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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반하다2

6. 생각의 차이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때 내가 신간도서나 소설책 코너에서 서성거린다면 정인이는 철학코너에서 책을 골랐다.

글을 쓸 때 기본은 철학이라는 정인이의 논리를 사실 어느 정도 인정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상은 철학의 집합체 아니던가. 하지만 철학은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고루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너무 고집스럽지 않아? 난 철학 책 보면 가끔 그렇던데.”

맞아. 그런 것도 있지. 시대적인 것도 영향 있고. 나는 소설이 좀 힘들어.”

정인이는 소설을 즐겨 읽는 나를 신기해했다. 책을 딱히 가리면서 읽지는 않았지만 일단 좋아하는 작가는 알람 설정을 해놓고 바로 주문해 읽는 편이었고 SF소설이나 추리소설도 즐겨 읽었다. 책을 읽다 급박한 전개나 엄청난 반전이 나오는 중간 부분이 되면 왼쪽 엄지 검지손가락을 서로 비비면서 읽는다는 걸 정인이를 통해 처음 들었다.

긴장과 기다림, 스릴과 해결선이 나의 엄지와 검지 움직임에 다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난민 이야기를 다룬 [아메리카 더트] 책을 읽었을 때는 남겨진 아이가 내 가족인 것 같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위험을 피해 기차 칸을 허공에서 점프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칼을 들고 쫓아 오는 무리를 피하는 감정이입을 그대로 경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뜨거운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부분에서는 내 마음과 육체가 힘들 정도였다. 나는 이런 점이 좋았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의 상상력에 기대 참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소설은 현실이다. ‘! 이런 생각을 어찌했대?’라는 놀라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우리의 근처에서 누구나 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분야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도리스의 빨간 수첩]을 읽을 때는 요양원에서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을 애써 펴며 나를 맞아주던 할머니가 떠올랐고, [모순]을 읽을 때는 연애와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던 친척언니, 수빈언니가 떠올랐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읽었을 때는 누구나 열여덟 살의 소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라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는 한참을 멈춰 곱씹기도 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라는 문장에 괜한 위안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맞지? 다 그런 거지?..’ 하고..

현실과 상상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소설을 또 찾게 만드는 매력 아닌가.   

이렇게 매 장면 감정이입을 하는 나를 정인이는 신기해했고, 나는 고집스러운 사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논하는 철학을 물처럼 흡수하는 정인이가 신기했다.

이라는 공통분모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절대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에서 나오면 우리는 서로 대출한 책을 보여주곤 했는데 취향도 이렇게 갈릴 수 있다고 늘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지만아 너 비트겐슈타인 알아?”

프랑켄슈타인?”

“비. 트. 겐. 슈. 타. 인”

정인이는 막 한글을 뗀 아이에게 글자를 읽어주듯 내 눈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음을 냈다.

인간이 하는 그런 고민들 있지. 철학이라고 해두자. 그것들은 어쩌면 본인이 가장 힘든 시기에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사람 책 읽으며 하게 됐어. 원래 태어나고 자란 가족환경이 삶에 영향을 미치잖아. 생각도 마찬가지고.

삶과 죽음 자살 이런 단어가 이 사람에게는 평생 숙제처럼 와닿았던 거지. 이 사람이 말이야 철학적 문제랑 싸워보겠다고 은둔을 한다? 그것도 바닷가에다 오두막집 짓고.”

바닷가에 오두막집을 지었다는 딱 그 부분에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생각하기 좋은 장소인가. 바다가 있는 그 공간은.

그래서 바다가 해결해 줬대??”

그렇게 쉽게 흘러가면 인생이겠어? 생각 좀 해보자.. 정리 좀 해보자 했더니 1차 세계대전이 터진 거지. 그러다가 결국 포로가 돼서 수용소에 수감되는데 거기서 그렇게 고뇌하던 생각들이 해결된 거야. 그 전쟁 통에..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

정인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한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 사람 책

정인이는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메고는 이렇게 말했다.

위안되지 않아? 난 가장 힘든 시기에 뭔가 해결됐다는 그 맥락이 마음에 들더라.”

독서모임에서 이번 달 책 그리스인 조르바였나?라고 내가 묻자 정인이는 응 막가는 아저씨 이야기가 볼만하더라고 말했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거라던데? 하고 내가 말하니 정인이는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내키는 대로 사는 거 그거 병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더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재미있었다. 바로 수긍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니던데, 너는 어때?라고 물어볼 수 있는 대화의 결이 즐거웠다.  

독서모임 초청강사로 만났지만 이제는 내 남자친구가 됐고 출간을 앞둔 몇 권의 책 때문에 얼굴도 쉽게 보지 못하고 있는 그와 가장 부족한 건 대화할 시간이라고 정인이에게 말했고 정인이는 그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할애할 정성의 비중이 줄어든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잘 통하는 이 끊겨버린 다리 마냥 느껴지자 그와 나의 모습이 흡사 아빠와 엄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고 덜컥 겁이 났다.

언제나 그랬다. 처음은 설레 이고 뜨거웠지만 중간은 어느 순간 미지근해지고 덤덤해졌으며 마무리는 허무했다.

즉 연애든 인간관계든 핵심은 중간의 과정, 덤덤하고 미지근한 그 과정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판이 달라지는 거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끈도 시간 앞에서는 장사 없다. 아무리 다시 묶어도 느슨해지고 결국 닳아 약해지기 마련이다.

미지근한 중간 지점을 정인이와 성하 선배도 지나는 중이었다. 정인이는 성하선배와의 연애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연애에는 호들갑이더니 정작 자기 이야기는 안 해준다고 한마디 하면 연애가 뭐 별거니 다 똑같지 라는 말로 입을 막아버렸다.

정인이는 무조건 28살에는 결혼을 한다고 했다. 결혼 전에 취업을 하고 몇 년 동안 자리를 잡은 후 통장에 얼마를 모으고 결혼자금으로 그 돈을 쓴 뒤….. 나와 다르게 한참을 앞서갔고 계획도 치밀했다.

나는 연애를 하고, 뭐든 직장을 잡고, 연애를 하고.. 정도가 끝이었던 것 같다.

“‘결혼에 왜 이렇게 집착해? 요새 결혼 안 한다는 사람도 많고 애도 일부러 안 낳는 판국에.”

그냥 그렇게 해야 맞는 것 같아. 쉽게 안 바뀌어지더라 생각이.’

너 철학책 죽어라 읽더니 결혼에 대한 철학 같은 게 생긴 거 아냐? 28살 결혼설 크크

크크 여하튼 난 무조건 28살에는 한다. 결혼시점이 내가 정말 어른이 되는 시점인 거야.”

정인이는 결혼 후가 정말 성인으로서 다시 발을 내딛는 시작점이라고 말했고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말을 삼켰다.

정인이를 안 순간부터 주술처럼 말하던 28살 결혼이라는 말을 부정해 버리면 정인이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 같아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성하오빠한테 28살에 결혼하자고 했더니 오빠가 뭐라고 했게?”

뭐라고 했는데

미쳤다.”

미쳤다?!”

응 미쳤다고 하던데? 단칼에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오기로 무조건 그때 할 거라고 했더니 자기는 무조건 그때는 안 한대. 난 결혼 생각 당연히 할 줄 알았어.”

정인이는 이렇다. 사랑한다면 결혼까지. 결혼은 28. 사랑하니 28, 나의 결정에 맞춰주는 것.

루트가 분명했다. 성하 선배입장에서는 군대도 늦게 다녀온 마당에 취업도 못한 상황에 아직 1년이라는 학교생활이 남아있는 마당에, 돈 한 푼 없는 마당에, 아직 20대인 마당에 결혼 생각을 미리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하선배의 입장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에둘러 말이라도 좀 해주지..

28살이 인생 최대의 숙원사업인 정인이는 그날 이후 결혼이야기에 집착했다.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성하선배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가능하냐고 그게. 안 해. 안 해가 아니라 못하지.

지극히 현실적인 대화 속에 내 소설책 몇 권을 던져주고 싶었다. 써먹을 부분 있으면 알아서 써먹으라고..

순간 주변 조명이 켜지고 그들만의 세상이 펼쳐지는 소설 따위는 필요도 없다.

여행에서 알게 된 그들만의 가족사, 남몰래 숨겨둔 나의 과거, 작은 사고로 얻게 된 상대방의 소중함 정도가 가미된다면 그걸 로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상황이라 느껴졌다.

정인과 성하선배는 지극히 산문 같은 현실판 연애대화를 이어가다 결국 지지부진하게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성하선배의 마지막 멘트가 헤어짐에 결정타였다.

애가 시대에 뒤처져도 한참 뒤처졌다. 진짜. 여자애가 왜 결혼에 그렇게 목숨을 거냐?”

시대에 뒤처졌다는 부분에서 한 번, 여자애가 결혼에 목숨 건다는 부분에서 또 한 번 정인이는 그 두 어절을 곱씹으며 나와 감자탕에 소주를 먹었다.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던 정인이가 소주를 마시고 구겨진 얼굴로 감자탕 한 입을 홀짝거리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술도 마셔본 애가 마시는 거야 정인아. 분위기 그만 잡고 말해봐. 그래서 뭐 헤어지재?”

. 완전 일방적이야. 질려서 못 만나겠대.”

참나누가 당장 결혼하재? 왜 발을 빼? 겁쟁이구나?”

쇼핑백에다 내가 준 편지며 키링이며 다 싸가지고 오더니 볼 때마다 결혼 생각이 떠올라서 머리 부서질 것 같다고 가지고 가래.”

잘못했다. 성하선배는. 행동이 어렸고 가벼웠다.

그래서 가지고 왔어 그걸?”

