디로 딱 이거였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집에 오자마자 헐렁한 고무줄 반바지로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었다. 엄마가 내어준 따끈한 어묵국물을 숟갈로 퍼먹으며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
“오늘?”
“팀장한테 그만둔다고 말 한지는 조금 됐어. 한 일주일?”
무 반 어묵 반으로 만들어진 엄마의 어묵국은 정말 팔아도 될 만큼 맛있는 맛이었다.
“엄마 오늘도 조미료 넣었어?”
“엄마는 조미료 거의 안 써~ 무 맛이야 무맛 쬐~~~ 끔 넣는 거지 조미료는. 그건 그렇고 뭔 일이야 무슨 일 있니?!”
“놉!”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여사님, 뭐야? 왜 반응이 이렇게 조용하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싶어서 그런다 이것아.”
“오호…. 엄마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지만이 너, 연애는 하고 있니? 너? 연애는 하면서 일도 하고 꿈도 꾸고 하는 거지? 넌 어찌 다 늙어서 죽으나 사나 꿈 타령만 하니.. 너 나이 30살 넘어가면 이제 노화 돼도 한 참 – 됐어. 결혼을 안 할 거면 모를까 언제까지 꿈 타령만 할래.”
“뭐임? 지금 이 타이밍에 갑자기 왜 뜬금없이 연애타령? 엄마, 그리고 연애 하나 안 하나 노화 중 인건 안 변하거든?”
“지금도 못 봐주겠는데 더 늙어서 내가 데리고 살까 봐 걱정 돼서 그런다 이것아.”
“엄마. 걱정 마. 내가 이래 봐도 한번 시작하면 남자들이 빠져나가지를 못해요.”
“남자를 만나는 보고 그런 소릴 해야지 믿지. 허구 헌 날 글 쓴다 일한다 꿈을 이룰 거다 입으로만 방정인 게 언제 남자를 만나 연애는 한다니. 너 엄마 말 단단히 새겨들어. 시간 금방 지나간다 너.”
금방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인생을 지탱해 주기 위해서 내가 택한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글쓰기다. 혹은,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내 인생에 반해 악착같이 버티고 견디고 시간을 쌓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묵 국물을 한 술 먹고 결심한 듯 말했다.
“엄마. 그래서 지금 행복해?”
“결혼 30년 차 부부한테 물어봐라 다 대답 똑같지.”
“ 뭔데!”
“ 의리지.”
“ 그러면서 뭐 좋다고 자꾸 결혼을 하래.”
“ 누가 결혼하래? 연애하면서 꿈도 찾고 그러라는 거지. 뭐 하나에만 미친 듯 달리는 것도 곯아 네가!”
“ 딸 생각 엄청 해주시네. 눈물 나게.”
나는 뭐 하나에 미친 듯 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중간쯤에서 애매하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순위에 상관없이 막판까지 버텨보는 사람이 얻는 배움이라는 게 분명 있다고 믿는다.
“그래도 모든 사람 다 때 돼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다 하는데 너는 동떨어져 있으니 내가 불안하니 안 불안하니.”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말을 듣다 보면 정말 내가 잠시라도 불안해야 하나?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끔은 엄마의 말에 격하게 동조하며 공감하는 리액션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 말을 들을 타이밍을 기다렸는데 그 타이밍에 내가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묵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술술 마셔버리고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엄마. 걱정 마 엄마 딸 겁나 연애 잘하고 살고 있어.”
“ 또... 말은..”
“ 엄마! 내 삶에서 연애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어? 그건 아니지. 더 중요한 게 있는 사람도 있는 거지. 요새는 결혼 말고 연애, 연애하다 동거 이런 추세야.”
“지랄을 하고 자빠졌다 아주. ”
“누구를 어떻게 뭘 믿고 내 평생을 맡겨!”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말하던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지만이 네 인생을 맡기는 게 아니라 네 인생을 갈고닦는 시간일지도 모르지. 맡긴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니니?”
엄마와의 대화에서 무언의 1패를 당한 날이었다. 그날은.
2. 그날의 분위기
사실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연애’라는 단어에, ‘사랑’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것은.
그는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 그가 하는 일의 범위는 꽤 넓었는데 일의 잡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회사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 독서 모임이었다. 독서모임 멘토로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가 짧은 강의를 한 번 맡았고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독서 모임이었지만 회비를 걷어 강사에게 강의료를 적게나마 전해드리는 게 우리 나름의 자부심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간단한 저녁식사자리가 연결됐다. 감사하다는 글귀가 적힌 흰색 봉투를 받아 든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봉투에 넣더니 말했다.
“오늘 이걸로 우리 회식이나 합시다!”
안 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라는 예의상의 말을 해준 사람은 많지만 회식이나 합시다!라고 말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어린 나이에 그 말과 행동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멋있는 허세.
휴학 한 번 없이 짜 놓은 코스를 밟아 정확히 대학3학년이던 그 해 여름.
독서모임이 끝나고 회식에서 함께 술을 먹었던 그 해 여름.
나는 그 해 여름 태양보다 뜨거운 사랑을 시작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남자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한 번 만난 뒤 연애를 시작한 건 난 생 처음이었다. 정확한 나이와 결혼 유무 같은 정보들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냥 오감에 충실하게 눈빛이 오고 갔던 경험도 처음이었다.
강의 시작 전,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눌 때부터 사실 느낌이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너무 자주 머물렀다. 그리고 23살이라는 나이는 시선에 감정이 곁들여졌을 때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넌지시 느낄 수 있는 예민한 나이기도 했다.
‘나의 눈빛도 그에게 이렇게 닿았을까..’
“와 우리 오늘 이야기를 많이 먹었네요?”
근처 고기 집에서 독서모임 인원 6명과 그는 고기와, 술과, 이야기를 먹었다.
이야기를 먹는다고?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분위기가 있었다.
많은 책 이야기를 했고, 책 이야기 속에서 소환한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했고, 결국 책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꽤 많은 술을 먹었다.
“와 학생들 술 정말 세네요. 글 잘 쓰겠다. 다들”
술 잘 먹는 거랑 글 잘 잘 쓰는 거랑 무슨 맥락이람?
나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했고, 그것이 그와 나의 온전하고 긴 눈 맞춤의 시작이었다.
“술이랑 글이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요?”
그는 분위기 있게 웃었다.
23살의 나는 그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큰일일 것 같아 물 한잔을 벌컥거리며 알코올을 분해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엄청난 관계가 있지. 글이 나한테는 꼭 술 같아서 안 먹히는 날에는 그렇게 안 먹히다 가도 잘 먹히는 날에는 쭈욱 쭈욱 잘도 넘어가거든. 글이랑 똑같아. 어떤 안주를 만나느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어떤 분위기냐에 따라서 속도감이 다르지. 취하는 강도도 다르고.”
벌써 반쯤 눈이 감긴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또다시 정신을 차리고 질문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너의 감정은 어느 정도의 강도인가요. 제가 느끼는 감정만큼 거기도 그런 가요?’
