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남편을 삽니다.


   

#1 


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은 삶을 침범한다. 나의 삶을 거침없이 내보이고 타인의 삶 속에 스며들려 하며 사소한 일상은 공유되어야 한다.(공유하게 만든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품어줄 수 있는 최고의 단어이자 동시에 서로의 삶을 온전히 방해할 수 있는 최악의 단어이기도 한 셈이다. 그래서 난 사랑을 믿지 않는다. 난 사랑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들 꽃다운 나이에 연애가 필수라 말하길래 남자에 관심도 없던 내가 노력도 해봤다.  예를 들면 친구들이 소개해주는 남자들을 만나본다거나, 학교 동아리 조인엠티를 빠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것들, 그것들 역시 나에게는 분명히 애쓰며 노력한 것들이다. 나로서는 ‘나 역시 연애를 시작하기 전, 누구나 거쳐 가는 일상 속 연애예행연습’을 마친 셈이었다.

딸 셋 중 막내인 나는 자매사이의 나이 차이 덕에 다양한 세대의 연애관을 간접 경험하는 특혜를 얻었다. 그 특혜가 나를 연애의 달인 같은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앞선 언니들의 연애관을 직. 간접적으로 지켜보며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고 다양한 놈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이기는 게임’이라고 단정 지었던 것이다. 

언니들의 연애는 연극이었다. 그렇게 독하고 악랄한 언니들의 면모가 사랑스럽게 포장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철저하게 감추면서 연애질을 하는 그 철두철미함이 감탄스러웠다. 집에 들어오면 양말부터 벗어 집어던지고 오른쪽 발로 왼쪽 발등을 벅벅 문지르는 모습을 하면서.. 전화를 할 때 머리를 벅벅 긁고 손톱에 때도 빼면서.. 통화 목소리는 사랑스럽게 내는 그 이중성이 재미있고도 가증스러웠다. 흡사 친구들과 연극 공연을 본 후 느꼈던 기분이 그랬던가. 그래서 난 언니들의 연애를 지켜볼 때마다 늘 무의식적으로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청중이 된 것 같았다. 예매 없이도 볼 수 있는 특권층.  그들의 연기성장을 위해 단골 청중으로서 한마디 훈수를 두려고 하면 언니들은 날 째려보며 한마디 했다. “꺼져.” 바로 이거다! 꺼져!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저 모습이 바로 그녀들의 민낯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민낯을. 

연극, 아니 그녀들의 연애를 지켜보면서 내가 가장 이상했던 것은  큰 언니와  작은언니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복제인간처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작점은 다르지만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면 일정한 과정이 있는 듯 흘러가는 게임처럼.. 내비게이션처럼.. 안내메시지에 따라 움직여지는 복제인간들 같았다. 설렘과 두근거림, 배려와 애정, 잔소리와 집착, 회피와 무관심, 섭섭함과 지겨움의 큰 과정은 누구에게 똑같이 부여된 레벨 테스트일지도 모른다. 한 단계를 성공해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면 누구나 ‘사랑’이라는 거대한 단어에 발목을 잡혀 인생을 송두리째 걸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고지가 보이는 레벨테스트를 박차고 로그아웃 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건 보이지 않는 제로섬게임이다.    

      

#2


“ 선배니 임~~~”

“ 정말욤?”

“ 아잉...”

“ 아 어떡해....”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난 속으로 욕을 했다. 큰언니는 늘 이야기했다. 술만 처먹으면 입에 오빠를 달고 있는 애들이 제일 비어보인 다고. 작은 언니도 나에게 말했었다. 꼭 술 먹으면 달라붙어서 애교 부리고 하는 애들은 사실 얼굴이 다 감자 같다고. 원래 인기 많은 애들은 안 그래도 남자가 꼬이는 법이고 없는 애들이 그 애교 같지도 않은 것들을 술에 빌려 악용하는 거라고.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둘 다 도긴 개긴 이었다. 큰언니는 남자친구에게 평소에는 “야! 야!” 거리다가 술만 들어가면 오빠로 대접해 줬고 오빠소리를 듣는 그 남자도 그게 뭐 그리 좋은 대접이라고 으쓱대면서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 감지도 않는 그 더러운 머리에 가끔 입을 맞추기도 했다. 

작은 언니는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애교 부리는 인간을 씹어대더니만 남자친구에게 소개팅할 때 이야기를 들으니 가관이었다. 남자친구는 언니의 혀가 원래 짧은 줄 알았었단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들인가. 언니들은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 걸까?..’