. 이 씨.. 받은 내가 더 짜증 나.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걸 내가 또 받고 있더라고? 정신 차리니 그 인간 벌써 사라지고 없고.”

이런 미치….ㄴ”

영화심리학수업에서 교수님이 영화의 마지막이 너무 강렬하면 중간 스토리가 맥없어지고 반대로 영화의 마지막이 너무 담담하면 지금까지의 심리묘사들이 무채색이 되기 쉽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정인과 나는 둘 다 눈을 맞추고 도대체 뭔 소리야라고 했는데 그 맥락이 지금 이해되는 아이러니함이란..

성하선배는 쓸데없이 마지막이 너무 강렬했다. 마지막까지 담담했더라면 심심하기는 했어도 부분적으로 감동의 여운이 있는 영화가 완성됐겠지만 이건 너무 내달렸다. 과속.

그래서 결국 사고가 난 것이고 마무리는 처참했을 수밖에. 심심할 것인가 내달릴 것인가 결국 우리들은 이 모순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려웠다.

야 차라리 잘됐어. 이렇게 성격 지랄 맞은 사람인 거 지금 아는 게 낫지. 연애 더 하고 질질 끌다가 28살 되는 해에 이렇게 너한테 했어봐. 너 기절했지. 안 그래?”

말하고 보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고 정말이지 지금 헤어진 게 어쩌면 정인이도 살리고 성하선배도 살린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다.       

정인이는 철학책을 치유제 삼아 담담한 척 지냈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어쩌면 속으로는 더 곪아 있었을 나와 그도 각자의 생활에 집중하며 시간은 흘렀다.

성빈이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사실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 사람 너무 믿지 마.”

그 사람?”

초청 강의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이 여럿인 것 같더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곱게 내어주려던 커피를 성빈이 앞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질투하냐?!’ 

성빈이는 커피를 받아 들고는 짧게 대답했다. “ 아니

진지한 표정으로 너무 진지하게 말을 하고 사라져 버리니 공간에 남은 나는 그 진지한 분위기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바로 전화를 해서 그에게 물어볼까? 아니 내가 지금 성빈이 말 하나만 듣고 뭔 오해를 하는 거야.

지만아 너 그를 이 정도밖에 믿지 못 한 거니?

마음속에서 쉼 없이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손에 들었던 전화기를 다시 내려놨다.      

그날 저녁, 성빈이 에게 연락을 했다. 기숙사 앞 벤치에서 기다리면서 성빈이가 내려올 길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빈이의 회색 반바지가 보이자마자 나는 성빈이에게 냅다 뛰었다.

다시 말해봐!”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달려와? 숨 좀 쉬지? 너 운동부족이다.”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

앉자. 네가 이렇게 달려왔다는 의미는 너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는 거 아냐?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100퍼센트 믿지 못하는 게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럼 편안하게 가만히 있냐?”

그럴 리 없다! 싶으면 믿는 거지 뭐.”

뭐야 말장난했다 이거야?”

성빈이와 이렇게 감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건 처음이었다.

아니야. 내가 봤고. 독서 모임 나가본 애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사람인데 너만 모르더라.”

1년이라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에 대해 내가 이렇게 모를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친구랑 6개월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야. 그 사람은 나 기억 못 하는 것 같더라. 하긴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연애하기 바쁜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까지 기억하기가 뭐 쉽겠어? 6개월이래. 그 뒤로 연락 뜸하게 하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잠수 타고 바이바이. 1년이랬지. 연락 뜸하고 덜 만난 거 언제부터인지 잘 따져봐.”     

정확했다. 6개월.

 

그렇게 대화도 잘 통하고 매일 일 끝나고 5분이라도 얼굴 보려고 연락하던 사람이 6개월 정도가 되자 일이 많다고, 출장이라고, 급하게 호출이라고, 교정 작업이 잘못됐다고 일에 파묻혀 지냈다. 정말 일 때문인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정인아 내가 트라우마 같은 게 있거든. 우리 아빠가 엄마 두고 다른 사람 만났을 때 그 표정이나 역겨운 행동 같은 것그런 게 너무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있어. 그래서 비슷한 종자들을 잘 발견해. 이것도 전문적으로 인정받을 능력인가? 그럼 바로 취업인데 크크.”

성하선배랑 정인이 헤어졌대.”

나는 한참 벗어난 이야기를 꺼냈고 성빈이는 당연한 듯 대답했다.

당연히 헤어지겠지. 나랑 형한테 결혼은 무덤이야.”

무덤.

방금 성빈이는 무덤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에게는 꿈이 누군가에게는 무덤일 수 있는 거였다.

“학창 시절을 지옥 같은 결혼 굴레 관찰하면서 보낸 형벌이라고 생각해. 그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가장 큰 잘못이지만 아무 잘못 없이 노출된 우리들은방법이 없는 거지. 이런 거 다 되물림이래. 책 찾아보니 그렇더라? 누군가에게 나도 상처 주게 될까 봐 두려워. 혹시나 아빠 유전자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감정 꿈틀거리게 될까 봐. 그럼 내 옆 사람 인생 조지고, 가족 인생 조지고, 똑같이 되는 거지. 형도 나랑 아마 똑같이 생각할걸. 이런 게 트라우마 인가. 맞지?”     

무조건 20대에 결혼을 해야 출산을 할 때 무리가 없고, 나와 아빠를 보더라도 애를 일찍 낳아야 네가 몸이 덜 상하고.라는 말을 숱하게 들으며 자라난 정인이.

아내 눈물을 짓밟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이라고 지껄이면서 자유를 만끽하던 누군가의 모습에서 분노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자라난 성빈이와 성하.

무조건 안정적인 게 최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비슷하게 살아 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나.

우리들의 공통점은 무의식적으로 노출된 환경에서 알게 모르게 자리 잡은 ‘이념’ 같은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꽤나 피곤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념의 강도는 생각보다 강하고 세서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조류 같았다.  

어떻게 하지 이제?”

“네가 결정하는 거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알려 준거야. 더 늦기 전에

“…. 고맙다.”

더 알아보고 파헤쳐보고 추궁하는 단계를 건너뛰기하고 지금 필요한 단어는 고맙다이거였다.

전화해 보고 네가 솔직히 말해봐. 네가 알고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그렇게 하고. 나는 궁금한 거 물어보는 게 두려웠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뭘 그렇게 참을 일이었나 싶은 것들도 있더라고. 그냥 대놓고 물어볼걸. 이런 것들.

잘 해결해 봐 넌 지혜로우니까. 하지만 이잖아!!”

그날 역시 저녁에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바쁜 그를 배려한답시고 전화를 걸지 않았었지만… 단축키를 꾹 눌렀다 그날은.      

몇 번의 신호음이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았고. 주변은 시끄러웠고. 그는 회식 중이라고 말을 했고. 지금 전화통화하기 어렵다고 말을 했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비슷한 맥락을 6개월 동안 발견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사회생활 하다 보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많아.”였다. 

나는 나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한 어른 같은 그의 말이 더 분위기 있고 멋져 보였고 그래서 그 뒤에 있는 진실은 보려고 하지조차 않았을지 모른다. 일명 콩깍지.

그에게 반한 시간 이후부터의 내 삶의 공기는 확실히 달랐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의지 같은 게 쉽게도 생겨났다.

잘하던 포기도 쉽게 하지 않고, 낙담하며 쉽게 고꾸라지는 일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반하면 이상한 힘이 생겼다. 사랑을 할 때마다 생기는 그 마음의 힘은 어쩌면 믿음이나 의지, 또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생기는 에너지였다.

그 힘은 이성 간의 관계에만 한정적이지 않았다. 포괄적인 관계, 누군가의 인생에 반하는 순간 우리는 에너지를 부여받게 되는 법이니까.

온몸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늘 다정했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고, 어떠한 주제로 말을 이어가며 마음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는 그였다.

김순례 엄마책방에 간 뒤 미안해라는 쪽지를 보고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물을 흘릴 때 모든 사람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라고 위로해 줬다. 

그 나름의 이유라는 단어에 순례 씨의 주름진 얼굴을 다시 떠올렸고 맞아.. 그렇지.. 차분해질 수 있었다.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성하선배도, 순례 씨도, 그도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마음으로 내 곁에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나를 자꾸 작아지게 했다.

더 의심하고 더 누군가의 관계에 방어벽을 칠까 봐 두려웠다.

사실 벌써 그렇게 되고 있었지만..     

헤어짐은 예상보다 너무 간단했다. 추궁했고, 인정했고, 사과했고. 그다음은 할 말이 없었다. 소설 속 반전을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만개했던 꽃 봉오리는 한 계절이 지나가자 가차 없이 떨어졌고 그는 새로운 꽃을 찾아 꿀벌처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가 배운 인생은 그거였겠지.  

정인이와 나는 그를 발정 난 꿀벌새끼라고 불렀다. 성빈이는 그 이름 진짜 찰떡이라고 말했고 잊어라 지나간 건.이라고 어른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자기야. 애기야 라는 호칭은 사라졌다. 우리는 온전한 정인과. . 성빈과. 성하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정인과 나는 그 뒤로 연애를 쉽게 하지 못했다. 정인은 연애하다 결혼 못할까 봐 내심 걱정하며 커피를 빨아댔고 나는 연애하다 또 연애하는 짓 발견하게 될까 봐 방어하며 커피를 빨았다.

연애라는 화두가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취업이라는 화두에 집중됐고 우리는 각자의 취업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같이 하는 것들은 천재 아니면 머저리 일거라고 자위했다.

나는 전공과도 무관한 작은 회사에 일단취업을 했다. 정인이도 전공과 무관한 회사에 들어가서 마케팅 업무를 맡게 됐다.