이미 난 그의 대답을 듣고 시선에 모든 감정을 다 담아버렸다.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젠장, 속도조절이 어려운 사람을 만났어’.
“결혼하셨어요?”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네?”
나와 그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기냄새 진동하고, 여전히 떠들썩한 소음이 오가고, 아직 술잔에 반쯤 남아있는 술들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온 감정을 다 털어 넣어서는.
“결혼을 했었지.”
“했었지? 과거형인데요.”
“말 그대로. 결혼을 했다가 헤어졌지.”
“그럼 결혼…. 아…. 아니에요.”
그의 땀구멍 개수까지 알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바람에 조목조목 질문들을 쏟아붓고 싶었는데 말을 하다 말고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리자 하지만. 앞서 가지 말자 하지만. 너 지금 제동장치 다 풀렸어 하지만! 술 그만 먹어 하지만! 말하지 마 하지만!!’
“뭐 어때 숨길 이유도 없는데. 결혼했었다. 이혼을 해서 지금은 혼자다. 아이는 생기기 전에 헤어졌고 지금은 솔로다. 심플하잖아.
출판사에서 잡무에 시달리는 고루한 인간이기도 하다. 끝.”
“끝….”
나는 조용히 끝..이라는 말을 다시 내뱉었다.
“헤어짐은 원래 당연한 거죠 뭐. 저는 늘 한철만 사랑해요. 꽃처럼.”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한다…? 지금은 봄인가요?.”
“만개한 철은 지났죠”
“다시 만개할 날을 기다리는구나?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되나? 질문해도 괜찮아요?”
반말과 존대를 섞어하는 그의 말투가 그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너무 얕지도 너무 깊지도 않은 사람. 나는 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서 나보다는 한참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구나. 꾼 일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너무 믿지 말자.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다. 질문에 너무 솔직히 대답하지는 말자. 다짐을 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떡였다.
“고개를 끄떡이니까 아기 같네? 하하 지만 씨는 책이 왜 좋아요?”
순간 멈칫했다. 예상하던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너무 만족스러운 질문이었고,
걱정을 한순간에 잠재우는 질문이었고, 그냥 그 사람은 안심해도 되는 사람 같아서 숨이 턱 막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책이 좋아 좋아하는 건데… 이유를 물으시면……”
“장금인가? 하하”
그의 웃음과 시선에는 분명 평균 이상의 ‘관심’이 있었다. 분명했다.
“책은 섹시해서 좋아요.”
“섹시라….”
“섹스 말고 섹시요”
“아하!”
술 때문에 발음이 애매하게 들렸을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수정한다는 게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든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글 잘~쓰겠다!”
“술 잘~먹겠다고요?”
“응. 글 잘~쓰겠다고.”
글과 술, 술과 글, 술과 말, 말과 술.
뒤범벅된 농담 따먹기가 이렇게 둘 사이의 불을 지폈을 줄이야.
출판사 명함을 건네주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전화해도 돼요?”
“전화하라고 주는 거예요.”
“그럼 저한테만 주세요”
“너한테만 주는 거예요.”
고깃집에서 나와 헤어져 나오는 길, 반대방향에서 택시를 잡아야 하는 사람이 나뿐이었고 23살 여학생이 혼자 들어가기에는 조금 위험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 덕분에 그와 단둘이 신호등을 건널 수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처음 보는 강사와 단 둘이 걷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 일이었을까?
집에 돌아가던 밤 11시 50분, 우리 둘은 천천히 늦은 밤공기를 느끼며 걸었다.
명함을 받으며 순간적으로 외워버린 그의 번호를 하나하나 눌러 전화를 걸었다.
내 옆에서 그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렇게 말없이 시선에 모든 감정을 다 담아버렸다.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전화했어요.”
“안녕하세요. 잘했어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밤바람에 그의 향기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 우리 지금 만날까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잠시만요.”
그는 전화를 끊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고 손을 내밀었다. 한 순간도 그의 향기가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12시, 그러니까 그 해 여름 17일 날 처음 만난 것이었다.
“우리 처음 만났는데 뭐 할까. 이야기를 할까요?”
“같이 있어요 그냥.”
“너무 늦었는데….. 괜찮겠..”
나는 홀린 듯 그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고 그리고 우리는 홀린 듯 사랑을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책과, 술과, 글과, 사랑 이 네 가지로 함축됐다.
사실 이 네 가지의 단어는 인생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출판사에서 도착한 투고원고를 읽는 일과 작업이 시작되면 인공눈물을 수시로 넣으며 활자와의 전쟁을 시작된다고 했다.
“ 전쟁이 아니라 영화 보듯 읽으면 되잖아요.”
“ 그렇네. 너무 치열하게 글을 읽어서 재미가 없었나 요새?”
원고를 읽기도 하지만, 교정작업에도 투입된다는 그의 일상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의 말마따나 밀물 썰물 같았다.
사부작거리며 천천히 잠식해 버리는 밀물과 에너지를 다 쏟아 모래 위 작은 미역까지도 싹 쓸어가 버리는 썰물.
그의 하루를 들으며 넌지시 상상할 때도, 그와 함께 잠자리를 할 때도 그는 정말 밀물 썰물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결국 자연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이미지를 형상화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
사실 경험다운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모텔 입구의 퀴퀴한 냄새나, 의도적인 붉은 조명, 어둡고 고리타분한 카펫 색깔들을 기억에 담으며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 다시 여긴 안 와야겠다.’
입구에서 미간이 찡그려지는 게 보였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아.. 내가 실수하는 건가. 싫으면 안 가도 돼. 가깝게 보이는 곳이 여기라..”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6층까지 있는 건물에서 우리는 3층, 305호에 머물렀다.
층마다 10호까지의 방이 있고, 6층까지 있으니 총 여기에는 60개의 방, 적어도 120명의 인간들이 뒤엉켜 있을 테구나..
나는 “마지막 남은 방이라 만원 싸게 내어 드릴게!” 라던 주인의 말을 복기하고 순간 거북함이 밀려왔다.
‘120명의 사람들 중 비슷비슷 한 두 명이 되기는 싫은데…’
사실 ‘나는 너랑은 달라’라는 말은 모순이다. 위도 상 똑같은 위치에서 몸을 섞는 120명은 각자가 남들과는 다른,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할 게 뻔할 테니 말이다.
아무리 지저분한 사람도 다 이유가 있고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서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지금 나와 그는 여기 있는 120명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
그 다른 뭔가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그는 나보다 7살이 많았지만 말을 하다 보면 10살은 넘게 차이 나는 것 같은 마음이 일게 하는 사람이었다.
“30살인데 꼭 40살같이 말하네요?”
“40살은 어떻게 말하는지 궁금하네?”
“30살보다는 어른처럼 말하겠죠.”
“그러는 지만이는 23살인데 30살처럼 말하네?”
나는 순간 무슨 의미인지 곱씹느라 재빠르게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23살인데 나랑 친구 같다고. 말이 잘 통하니까 좋다고. 친구 같아서.”