코 막힌 목소리, 오줌이 마려운 것 같은 몸 베베 꼬기, 말할 때 쓸데없이 혀 날름거리기, 실수하면 괜히 눈 동그랗게 뜨면서 놀란 표정 짓기, 11개월 아기처럼 말하기, 징징거리기..

주변에 널리고 널린 이런 분위기들을 마주할 때 내가 속으로 하는 욕은 아마 큰언니와 작은언니에게 하는 욕일지도 모른다. 말과 행동이 다른 언니, 그래서 막내의 연애에 더 혼란을 야기시킨 언니들, 괜히 억한 심정만 더 쌓이게 만든 못된 언니들 같으니라고!

애교 가득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난 굳건하게 나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한 것뿐이고 그 다짐은 아무도 모른다. 난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그렇기에 내 삶을 공유할 필요도 없고 그렇기에 내 다짐은 완벽한 내 다짐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가. 사랑은 힘은 아픔을 치유할 만큼의 강력하다고들 하지만 내 주변을 보면 사랑으로 아픔을 치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노래가사나 시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홀랑 넘어가지 않았고 소설 속 사랑이 더 와닿았다.

불륜, 버림 당함, 불행, 죽음, 삼각관계.. 온갖 치정.

현실 속에서의 사랑은 적어도 다양한 색이 섞이고 섞여 만들어진 남색 비슷한 것인데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는 왜 분홍빛이 먼저 떠오르는 것인지.. 한 번 더 꼬아서 의심했을 뿐이다. 의심은 어디에나 필요한 법이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고. 다짜고짜 분홍빛에 홀려 사랑에 먼저 빠져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언니, 요새 기영오빠 잘 만나?”

“응 오늘 맛 집 가기로 했어~ 치즈닭갈비 집인데 진짜 맛이 예술이래. 핫 플레이스. 그나저나 지수야, 나 요새 살찐 것 같지 않아? 오늘 치마 입고 가려고 했는데 허벅지 오늘따라 왜 이러니?”

“허벅지로 연애하냐? 뭐 어때 입고 싶음 입는 거지!”

“ 예뻐 보이면 좋잖아. 걔가 나 이런 옷 입을 때 예쁘대.”

“ 참나 옷도 정해주냐. 어이없네. 좀 쪘어! 그렇게 먹는데 안 찌고 베기냐..”

“ 이 씨!! 이게!!!”

“ 아 왜!! 물어봐서 대답해 줬더니 맨날 뭐래!! 맛 집 갈 때 나도 데리고 가, 나 요새 몸보신 해야 할 나이야!!”

“ 웃기고 있네. 언니가 올 때 바나나우유 사 올게 ㅋㅋ”

“아.... 진짜.... 언니... 언니 허벅지는 원래 그랬어.. 원래 언닌 하체비만이야. 잊지 마. 하비.”

“야!!! 김지수!!! 너어!!”

언니는 그날 온몸에 치즈닭갈비 향을 머금고 그 위에 어울리지 않은 달달한 향수 향을 뒤덮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겹겹이 화장한 언니가 클렌징으로 쓰는 시간을 모으고 모으면 1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 언니 내 바나나우유는!!”

“ 가방에 있다 아가야.. 아 배불러.. 배부르면 왜 이렇게 난 짜증 나지”

“ 성격이 이상한 거지 그게 배부르게 다 넣고서 왜 짜증을 낸대? 변태.”

“ 이게 진짜 요새 언니한테 막 기어올라 김지수!”

“ 언니 화장하면 안 귀찮아?”

“ 전혀 안 귀찮던데? 이건 밥을 먹는 것과 매한가지로 숭고한 일이란다 아가야. 

화장을 해야 나다닐 수 있어 언니도 이제 늙어가지고. 넌 아직 여드름만 뽕뽕 난 아가라서 뭘 해도 예쁘지만 언닌 이제 그럴 나이가 지나고 지나서 어쩔 수없이 찍어 바르는 거라고.”

언니는 화장을 잘한다. 동양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신기한 손놀림으로 스모키 메이크업을 멋스럽게 완성한다. 아이섀도 몇 개를 입히고 그 위에 신기술로 덧입히고 하면서 미술학원에서 배우는 음영 넣기를 뚝딱해 내고 심지어 데생 연필로 눈썹을 그리고 나간 적도 있다. 4B연필로 어떻게 눈썹을 그리냐고 어이없어했더니 이게 화장 기술 중 하나라나 뭐라나. 화장하는 언니는 자신감 넘쳐 보였고 내가 봐도 예쁘긴 했다. 소개팅이나 미팅이나 중대사 한 일이 있을 때는 거울 앞에서 1시간은 족히 앉아서 미술놀이를 이어갔고 그런 날은 더 예뻤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거기다 높은 구두를 신고 어울리는 향수를 칙칙 뿌리면 그야말로 언니는 우주최강자신감을 장착한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여자의 패션 마무리는 가방이라는데 휴대폰이나 작은 파우더 정도 들어갈 것 같은 가방보다도 나가기 전 긴 머리를 한번 찰랑 거리고 나가는 순간이 언니의 화룡점정이었다. 긴 머리, 높은 구두, 달콤한 향, 작은 가방, 예쁜 얼굴, 예쁜 얼굴 위 다채로운 화장술.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강력한 에너지를 발휘하는 날 아마 사랑이 시작됐었겠지.