전공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들이었어.라고 우리들은 말했고 인생의 긴 시간을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전공 하나로 그걸 연결시키는 연계성은 도박과 다름없다고 결론 내렸다.

아무리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대부분 나같이 안정적으로, 다 그렇게 하듯이란 말을 들으며 커온 사람들은 전공이 곧 직업과 연결되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을 테니까.

전공무관한 일로 몇 년 일을 하다 보니 전공 무관한 도 써보고 싶어 졌다.

책 읽고 글 쓰는 건 평소에도 즐겨하는 일이지만 이걸로도 인정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나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공모전을 검색했고 마감일을 책상 달력에 체크했다. 회사근무 외 시간, 회식에서 빠진 날, 생리통이 심해 점심식사를 거른 날 등 틈새 시간을 활용해 글을 썼고 처음으로 쓴 소설로 공모전에서 상금을 받았다.

내가 처음 받은 상금은 500만 원. 월급보다 많은 돈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 정답인 길은 없다는 걸.      

회사에 사표를 쓰기로 결심한 날 나는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5명의 무리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너 여기서 나가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들은 목에 사원증을 달랑거리고 있었고 그들은 다 같이 커피를 먹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대화라는 것은 허영이다뒤라스의 문장이 떠올랐고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지각변동은 두렵지만 그 위험과 모험 덕분에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도,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나 하지만은 생각보다 모험심이 가득한, 생각보다 용기 있는 돌아이라는 것을 27살 가을에 알아버렸다.

정인이는 28살 봄, 떨어졌던 꽃들이 다시 만개하고 벌들이 꽃가루를 옮기는 그 계절에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연애를 못해봐서 감각 다 잃었다고는 나에게 말했지만 연애는 감각보다는 본능에 충실하는 과정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정인이는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며 일하고 있었고 한 달 만에 나와 만난 날에는 청첩장을 주었다.

성빈이는 독일생활 괜찮나? 나중에 ZOOM으로 한번 얼굴 봐. 매일 ZOOM으로 한국 교수님이랑 회의한대. 같이 만나면 좋은데 아쉽다. 이럴 때는 너무 먼 거리도 슬퍼.”

성빈이에게는 희망이지 뭐. 진짜 큰 결심한 거잖아.”

“그렇지. 독일에서 자리 잘 잡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할 거야 걘

그나저나 너 연애한다고 말 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건 알지?”

응 알아. 그 사람도 나랑 비슷해. 직장동료야 안지는 꽤 됐고. 그렇게 됐어.”

운명이다.”

사랑은 타이밍이야.”

타이밍 안 맞았으면 28살에 결혼 안 했을까?”

안 하는 거 말고 못했겠지?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결혼에? 생각해 보면 주변에서 다 그러라고 하니까 당연히 그래야 되나 보다.. 하면서 큰 것 같아. 대학은 가야 한다.. 취업은 해야 한다.. 결혼은 이때쯤이 좋고 애는 이때쯤 낳는 게 좋고.. 그런데 나 그렇게 휘둘리는 게 차라리 속 편하더라.

내가 뭔가 결정하려고 하니까 무섭더라고. 아직 뇌가 철이 덜 들었어 난. “

원래 휘둘리는 게 더 속 편한 법이다. 결정이라는 것에는 책임이라는 비중이 더 커지는 거니까.

정인이는 28살이라는 숫자보다 그냥 처음으로 이 사람이면 되겠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게 콩깍지이든 아니든 정인이가 느낀 그 고운 감정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날 성하선배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인이가 성하선배를 만나 청첩장을 전해줬을 리도 없다… 고 생각하다가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하고 고개를 저었다.

올 일이 있었나 보지.’

결혼식 후 신랑신부 뒤에서 사진을 찍는 성하 선배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성하 선배는 신랑 측 지인으로 이 자리에 왔고, 본인은 나보다 더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며,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일부러 환하게 웃고 있다는 상황이.

관계가 마침표 찍힌 사람이 또 다른 연결고리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는 건 당사자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진 속 그와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겠지.

혹은 헛소리,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거나..     


7. 우리 사이의 거리     


순례 씨에게 연락이 온 건 학교를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나서도 한참 더 지난 어느 여름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집 앞 작은 커피숍은 글이 잘 써지는 애정의 공간이었다.

손님도 많이 없었고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어둡고 칙칙하지는 않았고 사장님은 묵뚝뚝했다. 작은 커피숍에서 중요한 것은 커피 맛보다는 사장님의 무관심한 성향이다.

나는 그 묵뚝뚝함이 손님에 대한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택시를 탈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곤 했다.

우산이 없어서 급하게 택시를 잡아탄 날 쫄딱 젖은 나에게 택시기사는 얼마나 많은 질문들을 쏟아댔던가.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적막이 흐르자마자 정치를 논하고, 가족 이야기를 논하고, 식사를 논하고, 요새 젊은이들을 논하는 택시기사는 정말이지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다.

커피 맛이 좋다는 곳이다, 여기가 글이 잘 써지는 곳이다 소개받아 가더라도 쓸데없는 질문으로 사생활을 애매하게 침범하는 사장을 만나면 바로 그 뒤로 절대 방문하지 않곤 했다.

나비 커피라는 담백한 간판에는 직접 그린 듯한 작은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고

커피 종류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너무 화려하지 않은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고, 다양해서 고르다가 혼이 빠질 것 같이 만들지 않는 심플함도 마음에 들었다.

스무디가 먹고 싶은 날에도 주문할 수 없는 곳,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그곳은 주변 사람들에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나만 알고 싶은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한참 노트북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순례 씨.

너무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도대체 내가 순례 씨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몇 번의 전화를 했었던가. 문자를 보낸 게 몇 백 통이었던가.

이제는 재개발로 허물어진 공간을 일부러 찾아가 순례 씨가 남긴 흔적이 또 있는 건 아닌지 얼마나 찾고 허무해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전화를 한 이유는?  고민을 하다가 전화를 받지 못하고 부재중 전화 그림이 떴다. 다시 진동이 울리고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다 좋으니 죽음을 알리는 연락만은 아니길.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내가 알던 순례 씨 목소리가 아니라 나는 다시 한번 전화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누구세요?”

하지만 씨죠? 안녕하세요. 저희 엄마 이름이 ‘김’’순’ 자’례’ 자 되세요. 저는 딸이고요.”

아 민영 씨예요? 안녕하세요.”

어디서 밀려온 반가움인지 나는 엊그제 만났던 선배 대하듯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했다.

지만 씨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전달할 게 있는데.. 얼굴을 한 번 뵙고 말씀 나누고 싶어서요. 시간은 편하실 때 알려주세요. 지금도 괜찮고요.”

“……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 시간 조금만 내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사실 평일에도 늘 한가한 나이지만 오늘은 금요일이고 돌발적인 만남이 어울리는 날이기도 했다. 금요일이니까.

“음.. 그럼. 그렇게 하죠. 지금 제가 일이 없어서 밖에 나와 있는데..”

아 그럼 지금 잠깐 뵐게요.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아.. 아니에요.. 지금 제가 주소 보내드릴게요. 지금 커피숍에 있는데 괜찮으시면 여기서 만나죠.”

. 지금 그리로 갈게요. 차로 가니까 한30분이면 도착하겠네요. 근처에서 다시 전화드릴 게요.”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례 씨와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이었나. 아니 딸이 나에게 전할 게 뭐라는 거지? 이곳까지 온다고? 내가 너무 위치를 쉽게 말했나. 만날 이유가….. 이유가 있나?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정신없게 만들어 쓰고 있는 글의 꼭지는 완성할 수도 없었다.  

주차공간이 없다고 말을 해야 했었나.

민영 씨가 궁금했다. 그녀의 얼굴도, 그리고 나를 만나는 이유도.

순례 씨에게 들었던 민영 씨는 당참 그 자체였다. 너무 당차다 못해 가끔 부러지기도 하는 사람.

내 앞에 서 있는 민영 씨는 선한 눈망울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 파마기가 거의 풀린 머리를 묶지 않았는데 중간중간 흰머리 가닥이 햇빛에 반짝였다. 체구보다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가방 때문인가 민영 씨의 몸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사장님에게 다시 커피를 주문하고 내가 늘 앉는 지정석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오늘 나누는 대화가 훗날 나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순례 씨에게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 그랬어요? 엄마가 지만 씨를 많이 좋아했어요.”

어떻게.. 엄마는 잘 만난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잘 모르지만 딸 기다리는 중 이라고는 늘 말씀하셔서..”

. 몸이 안 좋아졌는데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드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엄마 더라고요. 수소문해서 생각보다 쉽게 찾았아요. 엄마 많이 늙어 있더라고.. 요.. 지만 씨 얘기 많이 하셨어요.”

“아.. 네..”

병원에는 죽어도 안 간다는 딸 끌고 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시키고, 병간호하고.. 저는 엄마가 아프다는 생각은 해보질 않았어요. 너무 씩씩해서.. 저 퇴원하던 날 엄마가 병원 1층에서 쓰러졌어요. 뇌종양이라고..”

뇌종양이요?!”

얘기를 하다가 순간 멍해진다며 마무리 짓지 못할 때나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잘 안 보인다는 말을 할 때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가끔 그랬으니까. 수술에 방사선치료까지 받은 순례 씨는 암이 온몸으로 전이됐고, 시력과 청력모두 떨어졌다고 했다.

얼마 전 민영 씨는 엄마에게 종이뭉치를 건네받았는데 짧은 쪽지부터 꽤 긴 장문의 글까지 종이도 글의 길이도 펜의 종류도 다양한 종이들이었다. 종이에는 온통 미안함 투성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한 미안함, 건강하게 몸 챙기지 못한 미안함, 밥 한 끼 제대로 못 해먹인 것에 대한 미안함, 연락을 받지 못한 미안함 등등..