“나이가 중요한가 사실. 통하는 게 중요하지. 사실 독서모임에 나오는 내 또래 남자 애들 이랑은 1년을 같이 지내도 이런 얘기 절대 못해요. 왜냐. 딱 거기까지거든요.
어디서 주워들은 책 이야기, 서평이야기 짜깁기해서 풀어놓는 썰, 자기 게 아닌데 신나게 풀어놓으면 그걸 믿는 바보들이나… 전 달라요. 전 다 보이거든요.”
“음…그래서 나는 어떻게 보였을지가 궁금하네?”
“… 글과 술에서 일단 다 먹고 들어갔어요.”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 멈췄다. 305호를 향해 걸어가면서 들리는 약간의 신음과 대화소리가 방음상태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어색한 듯 나를 힐끔 바라봤고 나는 어깨를 살짝 위로 올리며 괜찮다고 신호를 보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온몸을 밀착시킬 수 있니? 하지만? 이 사람 저기 들어가면 미친 변태로 돌변하는 거 아니겠….’
처음 만난 사람과 처음 잠자리를 가지는 것은 로맨스 영화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클럽 원나잇 기사를 보고서도 혀를 차며 세상말세다 말하던 나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오늘 만난 사람과 305호 문 앞에 서있다. 하지만 꼭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그 죽일 놈의 느낌 때문에 나는 그렇게 23살, 305호에서 하루를 보냈다.
건물 속 모든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귀에 다닥다닥 박히는 것 같았다.
새벽 2시쯤이 되자 소리의 농도가 짙어졌다.
“우리가 더 크게 소리 내 볼래요? 재밌잖아요.”
얼마 전 친구와 함께 봤던 대만영화에서 더 크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옆 방 사람들을 당황시킨 장면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whatever”
“no, I’m BUT!!”
“뭐어어?? ㅎㅎ”
나는 최대한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큭큭거리며119나, 112 중 뭐 하나라도 출동하지 않기 만을 바라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 어울리지 않는 굉음을 만들며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가 있어 다행인 마무리였다.
새벽, 3시 40분. 우리는 퀴퀴한 냄새를 뚫고 다시 상쾌한 새벽공기 속으로 나왔다.
“살 것 같다. 공간의 중요성. 여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분위기가 별로야.”
“그래? 난 좋아. 뭐든지.”
그는 말끝마다 그래라든가, 좋아라든가, 뭐든지 때론 Whatever 같은 말들을 덧붙였다.
그의 그런 반응들은 지만이 네가 뭐든 열쇠를 쥐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그것 또한 23살 하지만은 마음이 좋아져 버렸다.
집에서 하는 출근과, 집으로 들어가서 그다음 학교 수업으로 향하는 일정은 꽤나 건전하게 느껴졌다.
그 건전한 기분 때문에 나는 그를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랬던 것 같다.
꽃 봉오리가 움찔거렸다. 만개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3. 잊기 쉬운 방법
영화심리학 개론.
정인과 나는 교양강좌로 영화 심리학 수업을 같이 들었다. 둘 다 영화를 좋아했고, 둘 다 연애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선택한 과목이었다.
연애는 곧 심리 게임이니까.
수업을 듣다 말고 정인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정인, 나 남자랑 잤어”
숫자 1이 없어지자마자 도착한 대답
“수업이 직방이네. 누구랑! 누구야!”
카톡으로 전하기에는 너무 묵직한 내용들이었다. 읽히면 사라지는 숫자 1에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교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인이의 시선을 애써 견뎌냈다.
“아!! 정말 이게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뭐야. 누군데!”
“뭐 대단한 거야? 남자랑 잔 게? 그렇게 됐어. 만난 지 오래되진 않았고.”
“허얼…”
“내가 민수 오빠 때문에 평생 남자 안 만날 까봐? 왜?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뭐지…이 낯선 분위기? 너 만나는 사람 요새 없었잖아. 소개팅 나갔어? 이게 이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어제 만났어 어제.”
“어제 만나서 어제 잤다? 그러니까 어제 만난 처음 보는 사람이랑 잤다?”
“와…. 하지만 세다?”
“응 세지. 나 센 언니야.”
“뭔 바람이 분거야 정말 아주 아주 아주?”
“교양과목 덕을 봤다고 해두자. 우리. 너 열심히 수업 들어 딴청 피우지 말고. 영화 씬 하나하나가 연애 교과서라고.”
“와……. 하지만 얘 좀 봐라.”?
그때 멀리서 허클베리 빈이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허클베리 빈, 우리는 성빈이를 그렇게 불렀다.
성빈이는 자기 이름을 허클베리 빈이라고 소개했다. 골뱅이 소면을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허클베리빈이라는 단어에 힐끔 그 아이를 바라봤던 일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정말 ‘헉’ 같았다.
정인이와 내가 빈에게서 내 인생이 책 속 주인공, 헉 그 자체였다는 말을 들었던 날 그가 왜 스스로를 허클베리 빈이라고 부르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성빈이가 매일 고주망태가 되어 온갖 욕설과 폭력을 해대는 아버지에게 벗어나는 방법은 그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도망가는 것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상빈에게 도피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이었다. 부산에서 가장 먼 곳이 그때는 서울같이 느껴졌을 테니까.
서울보다 먼 곳이 정말 많은데 왜 하필 서울이었을까 성빈이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눌러 담았다.
부산 사투리를 멋들어지게 하는 성빈이는 아픔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내서 늘 마음 한편을 아리게 하는.. 그런 친구였다.
“빈이 온다! 빈이랑 같이 얘기해?”
“이따 이어 얘기해.”
정인이는 슬쩍 나를 흘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빈이 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순간 빈이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성빈이는 무슨 이야기든 들어줄 그런 친구라는 믿음이 언제 어디서 왜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 뭔 일 있어?”
성빈이가 둘을 번갈아 가며 물었다.
“ 어제 남자 만났다고 하니까 정인이가 저렇게 난리네?”
“ 잘했네 지만이! 나보다 괜찮은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한 거야?”
다른 친구들이 말했다면 콧방귀도 안 뀌었을 테지만 성빈이의 질문에는 찰나 고민이 됐다.
‘성빈이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
괜찮은 아이였다 성빈이는. 말도 행동도 모든 것이 그냥 괜찮은 인간이었다.
“ 나 커피 하나 빼서 수업 바로 들어가려고. 수업 다 끝나면 연락해 같이 저녁 먹자!”
“콜!”
성큼성큼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성빈이를 보면서 나와 정인이는 동시에 말했다.
“ 성빈이 다리 진짜 길다.”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고 큭큭 거렸다.
“ 찌찌뽕”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한 문장을 더 말했다.
‘ 참 괜찮은데 지구별 사람 같지가 않단 말이야. 신기해.”
23년의 인생을 눈을 감고 찬찬히 되감아 보면 나의 장르는 산문집이다.
많은 감정이 가미되지 않고 순차적인 흐름만 따라가도 마지막까지 그 여정에 함께할 수 있는 산문집.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정인이는 자기 계발이 어울렸다.