#3


“언니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둘째 언니가 첫째 언니랑 쑥덕거린다. 20대의 연애상담 중인 공간으로 10대인 나는 절대 끼어들 수 없다. 그냥 표정을 살피고 간간이 흘러나오는 대화들로 어림짐작하면서 상상하는 수밖에. 10대도 사랑을 알 수 있는 나이 란걸 저 늙은 언니들은 절대 모를 테지.    

“ 김지수! 너 오늘 미술입시준비하러 가?”

“ 어! 왜?”

“ 오늘 같이 가자. 너네 집 앞으로 시간 맞춰 갈게.”

“ 어, 알겠어..”

상현이가 집으로 가는 나에게 학원을 같이 가자고 말했더니 같은 반 여자애들이 손뼉 치고 난리가 났다. 난 정작 괜찮은데 왜 다른 애들 얼굴이 벌개지고 난리냐고 웃으면서 말했더니 상현이가 날 좋아하는 거란다. 학원을 같이 가자는 말이 좋아하는 거라면 난 너무나도 인기 많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들 중 몇 명이 자기들 먹을 빵을 사서 먹으며 가다 내가 있으면 한쪽을 무심히 주고 지나간다거나, 오늘처럼 학원을 같이 가자고 한다든가, 조장을 뽑거나 학급에 행사가 있을 때 나를 추천해주곤 했지만 난 그런 행동이 좋아하는 감정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내가 생각해도 리더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 아 남자 여자가 왜 중요해 그냥 친군데!”

한마디 한 이후로 인기가 많아졌나...? 내가 말하는 ‘인기가 많다는 건’ 남학생들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 단조로운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것. 그러니까 어른들이 말하는 (언니들이 말하는) 인간 대 인간으로 호감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너무나 이분법적이다. 난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학교가 되길 바랐고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승연애를 한 친구부터 양다리를 걸치는 친구 연하를 만나고 있다는 애들까지 10대들의 연애도 참 다양하다. 친구들이야기를 언니들에게 늘어놓으니 언니들은 둘이 눈을 마주치며 슬쩍 비웃는다. 

" 입시가 코앞인데 연애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나는 괜히 눈을 치켜뜨며 다 늙어 하는 연애보다 연애세포도 젊은게 더 좋지! 한 마디 대들고 둘은 작은 호랑이의 으르렁소리는 가소롭다는듯 다시 그들만의 심오한 연애세계로 빠져들었다. 

뜨거운 연애란 무엇이며 진지한 연애는 무엇인가. 주변 친구들의 연애 이야기와 언니들의 연애 이야기 사이에서 나는 갈길 잃고 유영하는 작은 풍선마냥 초라하게 둥둥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것도 내가 연애를 늦게 한 원인이 되려나. 




#4


사랑을 하면 결국 헤어진다. 사랑을 해서 결혼까지 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다. 사랑이란 단물을 빼고 현실 속에서 무덤덤하게 시간을 이어가거나 또는 한 사람이 완전히 지고 들어가는 게임에 체념하거나. 

큰 언니는 신나게 연애를 했다. 내가 본 예비 형부들이 적어도 5명은 되니까.. 시간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문란한 연애라고는 할 수 없다. 한 사람을 2년 정도 만나며 흡수된다는 것은 실로 존중받아야 할 일이다. 언니의 철칙은 ‘뜨겁게 사랑하고 헤어지면 차갑게 잊자’였는데 이 순간(언니가 차갑게 그놈들을 잊어가던 그 순간)이 언니가 어른같이 느껴지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혼자 안 보이는데 가서 질질 짜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들 앞에서는 더 도도하게 굴었고 더 차갑게 잊는 모습을 보였다. 감정을 숨기느라 그랬었겠지... 