그 미안함이 가득한 종이뭉치를 건네받은 민영 씨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겠지만 나로서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짐이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상대방의 마음이 편해지면 누군가의 마음은 더 무거워지기도 한다. 시소처럼.

몰랐다면 살아가며 약간의 원망과 궁금함이 다였겠지만 상황을 알아버린 이상 내 마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순례 씨 얼굴-을 봐야만 했다.

얼굴 보면 서로 마음 힘들 것 같으니 종이뭉치로 미안하고 그리운 마음 대신하고 싶다고 전해 달라하셨어요.. 엄마 마음 힘들지 않게 곁에서 힘써 주셔서 감사하단 말 저도 하고 싶었고요.”

순례 씨의 마음을 위해 힘쓴 시간은 아니었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힘쓴 것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일방적으로 다가오고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그들의 방식에 잠시 혼란스럽던 나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는 것으로만 대답을 대신했다.

저는 중간전달자로 전해드리러 온 거니까 지만 씨가 종이는 알아서 처리하셔도 돼요. 내용도 저는 몰라서 고민하다가 이렇게 결국 연락하게 됐네요.”

“네… 제가 종이는 가지고 갈게요.”

평생 작은 책방 하나 가지는 게 소원이었대요. 저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랬나.. 제가 책방 한다고 했을 때 박수를 치면서 그리 좋아하셨거든요. 철없이 사라지고 나서.. 내심 그 책방은 엄마가 잘 지켜주고 있겠다 싶었나 봐요. 고마워요.”

저도 좋은 공간 발견해서 좋았던 걸요..”

투박하고, 책방이라고 하기 에는 다소 어려운 분위기였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거니 생각하다 보니 결론은 순례 씨의 뇌종양으로 귀결됐다.

시력저하. 청각저하. 두서없던 말들. 주문을 넣어야 한다고 하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작은 시집을 만지작거리던 모습..

그 공간은 아마 순례 씨가 아프기 전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데 왜 못 하는 거야 다들!’

삶이 팍팍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상한 말들은 핑계에 불과하다.

꿈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다면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봤어야 하는 게 맞다고 난 여전히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늘 가족과 부딪히고 친구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나 하지만은 그런 선택이 나의 인생을 위한 존중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이 말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참 이상하다. 마음을 온전히 터놓았다고 해서 가까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끈끈해 는 것도 아니다.  

결국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 보호색처럼 이렇게 저렇게 변해가게 되는데 순례 씨의 그런 마음들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했고 딱히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했다.

관계의 거리를 가늠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복 받았다고들 말하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는 살 수 없다고 입을 모으는 세상에서 뚜벅뚜벅 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아가는 사람은 최전방을 향해 겁 없이 걸어가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상처와 흉터가 남더라도 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겠 노라고 문득 다짐을 하게 된 그런 날이었다.  

민영 씨와 인사를 한 뒤 나는 메모지 아래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병원이름, 순례 씨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을 작은 글씨의 이름을 눈으로 캡처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 달려갈지도 모르니.       


8. 최악의 상황     


취업준비를 할 때도 힘들기는 했지만 최악의 상황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얼마 남지 않은 잔고의 통장을 마음에 품고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아.. 돈의 노예 하지만.

글을 써야 행복했는데 돈 없이 글만 쓰니 불안했다. 주변 사람들은 사설이나, 칼럼 같은 쪽을 노려보라고 조언했다.

그것도 계약으로 딸 수 있다고. 1년 정도 칼럼 쓰면서 인지도 높이고 글쓰기도 연습하면 좋지 않냐고.

돈을 벌고 글도 쓸 수 있었지만 내가 추구하는 글이 아니라는 말로 단칼에 거절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은 이랬다. 우선 돈을 벌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벌 구실이 있어야 글도 쓰는 것이라는 것. 매일 처박혀서 글을 써 봤자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은 그냥 취미생활일 뿐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지만 이 악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180도 완전히 뒤집어 나만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싶었다.

글을 쓰다 보면 그 글의 가치를 누군가 분명 알아줄 거라고. 그 글을 공감해 줄 나의 결이 같은 누군가를 분명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연결고리가 생기고 돈까지도 연결될 수 있는 것, 이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이다. 아직 나는 33! (만으로 31) 젊고. 필력은 살아 숨 쉬고 있고(다고 믿고)! 에너지는 충만하며! 글을 쓰고 싶다. 이 조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보여주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바라만 봐도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통장 잔고와  마주치면 숨고 싶게 만드는 부모님의 근심 가득한 눈빛은 나를 늘 최악의 상황에 놓인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름의 호의라는 것을 거절하게 될 때 돌아오는 건 콧방귀였다.

한 발 더 나간 사람들은 뭘 믿고 그래?” 뼈 있는 말을 쏘아 대기도 했다.

나는 대화가 끝날 때 즈음 입술 근육을 풀어 댄다.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최대한 입을 벌리지 않으면서 말하면 복화술과 대화의 중간정도가 되는데, 느낌은 전달하되 의사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꽤나 애매한 상황인데 이럴 때 사용한다.

뭘 믿긴 뭘 믿어 날 믿지.”

? 뭐라고?”

아니야~”

정확히 뭔 소리인가 모르겠지만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게끔 만들고 자리를 일어나 버리는 것,

이것도 이런 뼈 있는 말을 하도 듣다 보니 생긴 나만의 소심한 복수 방법이다.

괜찮다는 사람 인생 자기들 판단대로 재단해 불쌍하게 만들어버리고 거절하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결정이라는 듯 말하는 그들을 나는 경멸한다. 남들 인생 뭐라 하는 사람치고 자기 인생 잘 돌보는 사람 없다는 할머니 말을 빌려와서 소리치고 싶다.

경진아 네가 쓴 칼럼에 댓글 읽어 봤니? 읽지 마라.. 그런 글 써서 명품사서 매고 다니면 행복하니.’

주희야 난 대기업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안 가져. 너 다 가져. 난 매일 야근하고 팀장 눈치 보고 평가시즌에 두통약 먹는 네가 진심 불쌍하다고.’

다들 자기들 인생이 나보다는낫다고 결론 내리고 해 대는 말들이었다. 나의 행동을 누군가는 자격지심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백수 생활 오래되면 찾아오는 정신병의 일종이라고도 했다.

어릴 때도 고집이 세더니 커서도 저 지랄이라고 뭔 말만 하면 투구리고 있는 닭 마냥 저렇다고 고모는 대놓고 말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너 그렇게 살면 아빠 엄마는 어떻게 하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내 인생은 이거다! 하는 평가를 내릴 자격은 본인한 명뿐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담담한 척 연기는 그만하기로 했다.   

그냥 못 들은 척은 죽어도 안 되더라.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리지.

대학 선배 수정언니는 신문사 칼럼 한 꼭지를 맡아 6개월 정도 글을 썼었다.

언니의 첫 번째 직업은 영화 평론가, 두 번째 직업은 칼럼니스트, 세 번째 직업은 강사, 네 번째 직업은 작가였다. 언니 이름으로 낸 책이 4권이나 있는데 모두 직접 사서 사인을 받아 읽었다.

여자의 인권이나 여자의 삶을 위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시대와 맞물려 두터운 팬 층도 있었고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주인공이 돼 공격당하기도 했고.

난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언니가, 오지게도 많은 직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언니가 늘 대단해 보였다.

언니는 싫다! 싶으면 NO! 를 과감하게 외칠 수 있는 내 주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마냥 좋았다.

언니와 전화통화를 하게 되는 날이면 언제나 그래! 힘내 보자! 하지만”이라는 마음이 동하면서도 한편으로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수정언니가 말하는 포인트는 이 거다.

하지만! 졸지 말고 일단 해봐.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 가 힘든 나에게 언니의 말들은 막 따서 마시는 사이다 같았고 그래서 종종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곤 했다.

아니다 싶은 건 하지 마. 하고 싶은 거 하기에도 시간 없는 세상이다 지만아.

하려고 했을 때 털이 하나라도 서야 설레는 거야. 명심해. !”

웃고 넘겼지만 정말 그랬다. 털은 진짜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거나 이거다, 저거다 고민이 될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나의 닭살들과 털이었으니까.

그를 만나던 순간 그랬고, 공모전을 준비하기 전에 그랬고, 회사 사표를 고민할 때 그랬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상상의 이미지들을 글로 풀어내는 과정이 그랬고, 독일에 있는 성빈이 에게 독일 풍경 사진이 올 때 그랬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독일 풍경에 온몸의 털이 서는 이유는 아직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내가 저런 느낌의 분위기를 좋아하나 보지.’

앉아만 있다가 장이고 뭐고 다 썩어 문드러지겠다는 엄마는 내 책상 위에 유산균 한 통을 올려놓았고

빈속에 먹어야 효과가 좋다는 소리를 오늘도 깜빡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손바닥에 괜히 유산균 한 봉을 따서 쏟아부었다. 

부드럽게 잘 만들었네. 몽글다.”

유산균 뒷면 제조 회사를 보니 얼마 전 주희가 주식 엄청나게 올랐다고 호들갑을 떨던 그 회사다.

에이 다 내다 버려?’

어디든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은.

몽글거리는 유산균 가루를 보면서 나는 이 가루는 나랑은 결이 다르네 생각했다.

글과 연결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나의 삐딱함을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을 찾다 보니

휴대폰에서 오늘도 수정언니 카톡 프로필을 한번 보고, 독일 시차를 확인하고..

오늘은 정신이 나갔는지 6개월 나를 우롱하고 다른 곳으로 쿨 하게 떠나버린 와 처음 술을 마셨던 고깃집을 검색해 봤다.  