누구도 반박하기 힘든 순서대로 차분히 나아가며 살아가는 아이.
그렇다면 성빈이의 장르는?
사람들이 하는 작은 귀퉁이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의 인생 장르를 결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성빈이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어릴 때 읽었던 성장소설들이 모조리 떠올랐다.
그런 소설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성빈이는 결국 나에게 성장소설 같은 인물이었다. 성빈이의 뒷모습에서 오늘 문득 SF분위기가 감돌았다.
여름의 햇살은 강렬하고 깔끔했다. 주변의 것들을 쨍하게 보이게 하고 덕분에 그 자체의 의미를 심플하게 느끼게 만드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었다.
햇살을 듬뿍 받아 쨍한 초록색으로 변한 잎사귀들은 초록색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예뻤다.
“지마이 – “
지마이라고 날 부르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다. 성하 선배.
“어? 선배! 복학했어요?”
“응 복학생이랑도 말 섞어주고 할 거지?”
정인이와 내가 함께 있었지만 성하선배는 나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정인이는 불편한 기색을 일부러 내비치고는 속도를 내서 걸었다. 나는 순간 점심으로 먹은 칼국수가 얹혀서 코로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시키고 이 저 영인!!!! 정인이 이름을 과장되게 부르며 뛰어갔다.
“야 이정인! 먼저 그냥 가 버리냐. 그래도 눈인사는 받아주지.”
“정말 사람은 쉽게 안 변해. 뻔뻔하게 인사를 하냐.”
“너 성하선배 못 잊고 그런 건 아니지?”
“미쳤어? 마무리가 하도 엿 같아서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 것뿐이야.”
나는 생각했다. 마무리가 엿 같은 일은 일부러 라도 싹싹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는 게 나은 것 아닐까. 하고.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잊고 싶은 순간들을 지워 나가고 있을까..
정인이가 성하선배와 사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괜히 심술이 났다.
성하선배는 분명 나에게 연락을 자주 했다. 성하선배는 분명 나와 더 도서관에 자주 갔었다.
청바지 하나를 사고 싶은데 혼자 영 고르지 못하겠다고 주말에 전화를 하기도 했고, 대박 식당을 발견했다고 연락하기도 했다. 민수오빠가 내 남자친구였지만 어쩔 때는 성하선배가 내 남자친구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성하선배를 만나게 될 때마다, 조금씩 설레는 마음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민수, 그러니까 내 남자친구는 주말에는 늘 바빴다. 평일에도 알바, 주말까지 알바. 뭔 인생이 알바에서 시작해서 알바로 끝나냐며 쏘아붙이기도 했지만 사실 철없는 투정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민수오빠가 가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기 힘든 현실이었으니까.
민수오빠는 같은 과 동기인 성하가 주말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잘 다녀와. 재미있게 놀고.”라고 말하는 남자친구가 더 미웠다.
심술이 더해진 날이면 보란 듯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성하선배 만나려 나가려고.”
“아. 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이따 전화할게. 나 지금 과외 중이라.”
이따 전화할게. 는 늘 과외가 끝난 저녁시간이었다. 늘 시간이 또 이렇게 늦었네.라는 말은 늘 전화의 시작이었고, 미안하다는 말은 늘 전화의 맺음말이었다.
사랑해, 보고 싶어, 달려갈게 이런 말들을 메모지에 끄적거리다가 결국 글자가 보이지 않게 선으로 그어버렸다.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만 목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괜히 자존심 상했다.
민수오빠는 정인이의 동생도 과외해 주었다. 민수 오빠는 누가 봐도 모범생으로 어머님들의 칭찬을 받는 엄친아였고 친구 사이인데 아들 시간되면 내 아들 좀 부탁해~라는 한마디로 과외는 일사천리로 상사 됐다.
민수오빠의 엄마와 정인이 엄마는 고등학교 동창 사이였는데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말을 어른들에게 듣게 되면 나의 반문 시동은 부릉거렸다.
정인이와 친구인 내가 정인이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 아들, 민수오빠와 연애를 하는 것도 사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연인 것이라고 정인이는 웃으며 말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람을 보이지 않게 옭아매려고 작정들을 하고 있군..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보이지 않게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것. 인연이라는 말로, 사랑이라는 말로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치졸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나와 민수오빠의 사이를 일정 거리 유지하게끔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넓은 인간관계’라고 표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긴 거미줄 몇 개가 인간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꼴이었다.
그 긴 줄들에는 당연히 가족과, 친척, 친구가 포함됐다.
즉 우리는 가족, 가족이 아는 누군가, 가족이 아는 누군가의 누군가, 또는 친척이 아는 누군가, 그 누군가의 부탁을 받은 누군가,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가 소개해준 친구라는 인물로 여기저기 정신없이 얽혀 있는 것이다.
민수오빠도 그 거미줄에서 어쩌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때론 그런 걱정까지 했다.
늘 가족이 – 친구가 – 부모님이 –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늘 투덜대고, 늘 화가 나서 날 서 있던 내 마음들을 생각해 보면 미움보다는 그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민수오빠와 연애 중이었지만 늘 기다림 중이었고 그래서 그 외로움을 채우고 나서 헤어져도 헤어지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말하지 않은 말을 내가 먼저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그가 하지 않던 행동을 내가 먼저 했더라면.. 우리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런 외로움을 성하선배는 말없이 채워줬다. 아니, 채워주고 있다고 착각했다. 나는 성하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남모르게 저울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성하선배가 내 친구 정인이 와는 어떤 연결고리로 엮여 있단 말인가..
정인이가 성하선배와 손을 잡고 걸어오는 모습을 봤을 때 얼굴이 왜 그렇게 화끈거리던지.. 마음을 들킬 까봐 일부러 열감기가 있다며 둘러댔었다.
‘구질구질하다 하지만.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정말 한심하다 하지만 너.’
매일 같은 전화, 같이 먹는 잦은 점심과 저녁, 주말 외출은 ‘호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이었나.
‘내가 벌을 받는 것인가, 그들의 놀음에 내가 놀아난 것인가.’
정인이는 성하오빠와 만나게 됐다는 사실을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정말 친한 선배라고 설명했으니 정은이와 성하선배가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관계였다.
그래도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를, 그녀를, 나를 심판하고 싶었다.
혹은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의 시간을 저울질했던 거니.’
그날 성하선배와 정인이 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모든 생각은 각자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두 사람 모두 평정심을 유지하면 결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는 거라고.
몇 월 몇째 주 주말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성하선배와 주말, 청바지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갈아타지 않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버스정류장에 서 노선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내 뒤에서 수분기 머금은 그 아이가 인사를 했다. 그게 다였다.
“지만아!!!”
정인이의 손에는 목욕가방이 들려 있었다. 머리도 채 말리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진 채 싱긋 웃는 정인이를 보면서 평소보다 더 싱그럽다고 생각했다.
목욕가방에는 정인이의 목욕 용품과, 정인이의 수건, 정인이의 곱창고무줄, 정인이의 옷가지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로 구겨져 있었다.