후회 없을 만큼 흠뻑 취했던 시간이기에 이 툭툭 털어내는 행동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언니는 완전하게 취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언니는 뭐 하나에 꽂히면 정신을 못 차리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 얼굴이 변하는 것 같았다. 관계를 만끽했고, 사랑을 만끽했고 시간과 추억과 자잘한 일상들을 만끽했다. 그 속에서 당연히 갈등의 수순을 맞이했었겠지만 언닌 그때도 역시 만끽했다. 

화낼 때는 정말 만끽하며 지랄을 했고, 울 때는 만끽하며 울었고, 속상할 때는 만끽하며 속상함을 표현했고, 잘해주고 내어주는 것도 만끽하며 간 쓸개 다 빼주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를 만났던 그 사람들은 헤어지고 나서도 늘 언니를 잊지 못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제대로 만끽하는 사람에게는 섹시한 기운이 감돈다. 그때는 잘 안 보이지만 헤어지고 그 사람이 안 보이는 순간 더 강하게 회자되고 느껴지는 섹시한 기운. 작정하고 여우 짓을 안 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여우 같은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 그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었다. 차갑게 잊는 걸 반복하는 언니는 뜬금없이 마지막 연애를 1년 마치지도 않고 결혼을 했다. 그 10년이란 시간을 그럼 허튼 놈들에게 낭비한 것일까. 잠시 생각하게 했다.

둘째 언니도 결혼을 했다. 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하는 언니가 등신 같아 보였다. 이제 언니 인생은 저 남자와 단둘이.. 쫑난 것이다. 형부는 착하다. 말없이 착하고 그 말없음을 언니는 사랑했다. 그리고 때론 그 말없음을 답답해한다. 사랑을 모르는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언니와 형부의 연애기간은 8년이다. 8년 동안 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볼꼴 못 볼꼴을 다 봤다. (형부와 언니는 내 눈을 물어내야 한다..) 그렇게 죽자고 싸우고 야심한 밤 나간 언니는 꽃 한 송이 들고 헤헤거리며 들어왔고 헤어지지 말자고 질질 짜는 형부의 얼굴도 자주 봤으며.. 나이 어린 동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안겨주고 결국 결혼을 했다. 언니들은 여전히 사랑하며 잘 산다. 즉 그 말은 서로의 삶들이 뒤섞여있는 혼돈 속에서 지혜롭게 서있다는 뜻이다. 

프랑스 문호 앙드레 모루아는 말했다. “행복한 결혼은 항상 너무 짧은듯한 긴 대화”라고. 조건을 보고 결혼한 사람이 훗날 사랑을 확보해야 하듯 언니와 형부는 연애결혼을 통해 결혼 후 조건을 확보해야 하는 사람들 중 한 쌍이 되었다. 문제는 나다. 나. 

대학 입학 후,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더 애교스러워지는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너무나도 올곧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만 결국 연애를 못했던 것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너무 여자가 잘나도 남자들이 안 좋아해 지수야.”

“너무 부러질 듯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아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니 지수야.”

“넌 꼭 분위기에 물을 끼얹더라?”

엄마는 수시로 나에게 이런 폭력적인 말을 내뱉었고 이건 명백히 성차별이라고 느꼈다. 그럴 때마다 이미 사랑을 경험한 언니들은 내 방패막이되어주었다.

“ 엄마! 연애가 필수야? 지수야, 연애 안 한다고 안 죽어.”

“ 야 시답지 않은 놈 만날 거면 시작을 마. 아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나이가 20개가 넘었는데 이제 어른이지 우리 지수 그렇지?? ㅋㅋ”

인간으로 다가가면 사랑으로 안 보이는 게 함정이었다. 남자로 다가가야 마음이 뭔가 몽글거리든 움직이든 할 텐데 이놈도 저놈도 다 인간스러운 짠한 존재로 와닿으니 이건 뭐 엄마 같은 기분이 들뿐. 누나 같은 기분이 들뿐.. 연애감정이 솟구치지 않는 것이다.    

 

#5 


“..... 너 전공이 철학이라고?”

교양수업을 듣는데 복수전공 수업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있는 것 같이 익숙하게 생겼다) 낯익은 얼굴이 나에게 말을 건다.

“네? 저요?”

“네 너요.”

“아 네.. 저 전공은 철학인데.”

“전공은 철학인 데가 뭐야?”

“아직 잘 모르겠어서요. 계속 고민 중이에요. 계속할지 자퇴할지 전공을 바꿀지는 아직 모르니까요.”

“ 전공을 고민하는 애도 있구나. 멋진데? 다음에 또 보자 내 이름은 박시한이야.”

“ 아 네..... 선배님!”

선배님이라는 말이 갑자기 따라붙었다. 그냥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서. 