여기 고기가 맛있었는데

누가 옆에서 물어보기라도 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유는 나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합리화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미쳤다.           


9. 나비와 나방의 차이     


취업기간까지 맞물려 엄청난 시간을 함께 보낸 대학동기들 중 3명은 마음이 잘 맞아 주기적으로 모임으로 만나고 있다.

결혼한 친구 2, 비혼 주의자 1, 연애고 사랑이고 할 여력이 없는 나까지 다양한 삶을 살고 있었다.

결혼한 친구는 시작은 부정어로 시작해 마무리는 그래도 좋아라는 긍정어로 마무리하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고 비혼 주의자는 독립성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로 시작해 늘 마무리는 왜 굳이 신경 쓰면서 피곤하게 살아? 나는 그냥 완전한 개인주의자로 살란다!’라고 끝나곤 했다.

대화를 할 때마다 독립성이라는 말은 개인주의와 동일어 같이 느껴졌는데 나의 독립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방어벽이 세워져야 하고 그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거절,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말을 듣고만 있으면 정인이는 늘 웃으면서 말했다.

소설에 우리 대화 들어가기만 해 봐. 크크

우리처럼 건전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19금 넘는 얘기가 없냐 우리는?”

조용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했던가? 다들 가식 떨고 있는 거 아냐? 흐흐”

이번 생은 글렀고, 다음생에서는 문란하게도 한 번 살아봐야지. 겁나 질펀하게.”

말은~ 지금도 늦지 않았어 비혼주의자!! 고고!! 지만이 고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글렀다 이것들아. 성욕도 메말라간다..’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오랜만에 만난 정인이는 오동통한 살들이 내려서 그런지 뭔가 더 정돈된 느낌이었다. 더 우아했고,  예뻐졌다.

지만아 요새도 글 잘 써져?”

나야 뭐 매일 똑같지. 늘 잘 써지는 것 같아서 그게 문제야.”

결혼하고 육아하며 신세계를 경험 중이라는 둘은 나의 고요한 시간이 가장 부럽다고 떠들어댔고

나는 이럴 때도 괜히 이때도 관계의 거리를 곱씹어보곤 했다.

저들의 칭찬이 진심 어린 칭찬인지, 위로와 격려가 동반된 대화인지..   

소설 속에 연애 경험들이 조금씩 녹여진다는 내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됐다.

너 민수 오빠 랑은 연락 아얘 안 해?”

언제 적 민수 오빠니? 얼굴도 가물 가물 하고만. 지나간 사람은 완전히 잊는 거다 아가들아.”

아 맞다 성빈이도 다음 달에 한국 온다고 하지 않았어?”

응 다음 달에 온다고 하더라. 그때 오랜만에 얼굴 보겠다.”

결혼식에서 성하선배 왔더라는 이야기가 너를 아직 못 잊어서 왔던 것 같다로 와전돼 최악의 대화가 이어지려는 찰나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하나가 왔고.

모든 시선이 내 폰에 집중됐다.

“너.. 연애해?….” 

그였다.

나는 며칠 전 고깃집 검색을 하면서 떠올랐던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렸고 미쳤네 정말.” 말해버렸다.

정인이는 단번에 그 사람이냐고 물어봤고 나는 시간의 텀을 이렇게나 오래 두고 별안간 연락을 취해오는 사람들의 심리를 공부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들 정말 왜 이래? 지 꼴리는 대로만 사나 봐 다들.”

우리 지만이 열받았다 크크 뭔데.”

자세한 이야기는 묻어두자. 흠일수록 묻자. 그게 더 나은 방법이다.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말을 하며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나의 옛 기억들을 다행히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정인이 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과는 별거 중이라는 정인이의 말과 딸 지아의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정인이는 친정에 잠깐 들어와 있다고, 이유는 뭐 뻔하지..라고 말했다.

뻔하지.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정말 뻔하게 이유를 이해해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해. 우선 정리 좀 해보게. 사태파악이 아직도 어려워 지만아 크크

웃음이 나오니. 확실한 거고?”

. 웃어야지 그럼 매일 질질 짜고 있니.”

오랜만에 만난 정인이 살이 내려서 다들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냐, 필라테스 효과가 이 정도냐 난리었는데.. 정인이는 마음고생해서 살이 빠져도 후줄근하지 않고 생기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목욕가방을 들고 생긋 웃어주던 20살 언저리의 정인이가 문득 떠올랐고 정인이는 그런 매력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잘하고 있어. 우리 정인이.”

별거하는 도중에 성하 선배한테 연락 왔었어. 안 받았어. 받고 싶더라 마음이 휑해서 그런가.  받으면 괜히 남편이랑 똑같은 길 가게 될 것 같아서 안 받았어. 나 잘했지!”

확 받아버리지 그랬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냥 확 만나버리지 그랬냐고.

정인이가 말했다.

지만아 너 나비랑 나방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지아 책 읽어주다 보면 내가 곤충박사 되게 생겼다니까.”

예쁘고 징그럽다?”

나비는 날개를 접고 앉고, 나방은 날개를 펴고 앉는대.”

그래? 난 나방에 한 표. 거침없고만!”

나비는 낮에 활동하고 나방은 밤에 활동한대.”

봐바 나방이 내 스타일이야. 낮보다는 밤이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낮보다 밤을 사랑하는 사람이 밤에 나갈 일이 없으니, 밤에 즐길 일이 없으니 성격이 이 모양이 돼 가는 건가  싶었고 늦은 시간 혼자 걷는 산책으로라도 장운동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비는 시각이 발달됐대. 소통하면서 적군도 구분하고, 그런데 나방은 천적도 많아. 어떤 나방은 초음파를 발사해서 천적인 박쥐를 혼동시키기도 한다더라고. 신기하지 않아? 뭔가 애가 아웃사이더 느낌 나지 않아?”  

“…. 갑자기 나비 나방 타령은 왜 해?”

애 책을 읽어주면서 가만히 책 내용을 보는데 나방이면서 나비처럼 살아간 기분이 들더라고.”

왜 답답해? 뛰쳐나가고 싶구나 너? 나와 나와!”

그냥 습관처럼 인생이 만들어진 것 같아서. 우아한 척 편안한 척, 고요한 척.. 나도 나비보다 나방이 좋아.”

넌 나비가 어울려. 예쁘니까 나비 맡아. 내가 징그러운 거는 다 맡아버릴라니까!”

누가 봐도 안정적이던 정인이의 가정은 그들 만의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해결 중 일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방 같은 정인이를 상상하니 쉽게 매치되지 않았다.

어떠한 과정이 정인이를 더 강인하고 저돌적으로 만들어버릴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알던 정인이는 누가 봐도 고운 나비였다.

출판사에 투고한 글 하나는 거절당했다. That’s  ok!

공모전에 두 편의 장편소설을 보냈다.

는 세상에서 제일 유치하고 어이없다는 말 “자니?”라는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고 있니?”라는 문자도 한 통 더 보냈다. 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와의 공간은 추억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떠오르니 갑자기 위경련이 도지는 것 같았다.

정인이는 지아를 돌보며 까맣게 변한 마음을 정리하는 까만 나비.

순례 씨는 병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호랑나비.

곁에서 엄마를 지켜보는 민영 씨는 나방으로 살았다가 나비로 옷을 갈아입은 흰나비.  

운명을 만나 결혼을 결심했다고 단체메시지를 보낸 비혼 주의자 수진이는 결혼을 하고도 나방으로 살아갔음 했다.  

날개를 펴고 앉는 몸통 두툼한 나방의 모습이 오늘은 괜히 강인한 일인시위자처럼 느껴졌다.        


10.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는 말은 사람을 참 안심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이렇게 안위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너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니 안심하라는 거리감 있는 뉘앙스가 마음에 들었다.

성빈이가 한국에 온 건 4년 만이다. 

한국으로 오려고 할 때마다 일이 터졌을 때 우리끼리 독일이 성빈이에게는 운명의 나라인 거라고 잠정결론지었다. 잠금장치 없이 어떤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건 어쩌면 정인이보다도 성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정인이 결혼식 날 성하선배를 봤을 때도 성빈이 얼굴이 떠올랐고,

길을 가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는 키 큰 남자만 봐도 성빈이가 떠올랐다.

맞아, 마음이 넓었어. 성빈이는.’

나의 모든 연애사를 더 속속들이 알고 있고, 나의 연애사에 종지부를 찍게 한 장본인.

성빈이는 나에게 친구보다는 가깝고 연인이라고 하기엔 먼 그런 존재였다.

성빈이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했다.

내가 왔다!!!”

“와…. 이번엔 진짜 왔네. 웰컴!”

여기 왜 이렇게 더워. 한국이 이렇게 습했나?”

난 에어컨 빵빵한 카페에 있어서 습기를 모르겠네? 흐흐

바로 만나도 되겠어? 안 피곤해? 짐도 정리하고 안 바빠?”

응 나 일주일 정도는 시간 꽤 여유로워 작정하고 왔어 이번엔. 알뜰하게 시간을 써야겠어. 아직 진 빠질 나이도 아니고. 걱정 마. 너 지금 시간 된다는 거지? 그쪽으로 갈게 그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나였다.

성빈이는 예전보다 덩치도 좋아지고 분위기도 뭔가 달라져있었다.

“와… 성빈아 너 수염 기른 거야?!”

어때? 괜찮지.”

레서판다 같아.”

레서판다? 그게 뭐야.”

있어 귀여워.”

뽀얀 피부에 가랑가랑한 느낌이 강해 우리 중에 가장 선이 고운 건 성빈이라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었는데 턱수염 하나가 인상을 완전히 다르게 바꿔 놓을 수 있구나.  잘 어울렸다.