“나 목욕탕 다녀오는 길에 뒷모습이 너 같길래! 맞네”
정인이는 나와 말을 하며 성하 선배에게 살짝 눈인사를 했다.
성하선배의 표정은 정말 미동하나 없는 돌하르방 같았다.
그 돌하르방 같은 묵뚝뚝 함을 보고 ‘다행이다’ 느꼈던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성하선배를 조금은 좋아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 와중에 이런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어떤 순간에도 꾸밈없는 아이가 가진 매력이 저런 것인가.. 같은 그런 느낌.
청바지를 사면서 정인이의 이야기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었다. 아니.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시작점이 언제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애매한 중간지점에 걸쳐 서서 마음을 헤매던 내가 떠올라 몸서리쳐졌을 뿐이다. 이 길도, 저 길도 나의 길이 아닌 것 같은 감정이 혼란스러웠던 그 시간이 떠올라 마음이 또다시 내려앉았을 뿐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부분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
지우개로 지워도 약간의 흔적은 남겠지만, 화이트로 아무리 깨끗하게 지워도 덧입힌 흰 자국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애써 외면하기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나도 안다.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말끔히 지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잊었다고 말하면서 사실 잊은 척 연기하며 살고 있는 있을지 모른다.
난 가장 잊기 쉬운 방법은 잊은 척 연기하는 것, 그것뿐이니까. 지우개로 지울 필요조차 없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그거니까.
그때 내가 작은 용기를 내서 관계의 실타래를 정리했다거나, 몽글거리는 마음을 표현했다거나, 쪽팔려! 소리치며 엉엉 울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려앉은 마음도 다시 통 하고 탱탱볼처럼 튀어 올랐을지 모른다. 그런 나이였으니까.
헤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어딘가로부터 무언의 거리를 가질 용기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그 용기를 한 번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고. 그걸 알아버려서 지금 이리 마음이 내려앉는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성빈이 얼굴이 찰나 스쳤다.
우리 중에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은 성빈이, 한 사람밖에 없다. 문득 성빈이 생각이 났다.
4. 관계의 미덕
모든 관계는 셋 중 하나다. 더 단단해지거나, 끊어지거나, 끊어질 듯 말 듯 위태롭거나.
나와 민수오빠의 관계는 더 단단 해 질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위태롭게 버티다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인생 첫 헤어짐이 생각보다 담담해서 놀랐다. 정인이와 성하선배를 마음에 담고 종이접기 하듯 꾹꾹 눌러 접었을 때가 더 힘들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정인이와 성하 선배만은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였다.
매주 수요일, 학교 앞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딱 한 달 째다. 친한 언니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수요일은 수업이 가장 적어 오전에 모든 일정이 끝나기도 했거니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는데 노동만큼 좋은 일은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언니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성빈이는 수요일 수업에 가기 전,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해서 들고 갔다.
“왔어?”
“나 아아! 한잔. 내일이면 쿠폰 다 채웠다. 내일은 무료로 받아 야지”
30개의 쿠폰을 다 채워서 신이 난 성빈이는 성하선배의 동생이다.
3살 터울의 형 동생은 누가 말하지 않으면 절대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닮지 않았고, 대놓고 형제라고 설명해 줘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서먹했다.
무료로 커피 얻어먹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나에게 치사하게 진짜 한 잔을 공짜로 안 내어줬다고 툴툴대던 성빈이는 성하선배가 정인이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잘 어울리나? 형이랑 정인이가?”
“형? 아는 형이구나? 성하선배?”
“우리 형인데?”
“컥.. 형제라고?”
“응. 안 친한 형제.”
“왜 얘기 안 했어?”
“얘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남남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지나다니는 선배들 중 하나랑 비슷해. 큰 의미 없어 나한테는”
“너한테는? 성하 선배한테는 다르다는 의미로 들린다?”
“거기도 마찬가지겠지.”
“운명의 장난이니? 싫어하는 것 치고는 너무 가까이에 있잖아.”
“난 운명을 거스르는 허클베리 빈이라는 거 까먹었어?”
성빈이는 말할 때마다 말에 파도가 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높낮이가 달라졌다.
그게 부산 말의 매력 같았다. 파도 같은 음성.
내용이 슬퍼도 파도처럼 강인하게 들리고, 화가 나도 파도처럼 부서지며 담담하게 들리기도 하는 것, 부산 말을 듣다 보면 괜히 부산 말투를 가진 그 아이가 더 예쁘게 느껴졌다.
아무리 못된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 운율의 예쁨에 동화될 것만 같았다.
나는 민수오빠와 헤어지고 열심히 일하고 책을 읽었다.
내 인생에서 평생 정리되지 않을 관계는 책이 유일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크고 작게 잊어야 할 것들이 생기면 나는 집착처럼 책에 빠졌다. 평온한 척 연기하며 책을 죽어라 읽었다.
현실에서 잠시 탈피해 소설 속 곁다리로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음미하는 것, 그럴 때 마음이 편안 해졌고 또 현실에서 가장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는데, 상상으로만 했던 일이 누군가의 머릿속을 거쳐 이미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늘 짜릿했고 심지어 몇 세기를 앞서 살다 간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지금 나보다 더 현대적으로 느껴질 때, 바로 그 순간 나에 게도 묘한 ‘용기’가 생겼다.
용기가 부족했던 하지만 나는, 그 짜릿함과 용기를 얻으려 소설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는데 성하선배가 과장되게 손을 흔든다.
조용한 공간에서의 과장된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민하게 섹시한 행동이기도 하다.
‘저런 면이 매력적이야, 맞아.’
박자를 맞춰주려 환하게 웃으며 선배에게 간 나는 성하 선배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보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정학 이론], [연애, 이렇게만 하면 죽을 때까지 한다]
“풋. 선배, 요새 연애 힘들어요?”
“아 이거? 재미 삼아 빌려 보는 거야. 힘들긴! 오빠 몰라 지만이?”
“죽을 때까지 연애만 하면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제목 죽이지? 이런 건 일단 읽어봐야 해. 내가 읽어보고 얻은 게 있으면 말해 줄게”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는데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있어 살짝 고개로 미안함을 표시하고 선배와 나는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맞네. 오늘 수요일이잖아. 너 오늘 일 하는 날 아니야?”
선배가 말했다.
“오늘은 사장님이 직접 하신다네? 이유는 모름. 일단 오지 말라서 좋다고 대답했지.”
“.. 그나저나 선배, 성빈이랑 형제라면서요? 나 듣고 너무 놀랐는데?”
“아 몰랐구나? 다 아는 줄 알았지.”
처음부터 자세히 물어볼 생각도 없었지만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말을 닫아버렸다.
“성빈이 그 자식 나 때문에 아직 화 많이 나 있지. 아마 형이라고 생각도 안 할 거야. 어떻게 대학도 같은 곳에 오게 돼서.. 일이 좀 복잡하게 됐는데 뭐 생각하기 나름이거든. 별거 아니다 생각하면 별거 아니고, 별거다 생각하면 별거고..”