다음 수업에 내 옆자리에 박시한 선배님이 앉는다.

“ 안녕하세요.”

“ 아! 미안 옆자리 있어? 자리 잡고 물어 보네 쏘리.”

옆자리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처음이었다. 앉으면 앉는 거지 그걸 또 굳이 물어봐주는 사람이 처음이었고 그 행동이 배려라고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인사로 시작하고 인사로만 마무리되는 애매한 사이. 그렇게 교양수업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난 언니들에게 난생처음으로 남자이야기를 꺼냈다.

“ 언니 우리 학교에 진짜 이상한 사람이 있는데 다짜고짜 전공이 철학이냐고 묻더니 인사하고 가끔 수업 옆자리에 앉고.. 인사하고 그냥 그게 다인데 수업 때마다 똑같아.”

“ 와.... 그 사람 선수네... 야 심리학적으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그 뭐가 있는데 그게 사람을 미쳐버리게 한다는 거지. 신경 쓰이게 하는 최고의 수단. 매일 똑같이 행동하다가 하루 안 해봐라. 미쳐버리지.”

“관심이 있긴 있나 보네. 아님 절대 접근을 안 한다 남자들은.”

큰언니와 작은언니가 자기네 들일인양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난 또 청중이 됐다. 

“언니 그런데 다 아기처럼 보이는데 그 사람은 좀 선배느낌이 나던데?”

“ 지수야. 그게 사랑인 것이다..”

“ 크크 우리 지수가 그걸 느꼈구나 크크. 남들이 보면 졸병인데 내 눈에는 장교처럼 보이는 게 사랑이거든. 아마 그 선배님도 남들 눈엔 복학생으로 보였을지 모르지 너한테는 아우라 넘치는 선배님 일지 몰라도.”

다른 건 몰라도 매일 인사하던 그 사람이 수업 후 보이지 않자 궁금하고 이상했다. 일주일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강의실, 같은 자리에서 보는데 연락처 한 번을 안 불어 봤다는 사실이 설레려고 준비 중이던 내 마음의 시동을 꺼버렸다. 

‘.. 그렇지? 상황이 그렇잖아? 속을 뻔했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는데 그 사람이 서있다. 

“안녕, 오랜만.”

대꾸하지 않고 걸었다. 대꾸하지 않고 걸으면서 그게 이상한 행동이라고 느껴 후회했지만 처음부터 모른척하고 걸었기 때문에 지금 인사를 다시 하는 것도 이상해보일 것이다. 그냥 걸었다. 

“우리 밥이나 한 끼 먹자.”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서 안 되겠다. 그래 정체를 알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 의심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이지 내가 이 사람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밥을 먹는 건 절대 아닌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우린 반찬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했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다가 가방 속 <오만과 편견> 책이 보였는지 그 책 이야기도 잠깐 했다. 

그냥 느낌이 왔다. 이 사람도 인간 대 인간인 그 느낌이라는 것. 왜냐하면 대화가 통했기 때문이다. 언니들 말로는 심장이 떨리고 얼굴도 붉어지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했었는데 난 그냥 편안하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니 이제야 편안하다. 왜일까... 박시한 선배는 나에게 시한폭탄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었던 것이다. 

“ 이름이 뭐니? 난 내 이름 알려줬었던 것 같은데.”

“ 아 전 지수요.”

“ 지구?”

“ 지수요 지. 수.”

성을 말하지 않았다. 성까지 알려주면 나를 온전히 다 알려주는 것 같아서 그냥 싫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이 완전하게 뒤얽히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혼자만의 합리화.  시한 선배는 같은 전공 3학년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1년 정도 휴학을 해서 좀 늦다고. 전공이 안 맞는 것 같아 복수전공을 했었는데 따라가느라 죽을 맛이라고도 했다. 동아리 조인 엠티 때부터 날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막연히 그런 사람을 그려봤었단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스러운 여자. 내 앞에 서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단다. 그게 뭔 말이냐고 되물으니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냥 자기만의 단어라고 표현했다. 가끔 보면 철학과 사람들은 정말 철학스럽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스러운...’

며칠을 그 말에 대해 생각했고 난 그런 이상한 표현을 즐겨하는 시한선배가 인간적으로 좋았다.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지만 늘 좋은 점을 찾아내주고, 뭘 하든 그건 너의 선택이라며 지지를 해줘 좋았다. 그는 내 존재를, 내 생각과 행동을 귀하게 여겨준다. 선배를 보면 니체 같았다. 니체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철학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의 책을 접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스스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대편에게 결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결점을 스스로 고치려고 한다고 니체는 말하기도 했는데 더 좋은 인간으로, 어쩌면 신과 비슷한 완전성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에 공감했었다.