너 털 많다?”

나도 처음 알았다. 기르면서. 나름 괜찮아. 너도 길러봐. “

그렇지 않아도 테스토스테론이 더 늘어나고 있어. 너보다 더 잘 자랄지도 몰라.”

크크 여전하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어땠어? 다들 바쁘게 잘 살았겠지 뭐 안 그래? 몇 년 만이지? 세월 이리 빠르다.”

그래도 지만이 너 그대로인데? 안 늙었다? 내가 글 모아 놓으라고 했지?! 궁금해 죽겠는데 절대 안 보내더라?”

한국에 왔으니 실컷 읽고 가라 실컷 읽어

성빈이는 내 소설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늘 보내라고 성화였다.

왜 그렇게 내 글을 읽고 싶냐는 말에는 결국 책으로 나올 텐데 책으로 읽지 않고 날것으로 먼저 읽고 싶다는 말로 사람 마음을 녹여 놓는 친구였다.

결이 따뜻한 사람이라 가능한 배려와 응원의 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보낼 수가 없었다.

혹시나 나의 글을 보고 어떤 격려를 쥐어짜 내서 해야 할까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털보 성빈이가 더 어울렸다. 더 남자다워 보였고, 시간이 흘러 그런지 더 여유로운 인상으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마음이 편안하다는 건 그 아이와 나 둘 중 누군가에게는 복이다.

지만아 와인하나 시킬게. 운전 안 해도 되지 오늘?”

응 그럼.”

어때 독일은 잘 지내니?”

언제 기회 되면 정말 코헴에 데려오고 싶어. 네가 좋아할 분위기야. 유난 떨지 않는 분위기.”

성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살짝 웃으며 코 아래 수염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지가 언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를 알았다고.. 아는 척은.’

와인이 나왔고 성빈이는 와인 잔을 돌려 향을 맡았다. 이 화이트 와인 맛있어 한번 먹어봐. 좀 달달해 독일 와인이.

나는 와인 하면 괴테밖에 떠오르지를 않아.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내가 만약 와인을 고른다면, 그것은 라인 강의 니어슈타인 마을 와인일 것이야!!!” 알아?”

파우스트!!!!!”

!!!! 맞아 맞아.”

“ Riesling, Trocken리슬링 트로켄이거 덜 드라이해서 너도 좋아할 거야. 여름이니까 이게 어울릴 것 같아서 일부러 이거 있는지 확인하고 식당도 왔지!!!”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성빈이는 동네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회사 이야기, 와인이야기를 했고 표정이 참 예뻤다.

독일 가더니 와인박사가 된 거야?”

“와인뿐 이겠니. 술 박사가 됐다. 다음에는 맥주 마시자~~~”

!”

성빈이는 나온 음식을 씹으며 물었다. 언제 소설들 다 읽어볼 수 있냐고.

나는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 내 소설 읽고 벤치마킹이라도 하려고 하냐, 너무 잘 써서 못 보여준다라는 억지스러운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노트북 폴더에 가득한 나의 단편소설, 중편소설, 장편소설들을 성빈이가 독일에 돌아가기 전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생각을 했고, 앞에 있는 와인 한 모금을 입에 넣으니 행복이 밀려왔다.

. 성빈아. 지금 기분 딱 좋아. 완벽하다.”

글로 치면 베스트셀러야?”

아니 스테디셀러 느낌이야. 여운이 오래가. 너무 좋아서.”

이 와인 자주 먹어야겠구나?”

 하지만 정말 몰랐어?”

. 와인?”

아니. 내가 너 좋아한 거.”

?”

고기를 씹으면서 어울리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서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장면이다 싶은 순간이었다.

“네가 날 왜 좋아해?”

좋아하는데 이유 있어?! 하하 내가 너 구해 줬잖아 그놈한테서.”

“.. 아 그.. 그때부터야?”

아니. 그전부터인데. 네가 성하 선배랑 주말에 어디 가~~~~”라고 콧소리 내던 때부터

“컥.. 뭐야. 진짜. 지금 그 말을 전하는 의도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어서. 나 한국 너 때문에 온 거다. 이거 말하려고.”

.. 부담 느끼라고 하는 말 아니야. 한 해 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내 마음 가는 대로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용기 낸 거니까. 이건 온전히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거니까. 너는 너 원하는 방향대로 가면 돼.”

결혼은 무덤이라며

마음은 늘 바뀌어 가는 거니까. 너의 인생에 반했나 보지 내가.”

“인생에.. 반하다? 이거 멋지다..”

누군가의 인생에 반해서 또는 누군가의 인생이 측은해서.. 또는 누군가의 인생을 궁금해하다가 우리는 사랑이라는 방에 갇히게 된다.

서로를 옭아매고 마음을 확인하는 이 피곤한 과정 이면에는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했다.

인생에 반한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게 해주는 에너지를 부여받는 일이다.     

나는 너도 좋았지만 너의 글도 좋았고 그냥 너 괜찮은 애란 거 알고 있었어. 내가 보는 눈이 이렇게 탁월하다.”

그건 인정. 너는 알아보는구나! !!!”

먹자. 맛 괜찮지.”

. 뭐야 와인은 또 왜 이렇게 맛있어.”

우리의 대화는 늘 이랬다. 깊은 물에 빠져서 순간 심장이 멎을 정도로 허우적거리다가 발 밑에 모래더미를 발견하고 살짝 올라가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대화들이었다.

편안했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였지만, 편안해서 더 불편해질 수 있는 대화들을 성빈이는 늘 잘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었다.

형이랑은 어때?”

그럭저럭. 독일 갈 때 엄마랑 성하오빠 같이 왔었지? 난 그때 어머님만 봐서.”

. 그때 인사만 하고 금방 갔지. 그냥 각자 잘 사는 거지 뭐.”

너무 미워하지 마. 생각이 다르다고 미워하다 보면 끝이 없는 것 같아. 그냥 나를 보니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 너는 그러지 말라고.”

이제껏 미워했는데 뭐. 미워할 에너지가 바닥났나 보다 난. 생각 잘 안 나. 그러고 보면 분노도 무뎌지나 봐.”

분노가 아니었었나 보지.”

에이 오랜만에 만나서 다른 얘기 하자. 그러니까 하지만은 나의 어설픈 고백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이거고. 승산 있는데 이거?”

너 능글맞아졌다?”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성하선배도 그렇고, 정인이도 그렇고, 성빈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시간이라는 것은 체형이나 얼굴도 변하게 하지만 마음도 움직이게 한다.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성빈이의 말속에 결국 형만은 미워하지 못했다는 대답이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장을 나왔다고 했는데 성빈이는 꽤나 여유로워 보였고 그렇게 사람을 여유롭게 만드는 회사라면 나는 독일에 가서 취업하겠다고 말했다. 성빈이는 그럼 나야 좋지!라고 말했다.

각자 3잔 정도를 공평하게 나눠 마시니 와인 한 병이 비워졌다.

성빈이와 만날 때마다 난 와인에 조금씩 더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성빈이는 맥주? 소주? 막걸리? 와인? 고량주? 다양한 주류를 선택하기 전에 늘 나의 의사를 물어봤는데 나는 그때마다 와인을 선택했다.

성빈이가 독일로 돌아가도 성빈이와 함께 먹었던 와인을 떠올리고 싶었고, 설명을 들으면서 먹는 와인의 향과 맛도 말 그대로 끝내줬다. 나로서는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성빈이는 오늘은 피노누아 먹자, 오늘은 시라 먹어보자, 오늘은 까베르네 쇼비뇽 먹자라고 말을 했는데 모두 포도 품종이라는 것을 먹으면서 알게 됐다.

언젠가 저녁을 먹고 가볍게 한 잔 하자고 간 와인 바에서 함께 먹은 메를로를 먹을 때는 지금처럼 편안한 게 가볍게 마시기 좋은와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괜히 더 긴장이 돼 버리는 나는 나랑은 지금 어울리지 않는 와인인가생각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다른 길로 새서는 잠깐 퀴즈!라고 내 혼을 쏙 빼놓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었다.

여기서 잠깐 퀴즈! ‘시라의 이름은 ****의 도시 명에서 유래되었다. 어디었지? 기억나?”

이란! 페르시아! “

“올… 하지만. 너 나랑 대화할 때 엄청 경청하고 있구나? 갑자기 고마운데..”

기억력이 끝내주지 내가.”

첫날 성빈이와 먹었던 리슬링 와인은 서늘한 곳에서 잘 자라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서늘한 곳에서도 잘 자라 와인으로 만들어진 게 기특해서 자주 마신다고 말했다.

성빈이의 그런 생각이나 감성들이 대화를 즐겁게 만들었다.  

와인 이야기를 하다가 독일 이야기로 흐르고 독일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 이야기로 흐르는 전 세계를 오가는 느낌의 대화는 그 다음날 노트북 타자를 칠 때 더 엔도르핀을 돌게 했다.

너 이거 발음해 봐. 게뷔르츠트라미너

게르마늄트레비?”

하하하하하 게. 뷔. 르. 츠. 트. 라. 미. 너. 네가 독일발음으로 해볼까. ~뷔르츠트라미너

독일 발음은 들숨 날숨이 선명하게 들려서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짧고 강해서 손아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꼭 너 같아 이 와인은

뭔데. 또 이상하게 맥일 생각 하지 말고. “

이 품종은 오랜 시간 햇빛을 받아야 하는 품종인데 일찍 수확한 포도는 신비롭게 향긋하고, 늦게 수확한 것은 강렬해서 또 다른 느낌이 들게 하는 와인이라고 했다.

다양하고 오묘한 매력이 가득한 와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성빈이의 얼굴 대신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성빈아. 너 오늘 한국 온 지 며칠 째지?