“음……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 그렇죠 뭐.”
나는 어떻게 대답을 받아쳐야 할지 난감해 고개를 끄떡거리며 경청의 자세로만 몰두했다.
“우리 집 가족이 좀 골치 아파.”
성빈이의 아빠, 성빈이 에게 늘 주먹을 휘둘렀던 아빠, 도망가기 위해 발버둥 치게 만들었던 그 아빠, 성빈이가 허클베리 빈으로 느끼게 만든 장본인이 떠올랐다. 사실 가족이란 함께 있으면 화목하고 골치도 아픈 그런 관계 아닌가.
“…. 우리 집도 뭐 골치 아파요..”
“성빈이는 알고 있었더라고. 아빠가 새 살림을 차리고 있던 걸. 알고 엄마에게 말을 안 했었어. 3년 넘게. 독립할 순간이 오면 엄마를 데리고 엄마를 독립시키면 그만이다 생각했을 거야. 그렇게 도망가라고 싹싹 빌어도 그 자리에 바보처럼 그대로 있던 게 엄마인 걸 알았으니까.
성빈이가 내린 결정은 내가 엄마를 독립시킬 수 있는 나이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티자 이거였던 것 같아. 그때는 대학이 유일한 길이고, 가장 합리적으로 멀리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가 됐었을 테니까.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하지 않겠다고.. 절대 엄마한테 폭력 외에 다른 상처를 더 남기지는 않겠노라고 결심을 한 것 같아….”
더 이상의 상처를 남기지 말아야 할 주체는 성빈이도 성하선배도 아니었다.
하지만 얽힌 관계 속에서 뭐라도 해야 했을 어린 두 형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성하 선배는 책 모서리를 주기적으로 매만지며 계속 말을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곤조곤 읊조리는 독백이었다. 성하선배의 말은 나에게 하고 있다기보다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에 더 가까웠다.
“….. 그걸 내가 깼지.”
조용히 앉아 목소리를 들으니 그때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지거나 작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빠랑 살림 차린 여자가 내가 일하던 편의점 점주 딸이더라. 엿 같지?”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에는 오돌토돌한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성하 선배는 작정한 듯 자분자분 이야기를 이어갔다.
“편의점 근처에서 우연히 아빠랑 그 여자를 본 날, 나는 엄마한테 바로 이야기를 했어. 엄마는………………. 힘들어하셨지.. 많이 울었어. 그리고 날 보던 성빈이의 눈빛도 생생히 기억나. 죽여 버리고 싶은 게 아빠가 아니라 나인 것 같았으니까.
그 말 듣고 며칠 있다가 엄마가 다리 난간에서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이랑 집에 온 게 한 번, 정말 뛰어내리기 직전 운 좋게 발견돼 소방관이랑 집에 온 게 한 번...”
아는 것이 2번이었으니 그간 모르는 막판의 순간이 몇 번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테고 그렇게 벼랑 끝까지 몰고 간 게 성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성빈이는 엄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더라. 그리고 저녁 늦게 들어왔는데 나도 묻지 않았어. 어떻게 할 거냐고 엄마에게 물으니까 엄마대신 성빈이가 대답하더라. 뭘 어떻게 하냐고.”
성빈이의 엄마가 되어 잠깐 감정이입을 했다.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에게는 너무 쉬운 대답이었다. 헤어지면 되는 거 아닌가.
그 간단한 대답을 왜 하지 못해 끙끙거렸으며 왜 그 관계의 끈을 완전히 난도질하지 못했을까. 23살의 나는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선배, 그냥 헤어지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지 같은 사람 쿨 하게 잊고 새롭게 인생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이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더 이상 마음 고생하지 말고 그냥 끝내 버리라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지. 그런데 헤어진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래. 겁이 났었을 수도 있어. 긴 시간 길들여진 엄마였으니까. 엄마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가 없었으니까.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우리에게 반문하던 엄마였으니까. 엄마 마음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난.”
“.. 슬프다…. 선배.”
“그날 집에 들어온 아빠 옷에서 여자 냄새가 나더라. 지랄을 좀 했어 내가. 아빠 대접받을 생각 꿈에도 말라고. 성빈이가 옆에서 조용하게 말하더라. 죽을 때까지 처절하게 고통 느끼게 해 줄 거라고. 우리가 받은 상처만큼은 똑같이 느끼게 해 줄 거라고..”
“그날 아빠가 뒷목 잡고 쓰러지셨거든? 심장 마비였대. 그날 돌아가셨어. 병원에 가자마자. 참나.. 졸라 황당하고 허무하더라.”
“……하…..”
“성빈이는 내가 기회를 뺏었다고 생각해. 3년을 참고 견디면서 기다려온 시간을 1분 만에 다 뭉개 버린 게 바로 나 때문이라고. 그래서 엄마가 겪은 고통, 자신이 겪은 아픔.. 하나도 되돌려주지 못해서 죽을 것 같다고.. 엄마 얼굴 볼 때마다 미안해 죽을 것 같다고…”
성빈이 에게 죽음은 아버지의 고통이 아니라 아버지의 평화였다.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도 전달되지 않겠어? 기다려야지 어쩔 수 있니. 나도 같이 맞았는데 성빈이 그 자식은, 누가 들으면 지만 맞은 줄 알겠어.. 하하. 잘못은 내가 아니라 아빠라고. 아 답답하다 나도. 왜 이렇게 관계가 꼬여버렸는지.”
“선배… 하하… 지금 어색한 거 알죠?”
“티 났니? 크크 숨길 일도 아니고 뭐, 대충은 얘기 들어 다 알고 있을 줄 알았어. 모른다고 해서 내가 더 놀랐다 야.”
아무리 부모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연결 돼있어도 그들이 곧 내가 아니기에 늘 부분적인 결함은 존재한다. 서로를 아무리 이해한다고 말해도 완벽히 이해했다는 말은 개구라다.
나는 성하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솔직히 성빈이가 오버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 딱 까놓고 바람이 났다 치자. 바람이 나서 아빠가 새 살림 차렸다 치자. 그럼 보내주면 그만이다.
엄마가 맞고 있다? 내가 맞고 있다? 대학이고 뭐고 일단 집을 나와 버리면 된다.
본인이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이 부산과 그나마 먼 서울의 어느 대학이다?
아니, 그 순간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엄마에게 이거 엄마 인생에서 큰 일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 아니었을까. 삶을 울면서 버티지 말고, 그냥 화내면서 찢어도 된다는 걸 말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남편의 외도와 남편의 폭력이 엄마의 인생과 성빈이 성하의 인생을 송두리째 지각변동 시킬만한 일인가. 나는 자문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아무도 그들의 관계를 완벽히 알 수 없기에 쉽게 떠들 수 없다는 것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관계의 미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관계라는 이름만큼 애매한 게 또 있을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관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의 상처들이 존재한다. 그 애매함에 미덕이라는 단어까지 덧붙여진다니 이건 영 아니다. 관계라는 것은 ‘사랑’, ‘믿음’, ’ 배신’, ’ 증오’, 상황’ 같은 수많은 단어에 의해 깨지고 부서지고 어중간하게 붙을 수도 있는 그런 거니까.