사랑 감정 없이 편하게 유지될 수 있는 선배, 훈수하나 없는 선배. 성장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지만 일상이 더 바르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존재. 그래서 결국에는 더 좋은 인간으로 변하고 상대방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렇게 시한선배와 나는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됐다. 결코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사랑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6


학교 대자보에 다양한 이슈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글자.

[파트너를 구합니다]

파트너 동행이 필수인 바다 건너 나라 졸업파티도 아니고 이건 뭔 뜬금없는 구애작전이나 싶어 내용을 살펴보니 동아리 벤처사업 모집 공고였다. ‘아 내가 생각하는 그 파트너가 아니었구나...’ 머쓱한 마음이 들어 다른 내용들로 빠르게 눈을 돌렸다. 

‘왜 엉뚱한 데 관심 생기고 난리야 이상하게.’

철학 전공수업은 따분하고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철학과를 간다고 했을 때 모두들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었으니까. “뭐.. 배워 거기서?” 나도 아직 잘 모른다. 정확하게 뭘 배우고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읽어왔던 책들, 내가 푹 빠졌던 것들은 깊은 사색을 동반하는 것들이었다. 난 그렇게 깊숙이 들어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나만의 해답을 찾는 것이 너무 행복했을 뿐이다. 심지어 재미있다. 철학과 수업은 기본적인 이론들을 바탕으로 시대별 철학가들을 배우기도 하고 다양한 화두로 토론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작은 현상 하나조차 그냥 넘기지 못한 사색가들이 넘쳐났고 그런 사색은 인생자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특성상이라 말하기엔 뭣 하지만 궁금한 게 많아지니 책을 많이 접하게 되고, 도서관에서 살게 될 수밖에 없는 과제들도 넘쳐난다. 

“사랑을 할 나이인가 20대는?” 교수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강의 시작 멘트치고는 모두를 한 번에 집중시킨 좋은 문장이었다. 철학과 사랑의 이야기가 뒤섞이자 강의실은 뜨거워졌다. 수업에서 우리는 소설 속에서의 문학적 사랑, 철학가들이 생각하는 사랑, 사랑의 분류 등 다양한 화두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랑을 의미할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광범위하게 느껴지자 우리가 말하는 그 데이트 또는 연애라는 단어는 넓은 우주에 티끌정도의 의미처럼 보였다. 수업 말미에 개별이든 조별이든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나의 철학이 녹여든 과제를 제출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사랑은 조별보다는 개별이 어울릴 것 같아 난 개별로 진행하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들을 뽑아 읽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연습장에 한 글자 한 글자 생각을 박았다. 

부모님은 중매결혼을 했다. 큰 언니는 대학교 미팅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둘째 언니는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던 대학선배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소개는 아니지만 찰나의 시간 서로가 서로에게 끌릴 수 있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일 수 있었고 찰나가 평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동네에는 하루 3번, 일정한 시간에 폐지를 모으는 한 분이 있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였다면 괜히 마음이 쓰려 애써 시선을 피했었을 텐데 그분은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아서 눈에 띄었다. 

많아도 50대? ‘저분은 왜 저 일을 하고 계신 것일까.’ 궁금했다. 늘 성큼성큼 걸어가며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저 사람. 씩씩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며 자신감 있게 걸어가는 저 사람. 우리 동네 마스코트라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월, 수, 금 10시, 2시, 6시 한결같이 씩씩했다. 언니와 순대 한 접시를 사러 나오는 길 그분을 또 만났다. 금요일 날에는 수업이 없어 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 오는데 늘 금요일 6시에 그를 보게 된다. 가방에 걸려있는 하얀 종이가 반짝였다. 흰 종이 위에 검정 색 글귀가 언니와 내 눈에 동시에 들어왔다.    

 

저와 함께 인생을 나아갈 평생 친구를 찾습니다. 

가진 것은 많이 없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글을 보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대놓고 하는 구애가 이렇게 깊이 있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인가. 저 용기는 대담함일까 무모함일까. 그의 마음은 진심일까 실험정신일까. 애써 그의 얼굴이나 확인하려 바라보았지만 햇빛에 눈이 부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종이 아래 검은색 매직으로 선명하게 전화번호가 보였다. 빨간색 번호였다면 분위기가 깨졌을 것 같다고 나름대로 결론내고 언니를 힐끔 바라봤다. 언니는 그를 힐난할 준비를 마친 투사의 표정이었다. 우리 언니의 표정 따위가 그에게 뭔 대수였겠는가. 코팅된 흰 종이를 가방에 단 그는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와.. 저 사람 정말 대박이다. 누가 전화를 거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한다? 개나 주라고 그래라.”