“3?”

우리 몇 번 봤는지 알아?”

“음…. 4번.”

와인 때문인가. 이상하다. 나 원래 너 좋아했었나?..”

성빈이는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마음을 덜컥 말해버리고는 다시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창밖을 내다봤다.

수분기 머금은 초저녁 하늘은 주황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져 말 그대로 고운 와인 색 같이 느껴졌다.

하늘이 로제와인이네.”

하하  안 되겠다 하지만. 와인박사 자리 물려줘야지.”

오랜만이라는 말은 사실 그리웠다는 말과 연결되지 않을까.

오랜만이라는 말은 보고 싶었어라는 말과 같은 말 아닐까.

오랜만이라는 말은 너의 존재를 나는 여전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어.라는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도 행복해지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사람은 민수오빠도, 그도, 성하선배도 아니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성빈이었다.

마지막 와인 한 모금은 입에 넣고 넘기지 않았다. 입안에 이미 가득한 와인 향에 마지막 와인의 맛이 덧입혀져 금방이라도 사랑해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 한 모금은 오래도록 입 안에 머물게 내버려 두었다.

  

11. 그냥 울어버려     


정인이에게 전화가 왔다. 옆에서 엄마를 찾는 지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지아 많이 컸지. 영상통화로 돌릴까?”

아니야. 영상통화 하면 못 끊는다.”

정인이가 밝은 척하는 게 느껴졌다.

지만아 우리 몇 살이지?”

“ 34, 만으로 32. 겁나 젊어.”

젊은 거 맞지?”

당연하지. 내가 만 나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정도 여분의 철없음은 안고 살아가도 된다는 걸 스스로 계속 상기시켜 주는 거야. 나이 드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여전히 실수할 수 있다고.”

“ 60되도 이럴 거야?”

당연하지 만 58살이면 아직도 50대인데 100세 시대라고 하는 지금 50대면 캣아가지. 뭐 쫄 거 있어? 실수하고 다시 일어서고 깨닫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너 요새 뭐 좋은 일 있니? 아주 에너지가 넘치는데? 그 에너지 나한테 조금만 넘겨봐.”

나 지아 책 샀어. 시간 될 때 말해 내가 집으로 가도 되니까. 책 주고 지아 얼굴도 봐야지.”

지금 와 그럼.”

그래. 간다. 먹고 싶은 거 남겨놔.”

돈도 못 버는 게

잔고 아직 있거든요?”

나는 지아가 읽으면 좋을만한 책 3권과, 정인이가 좋아하는 족발을 들고 달려갔다.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많다는 사실을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은 많은데 마음이 조급했다면 정말이지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잘 되겠지.’, ‘졸지 마’, ‘괜찮아 잘 가고 있어.’라는 무언의 상기들이 나를 조급함에 익사당하지 않도록 조절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정인이가 조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다.

34살에 차도 있고,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고, 직장도 있는 정인이는 나보다 더 34살 같은 34살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내가 너 참 많이 부러워했었다고도 말해주고 싶었다.

나와 다른 네가 그렇게나 대단해 보였다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고.

문득 20살 언저리가 떠올랐고 왠지 눈물이 고였다.

정인이는 아이보리 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차분한 정인이를 더 차분하게 만들어버리는 색감 같았다.

지아는 엄마가 잠깐 데리고 나가 셨어.”

응 그랬구나. 어머님도 여전하시지?”

미안하대. 너무 결혼결혼 하면서 키웠다고.”

무조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으면 선택이 어려워진다. ‘무조건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 무조건을 따르기 쉬워진다. 이게 무조건의 오류다.

정인이의 엄마는 무조건이라는 말을 20대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 늘 붙였고, 정인이는 그 무조건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처럼 지랄 맞게 톡 쏘아붙이거나 일탈이라는 걸 해볼 생각도 못했을 아이, 이정인.

정인이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딸과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주지 않은 것은 부모님에게 후회로 남아있을 터였다.

엄마가 울더라. 자기 때문이라고.”

무슨

아니라고 했지. 갑자기 딸이 손녀 데리고 이 꼴로 질질 짜고 있으니 엄마도 화나고 속상하고 했겠지.”

야 요새 이혼이 흠이야?! 됐어! 그런 걸로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거야.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요새는 초등학교에서도 배워 그런 거. 졸지 마 이정인.”

안 졸아. 이혼이 엄두가 안 난다. . 그냥 눈감고 살아가려고 하니까 그게 미치겠는 거지. 나 지아 너무 소중해. 내 인생에서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바로 지아야. 신기하지. 지아 인생에 빠져서 내가 버티고 있다니까.”

지아에게 반했구나 우리 정인이가.”

그래 맞네. 그 말이.”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하지 않은 나는 엄밀히 이혼에 대해 언급할 자격 자체가 없었다.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정인아. 너 대학 다닐 때 한참 박지원한테 꽂힌 거 기억나?”

열하일기?”

. 그때 네가 왜 박지원이 좋은지 말한 거 기억나?”

거침없어서 좋다고. 겁도 없이 앞으로 내딛는 게 무모해 보이는데 신기하고 멋있다고. 호곡장론!”

하하. . 울자!!!!”

우리는 족발 봉지를 뜯지도 않은 채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정인이가 웃었다.      

조선을 벗어나 요동 벌판을 처음 본 박지원은

한 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 가히 한바탕 울 만한 곳이야!”라고 말한다. 그 옆에 있던 정진사가 박지원에게 이유를 묻자 박지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단지 칠정 가운데 오직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 뿐 일곱 가지 감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기쁨, 노여움,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도 울음을 자아낸다고. 답답하게 맺힌 감정을 활짝 풀어 버리는 데는 소리 질러 우는 것보다 더 좋은 치료법이 없다고 말이다.

적절한 타이밍이다 지만아.”

! 울어! 이정인. 괜찮으니까 참지 말고 울어.”

정인이는 앙앙 -  우는 척을 하다가 정말 아기처럼 울어버렸고, 나는 엉엉 우는 정인이를 보고 그제야 다행이다 생각했다.

성빈이는 나의 공간에 시간이 들를 때 찾아왔다. 잠깐 근처에 볼일이 있었다고 얘기하고 앉아만 있다 가기도 했고, 2시간 정도 시간이 빈다고 글 쓰는 거 구경이나 하고 간다며 커피 한잔을 2시간 동안 마시기도 했다.

그런 성빈이가 싫지 않아 모른 척 늘 오케이를 했다. 나는 내가 보내는 이 긍정의 시그널이 올바른 건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연암 박지원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면 또 울어재껴라! 말하려나?

막상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건 순례씨인 게 이상했다.

성빈이에게 순례 씨 이야기를 했다. 성빈이는 어깨를 위아래로 살짝 움직이며 작은 파도를 만들었고

“WHY NOT?”이라고 말했다.

생각나는 사람인데 왜 굳이 마음을 닫으려고 애쓰냐고 묻는 말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닫은 건 아니었지만 닫으려 애쓴 건 맞다.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미워하려 애쓴 건 맞다.

후회하지 말고 가서 인사라도 드려. 그게 너 마음 편할걸.”

민영 씨와 만난 날 바로 병원을 가고 싶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픈 순례 씨의 모습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갑자기 사라져 갑자기 연락을 해놓고 갑자기 또 떠나버리면.. 그 후에 내가 느낄 감정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무서웠다는 말이 더 적당할까.

두려움이나 후회나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매한가지라고. 그러니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밀고 나가라고 말했다. 성빈이 다운 말이었다.

나 요새 그런 생각한다. 수능 때까지만 견디자. 대학 가기 전까지만 버텨내자. 이게 사실 무슨 의미였나. 이런 생각.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를 안아 줄 수도, 고민을 들어줄 수도 혹은 물어볼 수도..

엄마의 방패막이될 수 있는 방법도 있었고 엄마가 멀리 벗어나게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묵묵히 견뎌 내다보면 뭐 어떻게 되겠지.. 이런 건 없더라고. 저질러야 해 뭐든 하하.”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메모지 아래 작게 쓰여 있던 그 병원으로 가 민영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영 씨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했고 우리는 같이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영 씨에게 받은 종이뭉치에는 나와 나눴던 소소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내가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었구나.. 뭐 이렇게 까지 자잘하게 기억을 다 하셨대..’

종이뭉치를 읽었을 때도 눈물이 났었던 것 같다. 분명 분노의 눈물이 아닌, 즐거움의 눈물이었다.

누워있는 순례 씨의 마른 몸이 더 말라 있는 걸 보고 대뜸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늙지도 않았네 우리 순례 씨는. 나만 늙었잖아!!”였다. 

 순례 씨는 날 보고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지만아. 보고 싶었어. 미안해.”

미안은 무슨.”

순례 씨와 나의 첫 만남, 그 어색한 공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움과 서글픔이 부유하는 공간에서 순례 씨와 나는 오래도록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도 서로의 삶에 반했던 것일까 문득 생각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위안을 얻었던 것일까.

참 오랜만이었다. 김순례 엄마 책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던 어렴풋한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따뜻한 냄새였다.      

12. 반하다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이김치다 배추김치다 파김치다 총각김치를 만들기에 바빴다.

김치가 아니면 장아찌를 담그는데 깻잎, 마늘종, 고추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작은 항아리까지 조금씩 사는 엄마를 보고 생각했다.

신기하게 일을 늘 만들어하네’

나는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거의 없고, 아빠도 짠 음식은 입에 잘 대지 않는다. 엄마가 그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때마다 수고스럽게 간장을 달이고 재료들을 담그거나 버무리는 모습이 나는 참 이상해 보였다. 아니, 답답해 보였다.