그 와중에 누군가에 의해 쉽게 지각변동 되지 않을 사람, 그 인간이 바로 나 하지만 이다.
용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각변동 하지도 않을 인간. 나는 그런 사람이다.
5. 헛소리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거다. 다 때가 있다. 나는 이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헛소리 중에 최고봉은‘ 미안해’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은 그 순간을 회피하거나, 빨리 상황을 일단락시키고 싶을 때 가장 유용한 단어다.
그래서 그 유용한 단어를 우리는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평범한 건 가장 쉬운 거다. 다 때가 있다는데 살다 보면 때에 조금 뒤처질 수도, 먼저 앞장설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런 두 문장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말해버린다.
“그건 헛소리죠.”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해대는 사람은 착하다기보다는 빨리 상황을 무마해버리고 싶어 보인다. 보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미안해 말고 차라리 솔직히 욕을 해줘요.”
그와는 305호에서 만난 이후 매일 연락을 했다. 매일 만날 수도 있었지만 때마다 일이 생겼고 한편으로는 뜨거운 밤 이후 이어지는 간단한 연락들이 더 관계에 불을 붙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나의 대화 패턴은 거의 일정했다. 일상이야기로 시작해도 책으로 귀결됐고, 술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도 결국은 책으로 돌아왔다. 그는 출판사에서 가장 많이 읽게 되는 게 자기 계발서라고 했다.
“자기 계발서를 찾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라는 화두가 던져지면 우리는 앞에 무슨 음식이 있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책 소개를 하거나, 독서 습관을 잡아주거나, 새벽마다 같은 시간에 기상해서 자기 계발을 서로 독려하는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죽이 잘 맞았다.
정인이 에게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몇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냐고 그 자체가 신기하다고 말하곤 했다. 실실 웃는 게 요새 연애 하냐는 엄마에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얘기하니 부럽단다.
“말 잘 통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 부부끼리도. 부럽다!”
결혼하고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말 잘 통하는 게 어렵다고 말을 하다니.. 부럽다고?
“아빠랑 어찌 살았대 지금까지?”
“뭔가 주고받고 하는 재미가 있어야 말을 하지. 입 닫아서 살았다 이것아.”
미혼의 입장에서 기혼자를 바라볼 때는 늘 의구심이 먼저 든다.
저들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일까. 저들의 표정은 증오일까 무관심일까.
저들의 행복은 연기일까 진심일까. 연애 후 결혼은 의리일까 사랑일까.
아빠와 엄마가 군대 동기처럼 서로를 대하거나, 걸어가면서도 앞뒤로 다른 집 사람처럼 걸어갈 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고 함께 커피숍을 가자고 해서 갔는데 각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을 때 생각은 확고함으로 변했다.
결혼은 사람을 매 마르게 하는 최고의 수단이 아닐까.. 하는.
의리라는 마음으로 평생 살아야 한다면 난 차라리 도를 닦거나, 군대에 가겠다.
내가 느낀 결혼의 감정은 긍정이 한 스푼, 부정 10스푼 정도의 비율이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결혼적령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일하면서 애까지 키우며 스스로 지각변동 해야 하는 자체가 엄두도 나지 않았던 성격 탓에 어쩌면 지금 상황이 나에게 적절하게 부여된 최선일지 몰랐다.
그날은 학교 근처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체크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딱 ‘그’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손을 흔들며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성빈이와 마주쳤다. 성빈이 에게 요새 만나는 오빠라고 소개를 해주니 성빈이는 커피숍으로 얼굴을 돌려 꾸벅 인사를 했다.
“어디가.”
“나 커피 먹으러”
“나도 커피 사러 가는데? 같이 가자”
“그래”
성빈이와 나는 그가 있는 커피숍으로 함께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 “
성빈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그도 성빈이에게 인사를 했다.
“ 너 커피사서 빨리 가-“
내가 성빈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그는 성빈이에게 의자에 앉아서 같이 먹자고 했고 나는 그 모습이 어른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나는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 번 빨다 말고 성빈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언제 말을 했지?’
“저번에도 이 근처에서 뵀던 것 같은데.. 제가 얼굴 기억을 잘하는 편이라.”
나는 한 번 더 성빈이를 바라봤다.
‘쟤 오늘 왜 저래?’
그는 어깨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제가 많이 흔한 얼굴이긴 하죠? 하하. 이목구비 하나라도 좀 부리부리했으면 좋았을 걸. 전형적인 흔남입니다. 하하”
“언제 독서모임 강의 참석할 때 나도 데려가 하지만. 나도 좀 들어보게.”
“…. 어? 어..”
‘쟤 오늘 왜 저래..’
“나 그다음 수업 있어서 먼저 간다. 먼저 일어날게요. 다음에 또 봬요.”
“그래요. 다음에 봅시다.”
성빈이의 말투에 분명 가시가 있었다.
“어디서 만난 적 있었나? 이상하네 정말?”
“하나도 안 이상하던데 뭐. 커피 마시자. 오늘 가고 싶은 곳 있다면서.”
오늘은 그에게 내 아지트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학교 후문으로 나와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동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아담한 산이 하나 있다. 상점이 있는 게 더 신기한 곳에 작은 책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걸 발견한 날 얼마나 기분이 찢어지게 좋던지.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건물 근처 곳곳을 탐방했다. 자연과학대 건물로 갔다가 사회과학대 건물로 갔다가 이리저리 건물을 휘젓고 다니면서 막연히 상상했던 것 같다.
나는 훗날 어디에 소속돼 있을까.
후문으로 나가면 주택단지랑 연결이 돼 있어서 이 근처 사는 아이들 아니고서는 거의 정문을 사용했다. 나는 그날, 후문 주변을 탐방하기로 작정을 했고 조금만 더 올라가 볼까? 하는 마음으로 발견한 곳이 바로 그 책방이었다.
[김순례 엄마 책방] 간판도 없는 작은 책방 유리에는 김순례 엄마 책방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흰 종이에 검은색 굵은 매직으로 쓴 글씨는 썼을 때 얼마나 꽉 쥐고 썼을지 상상이 될 만큼 진하고 두껍고 투박했다.
“안녕하세요. 들어가도 되나요?”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그곳은 손님이 어색한 공간이었다.
로션 하나 바르지 않은 것 같은 거칠한 얼굴의 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안 사도 되니 읽다 가, 학생.”
책을 읽기에 명도가 어두웠고, 책을 읽자니 앉아 읽을 공간도 마뜩잖았다.
“여기는 처음 발견한 곳이에요. 오래 하셨어요 책방?”
할머니라는 말이 괜히 속상하게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에 최대한 호칭을 빼고 질문을 했다.
“ 3년 정도 됐나? 우리 딸 기다리느라 버티는 거지 뭐.”
“따님이요?”
그러고 보니 김순례 책방이 아니라 김순례 엄마 책방 인 게 특이했다.