“언니~~ 왜 그렇게 삐딱 선이야? 요새 형부랑 안 좋나 봐? 흐흐. 저것도 용기다 언니.”

“철학과 다닌다고 저런 것도 용기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너~ 이건 무지야 무지. 평생 친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한결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은 결국엔 지쳐. 늘 주는 사람 곁에는 늘 받아야만 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거든. 이게 완벽하게 제로섬게임인거지.”

“그런가.. 연애 좀 해보려고 하는데 마음이 꼼짝 하지를 않네, 난. 언니, 나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 주제가 ‘사랑’인데 난 사랑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더라.”

“넌 우리 가문의 수치다 이것아. 아니, 좀 만나봐 편하게.”

“편하지 당연히. 너무 편하기만 해서 그게 문제지만..”

“꼭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자체만 사랑으로 생각하지 마. 난 너와 시한 씨의 관계도 넓~~ 은 의미로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주말에 너 친구들이랑 봉사하러 나가는 그곳에서의 관계도 사랑이라고 보거든?”

“이론서 같은 이야기 한다 언니. 재미없게.”

“넌 집에서 지겹게 언니들 연애하는 것 20년을 구경하면서 뭐 느끼는 것 없었니? 언니가 결혼을 해보니까 확 이해되는 게 결혼은 의리라고 하잖아? 이게.. 뭐랄까 얕은 사랑에서 깊은 사랑으로 도래한다고나 할까? 그게 결혼인 거야. 연애는 정말 감각적인 움직임인 거고 결혼은 정서적인 움직임이야.”

“결혼은 무덤이라던데? 누가?”

“음.. 무덤... 깊고 깊이 무덤이 있으니 뭐 맥락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 언닌 결혼으로 얻는 것도 있다고 봐. 다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고나 할까. 이제야 보이는 지혜로 나이 들어간다고 느껴지더라. 사랑이란 게 참 요망해. 그 지혜를 옛날에 좀 알았으면.. 난.. 형부랑 결혼 안 했지 ㅋㅋ 내 이상형은 지금 남편이랑 완전 반대인데 결혼은 또 이상하게 그렇게 흘러가더라? 성격도 달라, 좋아하는 것도 달라, 코드도 달라.. 뭐 하나 잘 안 맞아서 삐걱거릴 것 같은데도 희한하게 잘 간다 말이지. 그래서 요망한 거야. 예측이 불가능하잖냐.”

“크크 정말 언니랑 형부는 다 달라. 신기하긴 하다. 잠깐 연애해서 결혼해도 몇십 년 맞추면서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한 거 같아. 차라리 공개구혼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지 않아? 아까 저~ 아저씨처럼. 그냥 아예 대놓고 내 인생의 지향점, 취향, 갖가지들을 나열하는 거지. 그에 맞춰서 올 사람들 와라. 나는 선택하겠다. 이거 말 안 되나?”

“걸러져서 오는 사람들도 결국 매한가지일걸? 이론으로 빠삭해봤자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란다 아가씨야. 언니도 뭐든 이론으로는 빠삭해. 실전이 어려워서 그렇지.”

“너무 인간미 없는 짓인가? 언니 나 ‘남자친구 구합니다.’ 이런 거 한 번 해볼까?”

“어머 이봐. 너 궁하니? 정 그리 궁하면 언니가 소개해줄게. 대학가 더니 별 걸 다한대 얜.”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미 일어나기도 했었다. 미국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신문광고에 대문짝만 한 아들 얼굴을 걸고 광고하기도 했다. 조건도 구체적이었다. 나이, 몸무게, 키, 좋아하는 것, 정치적인 성향, 바로 임신을 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하며 등등... 말이 안 될 것 같은 신문구애광고에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고 이 광고 자체가 이슈화되기도 했던 것이다. 어쩌면 누구나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조목조목 나열한 제안들이 나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그 자체를 운명적인 사랑으로 생각할 게 뻔할 테니 말이다. 

순대를 샀다. 간과 허파를 넣어서. 오소리감투는 언니의 보톡스 때문에 턱에 무리가 간다고 뺐다. ‘난 오소리감투를 좋아하는 남편을 구해야지.’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결혼을 한 뒤에도 꾸준히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분명 자기만족 때문에 저런 짓들을 꾸준히 해나갈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7


남편을 구합니다. 사랑을 잘 모르는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를 구합니다. 