오늘은 짐 들게 많으니 좀 도우라는 말을 듣고 어깨에 메던 가방을 내려놓고 같이 나오는 길이었다.

조금씩 그냥 사 먹자 엄마.”

몸 성할 때 하는 거야 다. 엄마의 손 맛 못 들어 봤어? 글 쓰는 애가.”

엄마의 손.. 들어봤지. 엄마 손 파이도 들어봤고.. 엄마의 손맛.. 이야기는 30년 넘게 들어왔고. 그만 좀 보자고 엄마 손 맛.”

싫어.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 먹잖아. 그게 다 엄마 추억이지.”

고되게 음식을 만들면서 툭툭 불어난 굵은 손가락 관절이 내 눈에 보였고 갑자기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방에서 평생 보내다 죽을 거야 뭐? 손가락이 이게 뭐야 정말.”

엄마는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낸들 이렇게 나이들 줄 알았겠니. 엄마가 이래 봬도 할 수 있는 게 많은 여자였다고.

시간이 지나가니까 할 수 있는 거 말고 해야 하는 걸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엄마는 자부심 가지고 있어 이것도 엄마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엄만.”

엄마 음식 먹고 너도 힘내서 글 쓰고 하면 좋지 뭐. 너 잘 되면 엄마 몫도 있는 거다 거기.”

못살아. 이거 담으면 돼?”

엄마의 손맛으로 재탄생할 재료들을 시장바구니에 하나하나 담으며 엄마를 바라봤다.

나랑 민영 씨랑 나이가 비슷하던데 순례 씨랑 엄마도 비슷하려나?’

무겁네. 이걸 혼자 들고 다녀 엄마? 시장 가면 아줌마들 끌고 다니는 캐리어 있잖아 그거 끌지 왜.”

됐어. 오늘이 좀 무거운 거지 뭐 엄마가 매일 만드니?”

매일 아니었던가. 내가 본 엄마의 모습은 매일이 주방이었는데.

엄마 아빠 바람피운 적 없어?”

낸들 아니? 안 들켰으면 안 핀 걸로 믿고 사는 거지.”

뭐 대답이 그래?”

밖에 나가면 내 남편이 아니다…. 이것도 못 들어봤니 글 쓰는 애가?”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말끝마다 글 쓰는 애가?라는 말을 붙여서 싱긋 웃어주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교묘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 누가 바람 피니? 아빠 바람피우면 알리지 말아라. 모르고 살란다.”

헐…. 그건 아니지.”

믿음이 깨지면 그게 제일 슬픈 거야. 믿어야 사는 거지. 지금까지 그런 일 없었으면 믿는 거고. 의심하면 못 산다 평생.”

그래서 들키지를 말아야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성빈이와 성하선배의 아빠 엄마 얼굴을 상상했다. 우리 아빠엄마 얼굴과 오버랩시키니 순간 온몸에 오돌토돌 닭살이 돋았고 나라면 성빈이 같은 선택을 했을까, 성하선배 같은 선택을 했을까 고민했다.

내 성격상 아마도 성하선배 같은 선택을 했을 텐데 그럼 엄마와 내 사이가 멀어졌을까.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 게 타당한 상황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가족일지라도 생각이 같을 수는 없으니, 선택의 순간에 다르게 행동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여기 임대문의 떨어졌네? 계속 붙어있더니?”

여기는 뭐가 들어오면 망해 나가더라? 신기해 터가 좀 그런가?”

안쪽에서 베이지 톤 블라인드가 슬금슬금 올라갔고 깨끗한 통유리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새끼 강아지들이었다.

아 너무 귀여워.”

임대문의가 오래도록 붙어있던 1층에는 동물병원이 들어왔다. 규모가 꽤 컸다.

화이트 벽면에 모든 벽이 통유리로 돼있었는데 블라인드가 걷히면 작은 칸마다 작은 새끼 강아지들이 통유리를 향해 보이게 해 놨고. 그 귀여움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 작고 털이 고른 강아지는 100만 원이 훌쩍 넘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격은 내려갔다.

“아고.. 귀엽다. 지만아. 꼭 너 어릴 때 같네.”

내가 저렇게 귀여웠어? 나 이상했다며 쭈글쭈글한 원숭이라고 했나. 홍학이라고 했었나.”

새끼들은 다 귀엽지. 아효~ 저 거봐. 가격이 너무 싸다. “

100만 원이나 해?라고 물었던 나는 자기 자식 바라보는 양 새끼강아지들을 보는 엄마를 물끄러미 지켜봤고 엄마의 눈에서 애잔함 같은 감정을 봤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커갈수록 값이 떨어지는 건 슬프다. 하고 말하니 엄마는 그러니까 그게 모순이야.라고 대답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배우고 터득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더 값을 쳐줘야지.

개는 개니까.”

사람도 개지 뭐. 다 똑같지 않니? 생명은 다 매한가지지. 안 들어봤니 그것도 글 쓰는 애가?”

아 정말. 모르는 게 많아서 글 못 쓰겠고만 흐흐

엄마의 세 번째 손가락 마디는 유난히 굵었다. 한번 주먹을 쥐면 잘 펴지지도 않았는데 나는 괜히 의미를 부여해 세상을 향해 날리는 뻐큐!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날리는 가운데 손가락을 우리 엄마는 인내하고 참아내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참 어렵게도 날리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접혔다가 잘 펴지지 않는 중지 손가락이 문득 슬프게 와닿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엄마의 삶 속에 자리 잡은 딸이라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 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집안일은.

내 할 일은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는 것, 연애를 하는 것, 공모전을 준비하고 글을 쓰러 좋은 공간을 향해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 빈 공간에서 누군가는 외로움을 참아내며 책임감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묵묵히 공간을 지켜내는 중이었다.      

정인이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정인이에게는 나보다 큰 의미였을 그 공간을 지켜 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일지 모른다. 순례 씨가 그 책방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딸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음속 작은 꿈같은 것을 구겨 버려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성빈이의 엄마가 그 공간에서 버틴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대다수의 엄마들이 느끼는 무력함과 두려움과 세상을 향해 날릴 수 있는 중지의 힘이 부족해서였을까.

성하선배가 그렇게 결혼에 날 서있던 이유는 어쩌면 회피가 아닌 책임감아니었을까.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제대로 지키는 건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라고, 옭아매지 않는 일뿐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던 것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각자의 인생을 뚜벅뚜벅 잘 걸어가고 있으니 그들은 각자의 인생에 반해 버린 걸로 그렇게 매듭짓고 싶었다.

이제 독일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성빈이는 너무 담담했다.

사람 마음 괜히 심란하게 만들어놓고 독일로 날아가 버리면 그만인 거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부러 티 내지는 않았다. 썸도 아니고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단 친구라고 생각해야 덜 서운하고 덜 기대할 것 같았다.

언제 다시 가지? 독일?”

안가.”

안 가?”

한국 지사 지원해서 그것 때문에 들어온 거야 이번에.”

뭐야 왜 말 안 했어.”

지금 말하려고

와인 같이 마실 수 있겠네.”

좋다!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 고민을 하다 보니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민도 많고, 선택할 것도 많고 뭔가 다 쉬운 게 없나. 싶더라고.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까 그래서 더 스릴 있어.”

스릴이래 ㅎㅎ어울리는 와인은?”

시라지. 시라! 하지만 이거는 진리다. 눈물 흘리고, 화도내고, 서운하고, 막 답답한 마음 드는 거 있지.

그게 다 자기 인생에 대한 애정이야. 난 그렇게 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라 한잔 마시면 딱 행복하겠다 싶었고.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자잘한 행복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소소한 일들에 호들갑을 떨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인생에 ‘반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새로 쓰고 있는 소설 제목과도 꽤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어 성빈이에게 물었다.

인생에 반하다. 어때? 저번에 읽었던 단편소설 제목. 이걸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너에게 반하다.”

마주 봤고, 웃었고, 손을 잡았다.      

33살 하지만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조금 더 성숙해진 사람들이 하는 건강한 사랑이길 바라면서.

하지만의 인생이 꽤 괜찮다고 스스로 반해버리는 날이 더 많아지길 바라면서.

너무 고민하지 말자. 다 각자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내 할 몫만 하면서 잘 살아보자.

생각했다.

성빈이와 손을 잡고 걷는 카페 근처 산책로, 늘 외롭고 처절하게만 느껴졌던 이 산책로가 오늘은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성하선배 용서했어?”

용서고 나발이고.. 내가 좀 철이 들었나? 형은 형답게 행동한 거겠지. 싶어. “

이제 형이라고 한다? ~”

지만이 너는 병원 다녀왔어?”

다녀왔지. 순례 씨 보니까 우리 엄마 얼굴이 괜히 달리 보여. 너무 무심했나 가족한테.”

다녀와서 뭔가 느꼈음 된 거지. 잘했네. 역시 하지만이야.”

 

띵동

메일 알람이 울렸다.

한 개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보내주신 소설 잘 읽어보았습니다. 내용이 너무 참신하고 스토리라인도 탄탄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단편소설집으로 출판하고 싶습니다. 작가님, 연락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저희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역시 하지만. ! 좋다.”

! 좋다. 하지만사랑해.”

하지만.. 내가 더 사랑해.”

하지만. 우리 좀 걸을까. 하하     

살짝 아빠엄마의 미래가 곧 우리일 거라는 생각을 했고,

나는 주방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을 거라는 뜬금없는 다짐을 했으며,

성빈이를 믿을 거라는 결심을 했고,

둘이 오랜 시간 함께할 것 같다는 확신을 했다.

각자의 인생이 아닌 우리들의 인생으로.

서로의 인생에 반했다고 해야 할까, 내 인생에 이제야 반했다고 해야 할까.

모호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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