“여기 다 재개발된다 하던데 1년 정도 버틸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애가 올 거 같아서 혹시 엄마 이름 까먹을까 싶어서 내가 간판 다 없애 버리고 글자로 박았어. 내 이름이 김순례거든. 옛날 사람 이름이지 딱?”
책장에 드문드문 꽂혀 있는 책들은 책 이라기보다는 그 가족의 흔적같이 느껴졌다.
참고서부터 표지가 누렇게 된 명작들, 종교서적이나 철 지난 잡지들도 눈에 띄었다.
이곳 어느 곳에도 깨끗한 책이나, 요새 핫 한 베스트셀러 책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연 있는 곳이구나.’
나는 그날 사연 있는 공간을 발견한 사연 있는 여자가 된 것 같아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1년이라는 시간정도가 남았는지 아니면 덜 한 시간이 남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사이의 시간의 공백을 내가 채워드리고 싶다고.
수업 공강시간에 그곳에 자주 들렀다.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으면 약국에서 뜨거운 쌍화탕을 드리고 오기도 하고 어버이날에는 아빠 엄마 카네이션을 사면서 작은 화분 하나를 더 사기도 했다.
정인이는 그곳에 가면 괜히 우울해진다면서 꽁무니를 뺐다.
“이리 매일 오면 언제 친구는 만나나. 시간 금방 지나가, 마음껏 보내야지 이런 좁은 데가 뭐 재미있다고 자주 와.”
“순례 씨, 이렇게 말하면 더 자주 와요 저?”
몇 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김순례 엄마책방 주인, 김순례 씨를 순례 씨라고 부르게 됐고 결과적으로 보면 나랑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순례 씨의 우울한 마음도 조금은 희석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순례 씨. 딸이 안 오면 어떻게 해요?”
“딸이 안 오면… 아마 안 올 거야. 이렇게 기다리는데 안 오는 걸 보면. 내가 모질게 대했어. 책방을 원래 딸이 했었거든. 어릴 때부터 책 좋아했지 민영이 걔가. 좋아하는 거 찾아 일도 하고 돈도 번다고 가장 성공한 사람이 자기라고 얼마나 말했나 몰라. “
“그럼요. 좋아하는 일 하는 게 얼마나 복인 데요.”
“엄마 같이 자기는 안 살 거래. 갑자기 사라 졌어.”
“갑자기요?!!”
“남편한테 매일 돈 뜯겨, 친척들한테 무시당해, 말로는 당장 내가 이 집을 나가고 만다, 나갈 거다 말만 하다가 궁상스럽게 벽 보고 화 식히는 모습이 진절머리 난다고 늘 말했지. 민영이가.”
명절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이게 되는 그날, 민영 씨는 엄마의 무너져 내린 자존감 하나를 세워주려고 바득거렸을 거다. 그 바득 거리는 딸이 모진 말 듣는 게 싫어 순례엄마는 딸에게 화를 냈을 거다.
손가락질과 온갖 모욕 속에서 결국 자신도 던져버린 엄마에게 실망을 했을까, 분노했을까.
민영 씨는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쓰레기 같은 것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쓰레기 같은 것들에 순례 씨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나에게 일러주었다.
“평생 딸 마음에 짐 주며 살아서.. 민영이가 내 얼굴 보기 힘들다고 해도 난 할 말없어. 그냥 김순례 엄마 책방이라고 내가 혼자 마음 앓이 하는 거지. 엄마 여기 있다고. 다 끊고 혼자 이제 있다고. 그러니 혹시 슬쩍 들러서 날 보면 엄마! 하고 다시 들어오라고.”
“정말 다 끊었어요?”
“딸 저렇게 뛰쳐나가버리고 다들 손가락질하는데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리 병신같이 참고 살았나 싶더라. 다 나만 참으면 조용한다 기에 입 닫고 귀 닫고 눈 감고 지낸 게 몇십 년인데 그 세월 동안 내 하나뿐인 자식이 그 설움 같이 받았을 거 아녀.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노인네가 이제 뭐가 무서워. 더 일찍 다 못 끊어 버린 게 한이 되는 거지.”
“그렇다고…. 이렇게 안 올 수가 있나…”
“난 걔 잘 알아. 민영이는 한번 한다면 하는 애야. 나처럼 지지부진하지 않아 그 아이는. 그래서 못 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잘 살고 있는 거 다 안다! 이런 마음이 절로 든다니까. 그게 효녀지 다른 게 효녀인가? 안 그래?”
김순례 엄마 책방..
김순례는 바보 같은 엄마다. 후회가 많은 엄마고, 여전히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고, 그래서 자식을 기다리지만 막상 오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애써 합리화시키는 여전히 바보 같은 엄마였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왜 다 바보 같을까…’
나는 순례 씨와 말하면서 여행 작가를 꿈꾸던 엄마가 떠올랐다. 아빠의 잦은 지방출장은 당연하게 이해하면서 여행 가서 글 한번 쓰고 싶다는 말이 아무렇지 묵살당했을 때 한마디 못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작은 학원이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던 엄마가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지만이는 어떻게 하고’라는 질문에 고개 숙이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내가 크면서 그런 일들을 우스갯소리 마냥 전했지만 듣고 있는 나로서는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순례 씨의 딸처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난 절대 엄마처럼은 안 살아’
아무도 함께 가주지 않던 그 책방을 단 둘이 걸었다. 이게 사랑일까.
함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고, 기꺼이 행복한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는 멀리 보이는 작은 책방을 보더니 엄지를 위로 올린다.
“역시, 하지만 덥다. 이런 곳을 어떻게 발견했지? 탐험가네?”
“여긴 나만 알고 싶은 곳이라고요. 특별히 소개해 주는 거예요. 헛소리는 1도 없는 공간이랄까?”
“헛소리?”
“몰라요? 3대 헛소리?
첫째,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거다. 둘째, 사람은 다 때가 있다. 셋째, 미안해.”
“ 미안해는 왜?”
“미안해는 좀 가증스러워.”
그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렸다.
“왜 문이 닫혀 있지?”
작은 공간 뒤편에 뭐라도 있을까 싶어 책방 근처를 여러 번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김순례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민영 씨는 몇 살 정도였을까. 김순례 씨는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 엄마 또래일 수도 있던 것이었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거칠었던 피부와, 염색하지 않아 희끗하던 머리카락 색깔만으로 내가 김순례 씨를 할머니라고 단정 지었던 건 아닐지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만아 여기 쪽지 아니야?”
종이를 부욱 찢어 스프링 모양이 그대로 남겨진 줄 노트 위에 매직으로 꾹꾹 눌러쓴 세 글자가 들어왔다.
미. 안. 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왜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것인지.
미안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구역질이 나왔고 나는 화가 나서 왔던 길을 그대로 내려왔다.
그렇게 화가 날 일이었나.. 싶었지만 일방적인 관계해지 통보는 늘 날 힘들게 했다.
그래서 미안해라는 말이 가증스럽다. 미안해라는 말은 헛소리다.
...다음 주 연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