사랑을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고집이 있는 여자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경험조차 없는 애송이 같은 남자도 싫습니다. 그렇다고 문란한 연애를 이어온 사람도 싫습니다. 일방적인 배려 심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을 하는데 도중에 끊거나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화를 내서 분위기를 뒤엎는 다혈질적인 사람은 사양합니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언니 둘이 있습니다. 여자 남자 성차별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남자를 원합니다.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 남편 부인 이렇게 구분 지어 역할을 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전공인 저는 문학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기본적인 세계문학전집,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 100권 정도는 알고 있고 읽은 사람이 좋습니다. 자기 전에 조명을 켜고 둘이 나란히 침대에 앉아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맥주보다는 따뜻한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좋습니다. 늘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을 구합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 장을 함께 보고 돌아오는 길 소소한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요리를 중간 이상은 해서 맛있는 음식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짧은 헤어스타일이 어울리는 남자를 원합니다. 발과 손은 너무 작지 않아야 합니다. 175 – 185cm 정도의 신장의 남자, 몸무게 72kg-78kg 정도, 피부가 너무 하얗지 않고 건강미 넘치는 남편을 구합니다. 목소리는 너무 얇지 않고 높지 않은 중저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벼운 이미지는 싫거든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자녀계획보다는 부부의 미래 이야기를 더 심도 있게 할 수 있는 남편을 원합니다. 아이가 생겼을 경우 아내의 일과 자기 계발을 위해 육아휴직을 낼 수 있는 남편을 구합니다. (아이의 성별에 집착하는 남자는 사양합니다.) 밤낮이 바뀐 일을 하는 사람은 싫습니다.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함께 잠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화이트계열을 좋아하고 심플한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사람을 구합니다...     

신나게 타이핑을 쳐 써 내려가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게 가능한가. 이 항목을 완벽하게 다 맞출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여태 마음을 못 열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즉흥적이고 조심성 없는 사랑도 필요한 거라는 큰언니의 말이 맴돌면서 난 뭐 때문에 이렇게 늘 조심하고 의심하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는지를 되짚었다. 내 눈에는 나이 차 많이 나는 언니들의 연애모습이 부당해 보였다. 꾸미며 치장하느라 공들이는 시간은 부당해 보였다.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전화를 받기 전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 노력이 부당해 보였고 선물을 받으면 고맙다고 헤벌쭉 웃는 모습이 부당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애쓰고 사랑받아봤자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린 언니의 모습과 그 시간들이 부당해 보였고 결혼한 후 언니의 삶도 괜히 부당해 보였다. 연애 때와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언니는 여전히 늘 사랑받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았고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며느리노릇을 이어가야 했고 난 그 모습이 부당해 보였다. 

더 냉정하게 더 의심하며 더 나를 강한 여인으로 만들어야 남들이 하찮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목숨 걸면 난 결국 사랑에 굶주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인간이 될 것이고 누군가의 삶에 귀속될 것이 뻔하다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결국 나도 인간이었던지라 사랑 없는 청춘이 애달팠다. 다가오는 설레 임을 애써 모른 척 하기가 속상했다. 언니들 때문이라고 빈정거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지 모른다. 사랑에 갈구하지 않아도 바람처럼, 공기처럼 내 옆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어쩌면 사랑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이 스쳐갔다.

백스페이스키를 눌러썼던 글귀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한 줄 한 줄 문장이 지워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마음속 안개가 드디어 걷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시한폭탄선배.

전화기에 난 시한선배를 시한‘폭탄’ 선배라고 저장해 놨다. 아마.. 나에겐 그 사람 자체가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으리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로 문자가 왔다.     

“지수야. 밥 먹자. 맛있는 걸로.”

이제는 대답을 해야 될 것 같다.

“밥 먹고 커피도 같이 마셔요 ‘우리’”     

내가 원하는 그 사랑은, 애인은, 남편은 허상이다. 즉, 누구도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났다고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몇 년 만 더 기다려보라. 기대는 더 큰 충격을 안겨 줄지어니. 내가 너무 비관적이라 생각하는가? 아니, 난 현실 속에서 사랑을 관찰했다. 그 속에서 내가 확인한 사랑은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었다. 허상을 좇아가다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담담하게 걸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난 배웠던 것이다. 철학전공자의 내공은 생각보다 세다.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다. 우연히 만나든, 작정하고 만나든 사랑을 이어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돼 서로의 인생을 침범하기도 하고 서로 가장 의지하고 위로하는 사이가 되며 가장 돈독한 관계로 자리 잡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리포트 첫 장, 남편을 구합니다. 크게 타이핑하던 그 글자들이 말끔히 지워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